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아버님이 형님을 부르셨다고.”
“네에, 꽤나 진중한 이야기로 보였습니다.”

딱, 책상을 가볍게 두드린 살람이 말을 전한 시녀를 물린다. 시녀가 물러나자 형형해진 살람의 눈빛이다. 복도에서 만난 형님의 말이 뇌리를 스친다. 무슨 일로 아버님이 형님을 부르셨을까. 살람은 이를 악 아물며 생각했다. 평소와는 다르다. 형님이, 아버님께.

살람의 시선이 책장을 향한다. ‘군주론’. 제법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녹색의 커버. 어제 밤에는 저 책을 들고 제 형님을 찾아뵈었더랬다.

“형님.”

커다란 문 너머로 얼굴을 빼꼼 내민 살람이 곧이어 제 몸만 한 크기의 책을 낑낑대며 들여놓는다. 아리온의 덤덤한 눈빛이 그런 살람을 향한다.

“무슨 일이냐, 살람.”
“최근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배우고 있는데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곳이 있어서요. …관련해 이야기가 하고 싶어져 왔습니다.”
“네 스승을 내버려두고?”
“사실 형님과 이야기가 하고 싶음이 더욱 큽니다.”

웃음을 한껏 내보인 살람이 제 커다란 눈동자를 살살 돌려 아리온을 바라본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형님과 만날 시간이 없지 않겠습니까. 언제나 관망하듯 저를 내려다보는 아리온의 시선이 조금 서늘하다. 살람은 그런 아리온의 시선을 곱씹으며 무엇보다도 화사한 웃음을 띠어 올린다.

“…들어 오거라.”

아리온의 내음은 서리가 내린 새벽과 닮았다. 잘 녹아내리지만 잘 털어낼 수도 없다. 있는 듯 없는 듯 표면을 감싸오는 그것은, 유독 시리게 다가옴에.

“그래, 무엇이 그리 이해가 가지 않지?”
“형님은 혹시 군주론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십니까?”
“군주론이라… 참으로 냉정하지만 한편으로는 반박할 수 없는 현실을 잘 나타내었다고 느낀다.”

살람은 제 책을 들어 적당한 자리로 향하는 아리온의 뒤꽁무니를 쫓으며 입을 열었다. 제 형님은 저의 물음에 어떠한 대답을 내놓을까. 사실, 논리 정연한 대답 같은 건 원치 않는다.

“전,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살람은 알고 있었다. 입을 뗄 때면 더듬어지는 형님의 입술을. 작위적인 웃음을. 왜 아버지께서 형님을 피하시는 지도.

아리온은 소파 위로 몸을 묻으며 그런 살람을 바라보았다. 살람은 그 옆으로 다가가 앉아, 아리온이 넘긴 군주론을 품에 안은 채 고개를 떨궜다.

“군주는 짐승의 방법을 교묘히 사용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짐승의 방법이 통하지 않는 자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살람이 커다란 책을 한 장, 두 장 넘기며 발끝을 까딱였다.

“사람들은 정말, 폭력을 두려워하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살람은 웃음을 품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리온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에는,

“…그건.”

―잠시, 숨을 멈추어야만 했다. 아리온이 작게 눈을 좁히며 살람을 훑었다. 자신도 모르게 책장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가 우그러졌다.

“잘 모르겠구나.”

뱀의 눈빛이었다.



*



내가 세 자를 넘었을 때, 나의 몸은 누구보다도 작고 통통했다. 다만 기이한 점은 내가 너무나도 월등하다는 것일까.

“둘째 도련님은 천재에요.”

날 담당하던 보모가 불쑥 그런 말을 내뱉었다. 바닥에 어지러이 굴러다니는 책 몇 권을 모조리 외워 낭송했을 뿐이다. 나의 작은 몸으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기에. 하얀 종이 위를 기어 다니던 활자들이 머릿속을 유영한다.

“천재?”
“네, 남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모두들 이런 것을 어려워한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까딱이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말도 안 돼.

“마리보다도?”
“적어도 제가 만나본 도련님들 중 둘째 도련님께서 제일 뛰어나십니다.”

보모의 치맛자락이 바닥을 스친다. 나를 향해 커다란 손을 과장스럽게 펼쳐 보인 보모가 기쁘다는 듯 입을 연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던가. 난 그런 보모의 손이 시야를 한가득 메워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손은 아주 작다. 그 손의 반절도 되지 않을 만큼.

“…그렇구나.”

나는 깨달았다.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일구어야 하는지.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지. 저보다 커다란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도.

점점 멀어진다. 나보다 열등한 자와의 사이가.

무지렁이와도 같았다. 자신의 재능을 가늠하지 못하는 자들이.

그리고 그런 내가 형님을 처음 만난 곳은 저택 내의 도서관에서였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형’이란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간혹 보모가 이야기 해주던 자신의 형이란 사람은, ‘음침하고 딱히 특출 난 곳도 없는 하여튼 이상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보모의 손을 잡고 들어간 도서관의 내부는 생각보다 지저분했다. 이곳은 정리를 잘 하지 않는 건가? 싶을 정도로. 나는 발끝에 채이는 도서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곤란한 표정의 보모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 그래, 마리?”
“아…. 아무래도…….”

얼굴이 조금 하얗게 바랜 보모가 안절부절 몸을 뒤튼다. 이렇게까지 당황한 모습은 이때까지 본적이 없다. 나는 시야를 이리저리 가리려는 보모의 몸을 피하며 고개를 들었다.

“―뭐야.”

그곳엔 저와 같은 까만 머리칼. 하지만 저와는 명백히 다른 샛노란 빛의 두 눈이,

“넌 누구지?”

날 직시하며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마치 황금이다. 무엇보다도 값지고… 아름다운.

보모는 살람을 억누르듯 내려다보는 아리온에게 깜짝 놀라 소리를 질러 말했다.

“첫째 도련님! 이분은 도련님의 형제분이십니다! 부디 그런 행동은…!”
“…형제?”

아리온의 눈이 작게 좁혀진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눈빛. 살람은 그런 아리온의 눈빛에 꼼짝할 수 없었다. 가슴이 쿵쿵 뛰어오르는 것만 같다.

“아, 그러고 보니. 내게 아주 뛰어난 이복동생이 있다고 들은 것도 같군.”
“…….”
“첫째 도련님!”

보모가 날카로운 웃음을 내건 아리온을 향해 다급한 외침을 내뱉는다. 아리온은 그런 보모의 외침에 아차, 뒤로 발을 내빼며 입을 살짝 더듬었다.
“그래, 네가 얼마나 뛰어난지 보고 싶구나.”

나는 그 모습을 잊지 못한다. 어지러운 책들 사이에서 빛나는 당신의 모습을. 가늠하듯 저를 재는 그대의 두 눈을.

나는 세차게 뛰는 가슴 속 고동을 느끼며 깨달았다.

그건, 짐승의 입을 앞에 둔 무지렁이의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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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6-27 12:07 | 조회 : 1,867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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