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과거, 엘런에게는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것보다 훨씬. 자신에게는 신분도 없고 가진 것이라곤 이 볼품없는 몸뚱이,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엘런? 그게 무슨 뜻인지 알려달라고?”

엘런. 누군가가 저를 향해 말했다. 한참이나 역겨운 것을 보는 듯한 얼굴로.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 말을 외웠다. 엘런…, 엘런. 그러다가 어느 날, 지루함에 하품하고 있는 뒷골목의 샤비에게 가서 물었다. 샤비는 이 말을 알고 있지 않을까? 그는 그래도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까.

“뭘 그런 걸 묻고 그래? 엘런은 남자아이라는 뜻이야. 그것도 아주 보잘것없는. 주로 높으신 분들이 아랫것에게 붙인다고 들었는데…. 뭐야, 듣기라도 했어?”

샤비가 저를 보며 코웃음 친다. 그의 웃음은 거칠고 난폭하다. 샤비의 입꼬리가 비죽 솟아올랐다.

“그거 알아? 엘런에는 또 다른 뜻이 있어. 보잘것없고, 남자아이. 뭐가 떠올라?”

샤비의 집게와 엄지손가락이 원을 그리며 비아냥대듯 입을 연다. 샤비의 반대쪽 손가락이 올라가며 그 원 안을 들락인다.

“남창이야. 넌 더럽고 냄새나지만 않으면 곱상하니까.”

남창. 그들이 내게 내뱉었던 말들이…. 나의 시야가 어둡게 침잠됐다. 샤비가 남사스러운 제스처를 풀며 그런 엘런의 모습에 턱을 긁적인다.

“그건 그렇고… 내 부하 중 한 명이 널 노리고 있던걸. 조심하는 게 좋지 않아?”

얄궂은 샤비의 시선이 엘런의 신형을 가볍게 훑어내린다.

“크하핫, 근데 엘런이라…. 어떻게 그런 것만 콕 집어서 들었지?”

내 고개가 더욱 아래로 꺼져 들어간다. 망할. 시야 아래로 눈물이 떨어진다. 나는 샤비의 더러운 시선을 피해 등 돌려 재빨리 뒷골목을 빠져 나왔다.

도망가야 해. 아니면 샤비의 부하가….

그렇게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나갔다. 나의 모습은 더욱 지저분해지고, 뒷골목을 노닐던 손 나쁜 아이들조차 나만은 노리지 않았다. 나는 혼자였다. 나를 역겨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엘런’이라는 말을 내뱉는 사람들조차 없었다. 애초에,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더러운 애새끼.”
“저것을 보면 없던 병도 생기는 기분이에요. 염치도 없지. 어떻게 저런 모습으로….”
“물에 가까이 두지 마. 더러워진다고.”

사람들은 나를 전보다 훨씬 더 경멸했다. 나는 쓰레기였다. 전염병이었다. 살아있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의 주위로는 항상 둥그런 원이 생겨났다.

마치 그날, 샤비가 만들어낸 손가락 사이의 원처럼.

‘이럴 바엔 그때 뒷구멍을 내주고 말 걸 그랬어.’

나는 무엇 때문에 이런 모습을 해야 했는지 잊어버렸다.

이럴 바엔 그냥.

차라리.

목이 메어왔다.

나는 살아있는 게 두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에 한 귀족을 만났다. 바람도 부드럽게 밀려 지나갈 것 같은 흰색의 고운 옷을 입은 남자아이였다. 천사인가? 나는 잠시 홀린 듯 입을 벌려 아이를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새까만 빛을 담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흐트러지며 사이사이로 노란 안광을 빛내왔다. 아니…, 다가왔다.

나는 서둘러 쓰레기통을 뒤적이고 있던 손을 들어 그 아이에게로 휘둘렀다.

어째서 내게로 다가오는 거지? 다가오지 마. 난 더러우니까.

천사 같은 용모를 지닌 귀족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입을 더듬었다.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어째서 이런 귀족의 아이가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알 수가 없다. 이런 더러운 곳에, 왜?

왜 자꾸, 다가오는 거지?

나는 그 아이가 다가올수록 뒷걸음질 쳤다. 경고음이 왱왱 머릿속을 울려왔다. 아이는 입을 좀 더 더듬어 보이다 알겠다는 듯 수긍하며 자리에 멈춰섰다.

“넌 이곳에서 자랐나?”
“…….”
“이름이 뭐지?”
“…….”

아이는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이런 더러운 바닥에서 자란 아이가 이름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을 텐데도. 다만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미동 없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봐오는 아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엘런.”

그건 나의 이름이 아니었다. 내가 이때까지 도망쳐왔던 무언가였다.

하지만 나는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내뱉었다.

아이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둥둥 울리며 존재감을 더해왔던 심장이 한순간에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

아이의 웃음이 작게 터져 나왔다. 거칠고 기분 나빴던 샤비의 웃음소리와는 달랐다.

“엘런이구나.”

부드럽지만 단단하고, 덤덤한.

그런 웃음이었다.


아이는 그런 웃음을 끝으로 더 이상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조금의 거리를 둔 채 어느 한 풍경을 감상하는 것처럼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그 아이의 눈에 왠지 모를 서글픔이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저 눈이.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그 후로 내 앞에서 홀연히 사라지거나, 나타났다. 어쩌면 내가 그 아이를 사람들의 사이에서 무의식적으로 찾아 헤맸는지도 모른다.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아주 옅게 웃었다. 마치 정다운 것을 보는 것처럼. 그리고 잘게 입을 더듬어 무언가를 내뱉었다.

‘네가 아니야.’

왠지 그런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 그런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아이가 입을 열고 무언가를 속삭이듯 내뱉으려 할 때마다 등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이는 자꾸만 날 이상하게 만들었다. 앙상한 가슴뼈 위로 솟구치던 심장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항상― 그 아이를 볼 때면 눈물이 솟구쳐올랐다.

알 수가 없다.

넌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인데도…. 넌 왜 자꾸 내게 다가오는 것만 같은지.

나는 그 아이가 다가오지 않았으면 했다. 이 이상 날 흔들지 말았으면 했다. 나를 감싼 공기가 불시에 까맣게 타오르는 듯하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였다. 차마 입 밖으로는 내뱉을 수 없는 말이 목 끝까지 치달아 올랐다.

나는 너를…

미치도록 붙잡고 싶었다.



*


그러니까 그 날도 똑같았다.

너는 사람들의 사이에서 기사들의 중장갑에 둘러싸인 채 거리를 거닐고 있었고, 나는 그 반대로 몸을 돌려 조용히 그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으니까.

“―왜 자꾸 이리로 내려오신대요?”

앞치마를 휘두르며 호객행위를 하던 생선 장수가 옆에서 지폐를 세리던 제 남편에게 작게 말을 걸었다.

“뭘. 시답잖은 흥밋거리라도 찾았나 보지.”
“흥밋거리라면….”

생선 장수가 손님을 가판대로 이끌며 고개를 길쭉하게 내뺐다. 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상하신 귀족 나리도 아랫도리는 짐승이다, 이거지. 아직 일곱 자도 안 지나 보이는 아이가 약아 빠져서는….”
“아이고― 말조심해요.”
“나 참, 이 여편네도. 귀족들이 여 내려와서 하는 게 그것밖에 더 있겠어? 나는 숱하게 봐왔지. 기품 잃지 않으려 말 감추기 딱 적당한 곳 내려와서 질펀하게 놀다가는 거야. 이번만 해도 봐. 사라진 아이들이 대체 몇 명이야?”
“그건 그렇지만…. 저 어린 것이….”
“귀족들은 다 똑같아.”

생선 장수의 남편이 고개를 저으며 저가 세리던 지폐를 허공에 탁탁 털어내곤 말했다.

“자, 딱 23에리엇! 배 곪을 일은 없겠구먼. 뭐, 저 치들은 이런 걱정 하지도 않겠지만.”

그 이야기를 듣던 내 머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이가 바득 갈리고― 이상하게도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가슴 속을 가득 메운다. 생선 장수가 못 말린다는 듯 남편의 어깨를 툭툭 친다.

“그건 그렇긴 해요.”

주먹이 뼈가 도드라지도록 희게 쥐어졌다. 하지만 그게 너와 나의 사이였다. 나는 거리를 빠져나가는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너는 날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나는 대체 뭘 너에게 기대하는 걸까?

캄캄한 어둠이 발끝을 좀먹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스치듯 바라보았다.

…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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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6-27 12:09 | 조회 : 1,430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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