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세상은 본래 뒤틀려있다. 폭스 가의 장남, 아리온은 자신의 밑으로 자그마한 몸짓을 펼쳐 대는 이복형제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자라나면 자라날수록 뚜렷해지는 저 창백하리만큼 흰 피부를 보아라. 저 새카만 눈동자는 어떻고. 가끔씩 내비치는 영민한 사고방식과 태도 또한 섬찟할 만큼 닮아있다.
아리온은 더듬더듬 입을 열어 아이의 이름을 내뱉었다.

“살람.”
“응, 형아.”

살람의 고개가 부드러이 돌아가며 아리온을 마주쳐온다. 물론 기억 속의 그는 저를 보며 이리 따스하게 웃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마주하는 순간…

“왜 불렀어?”
‘왜 불렀나.’

기이한 눈빛으로 대답을 재촉해왔다. 금방이라도 대답하지 않으면 널 집어삼켜 버릴 것이라는. 그런 눈빛으로. 아리온은 가볍게 고개를 털어 귓가에 어른이는 그의 목소리를 떨궈냈다. 하지만 과거일 뿐이다. 내가 그에게 종속되어왔던 나날들. 틈 없이 지배되어왔던 순간들. 생명의 무지함과 죽음의 기꺼움을 알아야만 했던 그때와는 다르다.



*



“…아리온, 너는 이미 알고 있겠지. 네 이복동생 살람의 재능을 말이다.”

베르틴 폭스, 자신의 아버지는 시종을 물리며 그리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가 물린 시종들의 낯이 평소와는 달리 어두워 보였다. 무언가 일어났군. 아리온은 버석한 입술을 가볍게 말아 올렸다.

“살람은 참 영리한 아이입니다.”

어제 밤에는 저에게 찾아와 ‘군주론’에 대해 묻기도 했지.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목이 바짝 말라오는 듯하다. 살람이 그날 밤, 제 몸만큼 커다란 책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을 때.

“…벌써 열개가 넘는 시험을 치렀던가요.”

나는 그 아이의 눈에서 ‘그’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천진난만한 미소가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는다.

‘군주는 짐승의 방법을 교묘히 사용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짐승의 방법이 통하지 않는 자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살람의 손아귀가 별안간 책의 끄트머리를 우그러뜨린다. 하지만 살람의 위로 떠오른 미소는 지지 않는다. 이 아이는 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무엇을 이루고 싶어 하는가.
그리고 나는… 이 아이를 통해 무엇을 보려 하는가.

“경제, 정치, 사교…, 아마 더욱 커서는 큰일을 이루겠지요. 살람은 저희 폭스 가의 훌륭한…….”

쾅! 불시에 책상 위를 주먹으로 내리친 베르틴이 눈가를 주무르며 이내 신음했다. 어떤 점에서 화가 난 것인지. 아리온은 더듬더듬 벌어지려던 입술을 굳게 닫으며 베르틴의 한껏 달아오른 귓가를 힐끔거렸다. 아하, 그렇다면 살람을 관련해 무슨 사건이라도 터진 모양이로군. 아니면 그리 살람을 아껴하던 베르틴이 그 아이의 이야기로 이리 성을 내지 않을 터.

아리온은 베르틴의 귓가에서 시선을 돌려 그의 집무실 바닥으로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오는 금장이 찍힌 한 장의 문서. 재상에게서 온 문서인가. 꽤나 중요해 보이지만 아무렇게나 우그러져 바닥에 떨어져 있다. 내용은… 책상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군.

“살람에게 혼담이 들어왔다.”

아리온은 분을 삭이는 듯 씩씩대는 베르틴의 말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혼담은….”
“그래. 본래라면 아리온, 너에게 왔을 혼담이다. 아니, 왔어야 했지. 첫째의 혼담이 들어오질 않았는데 둘째가 먼저 받는다는 건 들어보지도 못했어. 망할, 이건 폭스 가를 향한 우롱이다.”

…쯧, 예절도 없는 것들. 분명 살람의 재능이 무서웠던 게지. 베르틴이 지끈거리는 눈가를 꾹꾹 누르며 아리온의 눈을 마주쳐온다. 묘하게 생기가 없는 두 눈. 저 아이는 제 아내의 배를 빌어 태어났을 때부터 왠지 모를 거리감을 지니게 했다.

“…그럼 이제부터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아리온의 입이 더듬더듬 벌어진다. 베르틴은 그런 아리온의 입을 아니꼽게 쳐다보다가 이내 숨을 푹 내리쉬며 말을 잇는다. 정이 잘 가지 않는 아이다. 겉으로만 보아선 멀쩡한데…. 도륵, 베르틴과 마주치던 아리온의 눈이 불시에 옆으로 굴러간다. …저런 아이를.
하아, 숨을 다시 한 번 내리쉰 베르틴이 마른세수를 하듯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어쩔 수 없구나.

“황실에서 들어온 혼담이니 거절은 할 수 없겠지. 그것도 재상이 중개역이다.”
“…….”
“그러니 살람의 혼담이 성사되기 이전에…,”

아리온의 담담한 눈동자가 다시금 베르틴을 향한다.

“아리온, 네가 혼담을 치러야겠다.”

어쩔 수 없는 일일테다. 아리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나의 ‘폭스 가’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 아리온은 보다 정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매번 더듬어지던 아리온의 입술이 여느 때와 달리 말끔하게 맞부딪혀 제 의지를 표한다.


-01.나의 이복형제


“어딜 그리 다녀오십니까? 형님.”

베르틴의 집무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정처 없이 거닐던 중 살람을 만났다. 이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아리온은 건조한 입술을 뭉근하게 문질렀다. 살람의 시선이 그런 아리온의 입술 위를 스친다.

“…그러는 너는, 어딜 가는 중이었나.”
“이제 곧 정치학의 수업이 있어 그쪽으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가는 김에 형님의 얼굴을 보고 갈까 싶었는데, 이렇게 뵈는군요.”
“그런가. 나는 잠시 용무가 있어 아버님께 막 다녀온 참이다.”

어느 정도 표정을 추스른 아리온이 이내 입술을 문지르던 손을 내려 고개를 까딱였다. 살람의 눈이 그 몸짓을 따라 느릿하게 움직인다.

“―아버님께 말입니까.”

살람이 자세를 바로하며 빠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리온은 그런 살람의 미소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구나.”
“어찌 사람이 매일 기분 좋을 수 있겠습니까. 정치학의 시험날짜가 다가오는 터라 조금, 긴장 했나봅니다.”

살람은 자신의 볼을 살짝 쓸어내리며 한탄하듯 작게 숨을 내리 쉬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정치학의 시험은 난이도가 꽤 높다던가. 살람에게 있어선 기대치가 높은 베르틴이 부담스러울 법도 하다. 아리온은 청초히 눈을 내리깐 살람을 말없이 내려다보다, 옅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네 나이가 벌써 일곱 자를 넘겼던 가…. 이번에 치르게 될 시험을 통과한다면, 그 나이에 있어선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성과를 이룬 거다. 긴장하지 말고 평소대로 행하라.”
“네, 형님.”

고개를 숙인 살람의 위로 아리온이 두 눈을 빛낸다.

“훌륭하구나.”

자신과는 달리.
살람이 그런 아리온을 마주하며 곱게 눈을 접는다. 입 꼬리를 스르륵 올리고, 감사의 말을 전한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아리온은 작게 고개를 까딱이며 살람의 옆을 지난다. 참으로 똑똑한 아이다, 살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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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6-27 12:07 | 조회 : 2,498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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