#00.


“…혼담이라.”

복도에서 살람을 마주치고 돌아와 소파 위로 몸을 묻은 아리온이 시선을 내리며 깨끗한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과거와 달리 손가락이 잘린 곳도 없고, 생채기 하나 난 구석도 없다. 전형적인 귀족의 손이로군. 매끄럽기 짝이 없어.

‘이런 손으로는….’

쯧. 짧게 혀를 찬 아리온이 눈을 굴려 자신에게서 조금 떨어져있는 커튼 사이를 훑는다. 착각인가 했지만―. 틀림없이 쥐새끼로군. 아리온의 미간이 살며시 찌그러진다. 내가 복도를 노닐던 사이에 숨어들었나.

“아버지의 말대로 거부할 수 있는 길은 없겠지. 황실에서의 혼담이라.”

정해진 습관대로 입술을 더듬는다. 불안한 듯 눈을 흐리며 상황을 살핀다. 당장에 공격할 의사는 없나. 하지만 왜 저를 노리는 거지? 무슨 연유로.

나보다도 세기의 천재라고 불리는 살람을 감시하는 편이….

아하.

“그렇군.”

느릿하게 말을 이은 아리온이 거스러미가 진 입술을 혀로 훑어 내린다.

“살람은 힘들겠어. 이리 정해진 것이 많으니.”

얕보였구나. 주제도 모르는 것들.

아리온의 호박색 눈이 빛을 발한다.



*




오늘 아버지는 공석인가. 의자 옆의 작은 상자를 밟고 자리에 앉은 살람이 식탁의 끝, 베르틴의 자리를 힐끔인다. 분명 급한 용무가 있다고 했었지. 어제 형님이 아버지를 찾아 뵌 것과 관련이 있는 일인가.

“살람.”
“네, 형님.”

갑작스레 제 이름이 불리다니. 식사 도중 부름을 받은 적이 없어 적지 않게 놀란 살람이 크게 뜨인 눈으로 아리온을 바라본다. 아리온은 그런 살람의 반응에 흠, 하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곧 옅게 웃음을 내지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신경 쓰이느냐?”
“…아무래도. 네.”
“요즘 아버지께서 처리해야할 건이 많은 모양이더구나. 걱정마라. 곧 해결 될 일로 보이니.”

‘곧’ 해결 될 일? 대체….

“그건 그렇고 살람, 그 날에 물었던 것은 모두 해결되었느냐?”
“네?”

살람이 아리온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리온의 목소리가 보다 부드럽게 변모했다.

“‘군주론’ 말이다.”

아리온이 접시 옆의 나이프를 가볍게 틀어쥐었다.
그런 예의 하나 없는 놈들에게 틈을 내어줄 순 없지. 살람은 분명한 천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이 그것보다 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천재라.

자신도 이미 여러 번 들어보았으니.

다만 그것이 살람과는 다른 천재天災라는 점에서일까.

아리온은 자신의 앞에 놓인 스테이크의 끄트머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내어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나이프가 잘 벼려 있군.

“곧.”

아리온의 시선이 목소리가 뻗어져 나온 살람에게로 향한다. 허리를 곧추 세운 살람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아리온을 직시해온다.

“―해결될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부재와 내가 그날 밤에 물었던 ‘군주론’에 대한 접점. 살람은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식당을 나서며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형님께서는 아버님이 처리해야할 일이 ‘곧’ 해결되리라고 말문을 여셨다. 그리고 저에게 또 다른 물음을 던질 때에도 ‘곧’ 해결 되리라는 답을 유도하며 이야기를 진행하셨지.

곧…. 빠른 시일 내에 끝마쳐야 할 일? 그것도 아버지와 내가―.

속이 거북하게 타들어간다. 살람의 걸음이 보다 빨라진다. 그리고 문득 복도 위를 지나던 살람의 발이 느릿하게 변한다.

‘짐승의 방법이 통하지 않는 자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날의 이야기가 활자처럼 머릿속을 유영한다.

‘사람들은 정말, 폭력을 두려워하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기억 속의 감각이 살람을 잠식한다. 나는 형님의 눈빛을 기억한다. 내가 우그러뜨린 책의 표지조차도.

‘잘 모르겠구나.’

그건 뱀의 눈빛이었다. 나를 옭아매고, 먹이의 크기를 점쳐보는.

잠시 숨을 멈춘 살람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분명, 이 복도의 왼쪽으로는 시종, 시녀들이 묵는 곳이―.

“…….”

굼뜨게 움직이던 살람의 발이 이제는 완전히 멈춰 섰다.

짐승의 방법이 통하지 않는 자.

이를테면 그래, 그 방법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잘 알고 있는 사람. 꿰뚫어야‘만’ 하는 사람. 그 정도로 사람들의 행동반경을 조사하고, 살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폭력을 두려워하고 사랑을 원하는 자’들을 거느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 즉 그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자.

그건 아마, 귀족들과… 황가.

하지만 그것을 형님은 ‘잘 모르겠다’고, ‘곧 해결되리라’라고.

살람의 손이 단단하게 쥐어진다.

직접적으로 내뱉을 수 없는 것.

황가구나.

“…걱정마라는 것은 이걸 뜻하는 것이었습니까.”

속삭이듯 말을 내뱉은 살람이 다시금 걸음을 옮긴다. 그렇다면 황가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고. …뭔가 거슬리는 게 있었나보군.

그리고 그건 바로―.

살람의 캄캄한 눈동자에 그림자가 지며 우울한 낯을 만든다. 아, 형님. 저는 조금 슬픕니다.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구나.’

어째서 그리 절 잘 아십니까. 맞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형님은 아시는지요.

“도련님. 조금 뒤에 경제학의 수업이 있습니다.”
“듣지 않겠다.”
“…네?”

쾅, 평소와는 달리 서늘한 분위기의 살람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방을 나서게 된 시녀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문을 거세게 두드려온다.

살람은 침을 삼켰다. 참을 수 없는 갈증이 터져 나왔다.

형님 또한 관련이 될 만한…

황가가 우리에게 내린…

‘조치’란.

“―하지만, 도련님!”
“시끄러워.”

살람의 자그마한 발이 문을 강타한다. 그러자 쥐죽은 듯 조용해진 문밖의 시녀다. 살람은 입을 비틀어 웃었다.

형님은 분명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거다.

‘얕보였구나. 살람.’

살람의 손끝이 고동빛의 문틈을 쓸어 올린다.

네에…. 형님. 감히 분수도 모르는 것이 저희들을 얕보았습니다. 곧이어 살람의 입술이 핏물로 물든다. 감히, 저희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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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6-27 12:08 | 조회 : 1,477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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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2307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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