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그녀가 밉지 않을까

이틸은 햇살을 받으며 눈을 떴다. 내가 목을 긋고도 살아남은 건가?

" 이틸, 그만 자고 일어나 "

분명 볼프레예의 목소리인데, 흐려진 초점이 상을 제대로 찾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틸의 앞에 앉아 있는 건 볼프레예였다.

" ...........귀신이야!!! "

본래 차분한 이틸이 조그만 두 손으로 입을 감싸고 소리를 내질렀다. 볼프레예는 이틸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 아니, 뭐래는 거야? 이틸 정신차려! "

볼프레예는 내 두볼을 가볍게 철썩 철썩 때리며 선홍색 빛깔이 도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가느란 금발, 오목 조목한 눈코입은 볼프레예가 확실했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상황인것일까. 방금까지 서로를 죽이려고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지 않았나. 갑자기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라니?

" 볼프레예님? "

" 미쳤나 이게, 님자는 죽어도 안붙이는게. 물론 오늘부로 그렇게 불러야 될수도 풋"

평소의 볼프레예의 분위기였고, 좀 더 친한 사이의 느낌이였다. 그리고 그녀는 방금까지 마주한 얼굴보다는 더 앳되보이는 얼굴이었다.

" 무슨 소리인지..? "

" 나, 황자 약혼자 후보 자리 따냈어!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나갈 수 있다구 "

" 어... 아, 아! 그렇군요, 아니 그렇구나 "

" 방금 막 전갈이 도착했는데, 벌써부터 집안 더러운 것들 눈빛이 바뀐거 같지 않아? 이젠 내게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을거야 "

볼프레예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함박 웃음으로 이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알던 볼프레예가 아니다. 그녀는 아녹이나 노엘 앞에선 그저 입꼬리만 올리며 인자하게 웃을 뿐이었는데.

그나저나 그녀의 말대로라면 황자의 약혼자 후보식이 올 겨울이었던가.

지금은 한참 꽃 피어날 봄이고, 약혼자를 제대로 뽑기까지 아직 많이 남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틸은 이 시기로부터 약 3년 정도 전에 아녹으로부터 거둬져 교육을 받고 있었을테고. 그녀가 약혼자로 뽑히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 탑에 몇 주간을 머물게 되는데 그 때 아녹을 만나게 된다.

시간이 되돌려 진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에 의해?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누구일까. 길거리에 버려져 배를 곪던 꾀죄죄한 아이라는 과거가 지금도 적용되는 것인가.

" 참 잘됐네. 너.. 혹시 기억 나? "

" 뭘 ? "

볼프레예는 자신이 어떻게 후보자 자리에 간택됐는지 어서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럼에도 이틸은 여의치 않고 다음 말을 꺼냈다.

" 내가 시장에서 빵이나 훔쳐먹을 때의 이야기 "

" 응 기억나지. 내 어머님이 너를 보고 눈빛이 아리다며 데려오셨잖아. 돌아가시고서 힘들었을 때 너가 있어서 다행이었어. 나 임신했을 때 하마터면 자살할 뻔도 했는데, 이틸이 눈에 불을 키고 말렸던 거....아직도 고마워 "

" 아... 맞아. 그랬었지. 그래서, 어떻게 후보자 자리를 따낸 거야? "

" 뭐, 뻔하지. 저번에 그 노친네 방에서 밤 보낼 때 아부했어. 내가 약혼자가 돼서 가문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뭐 그런 사탕발림? 미친 것. 그걸 믿더라. "

볼프레예는 잠시 입을 다물고 창문을 바라보더니 몇 분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저택 밖의 풍경이 비추었지만 더 멀리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눈을 끔벅 감고 다시 이틸을 보고 말을 이었다.

" 그래서, 앞으론 이 방 말고 다른 방으로 옮기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게 됐어. 특별하게 너는 나만의 시녀로만 붙여서. 나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 "

이후 볼프레예는 자신의 방을 이주하는 데에 있어,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던 시종들을 마음껏 부리며 새 방을 단장했다. 그리고 일주일간의 시간이 흘렀는데, 그녀는 많은 예절 교육들을 배웠으며 여전히 밤에 저택의 이곳 저곳에 불려나갔다. 불려나가지 않은 밤에는 이틸을 불러 수다를 떨었으며 항상 마지막엔 웃음을 쥐어짜며 이틸을 보냈다.

이틸은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손이 나가는 자신의 하녀일에 감탄했다. 아침이면 볼프레예의 방에 불러가 단장을 해주며 다른 소소한 일을 뒷받치며 하루를 같이 보냈다.

시간이 왜곡되어 그 통째로의 시간이 날라갔는데 그게 습관으로 베어있다니. 잠깐은 억울하긴 했지만 저택에 와서의 시간만이 조작된 것 뿐이었으니 별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제일 깊게 생각했던 것은 아녹이다. 아녹이 시간을 되돌리기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인가? 과연 그가 이러한 일을 만들어낸 것일까. 아니면 그 죽어가던 순간의 이틸이? 당연하게도, 시간 왜곡은 아무리 이틸이 아녹의 지혜를 농도 깊게 배웠다 할 지라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알 수 없는 의문은 계속해서 쌓여만 갔고 골똘히 생각하였기에, 그녀가 원래 좋아하지 않던 볼프레예의 수발을 들면서도 별 반감이 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 시점으로 시간이 돌려진 이상 예전만큼의 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안타깝다는 생각뿐이었을까.

" 이틸 무슨 생각하는데? "

" 아니, 아무것도. "

오늘은 후보자들 중 제일 지위가 높은 아스타냐 후작의 딸 아만드 영애가 주최하는 티파티였다. 그녀는 기가 드세기로 소문이 났으며 이번의 티파티 목적도 다른 후보자들의 기를 누르기 위해서가 아닐까 다들 추측했다.

오늘 같이 날 좋은 때에는 아녹을 졸라서 탑 밖의 경치 좋은 곳으로 피크닉을 가는 것인데. 어쩌다 이렇게 되버려선.. 볼프레예 수발을 들고 있을까. 그게 또 싫은 것도 아니라니, 이틸은 몇번이고 자신을 되뇌여 보았다.

몇 번이고 도망가버릴까 생각했지만 자신을 그렇게도 의지하는 볼프레예를 보니 또 마음이 여려지기도 했다. 아녹의 마음을 훔쳐가 그를 도구 삼으려던 여자인데, 어찌 지금은 밉지가 않은지.

볼프레예가 그녀에게 장난을 치기 위해 함박 미소를 지으며 손목의 레이스 안단에서 곤충 모형을 꺼내는 것도 참 신기했다. 이런 순수함이 있는 사람이었나.

" 아이고 깜짝이야. 심장이 저기 밖으로 떨어질 뻔 했네. 그건 뭐야? "

그녀의 장난에 대충 몇 마디 던져주면 알아서 까르르 자지러 넘어지는 모습을 보아하니 참 웃겼다. 이틸이 그 모습을 보고 풋 하고 웃으면 볼프레예는 그것을 보곤 더 웃음이 터진다.

이틸은 처음으로 친구라는 것이 생긴 듯한 느낌이었다. 비록 자신이 그렇게 싫어했던 그녀였더라도, 그녀는 사람 마음이 이렇게 쉽나 그저 턱을 괴고 볼프레예를 보며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후작가에 도착했다. 왠지 기운이 빠진 듯한 이틸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볼프레예를 모시듯 내렸다. 그 이후론 후보자들은 응접실에 올라가 파티를 시작했고 시녀들은 아랫층 부엌에서 마치 공작새들이 깃털을 뽐내듯 하며 서열을 정리하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틸은 그들의 가식에 토가 미어나올 듯해 밖으로 피신을 했다. 그녀는 보이지 않을만한 나무에 올라가 응접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안의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볼프레예도 나름 잘 어울리고 있는 듯 싶었다.

" 거기서 뭐 하는 건지?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틸은 당혹해하며 곧바로 아래를 내려봤고 잘 아는 낯짝인 노엘이 자신을 올려다 보고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시간이 돌려지기 이전, 탑을 빈번하게 들렸으며 항상 여유로운 태도로 이틸을 약올렸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 몇 년 뒤에는 약혼자까지 데려와 아녹을 홀렸으니, 그가 좋을리가.

" 흐음.. 시녀가 저택 밖에서 이러고 있는 꼴을 보면 그 주인도 썩 좋지는 않을 것 같은데 "

'...여전히 주둥이는 살아있네 '

" 황자가 시녀의 치맛속을 훔쳐보는 것을 알면 후보자들도 썩 좋지는 않겠군요 "

그는 황자인것을 들켜 꽤나 놀란 눈치였다. 그녀는 말을 받아치고 사뿐히 내려오려고 했다. 의도치 않게 중심을 놓쳐 떨어지기 전까진 완벽했는데. 나뭇가지를 엉켜잡고 버티려다 되려 이상한 모양이 되어서는 엉망진창으로 떨어져버렸다.

이제 엉덩이가 미친듯이 아프겠구나. 생각을 하고 눈을 뜬 이틸은 노엘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는 떨어지는 이틸을 잡는 도중 머리가 엉망이 되었다. 머릿결엔 나뭇잎이 섞여있었지만 모르는 듯 피식 웃으며 이틸을 바라봤다.

"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모쪼록 갚도록 하겠으니, 이만 놓아주시겠습니까? "

" 꽤나 당당한 시녀군? '후작이 아끼는 나무를 어떤 시녀가 기어 올라타서 응접실을 훔쳐보고 있었다' 고만 알려도 질책을 받을 사항이 아닐까 생각이 되는데 황자인 것을 알면서도 말대답을 하고- 나에게 안기고. "

아, 시녀로써의 행동으론 부적절했다. 그건 인정했다. 하지만 노엘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 짜증이 난다. 탑에선 신분의 경계가 없었는데, 그래서 노엘과 말싸움을 비등하게 잘 할 수 있었던 건가. 지금은 그도 그때의 날 모르겠지만 이틸 자신은 기억했기에 편하게 말을 받아쳐버렸다.

" 그러지 않으실 것 알고 있습니다. 황자님께서는 듣기로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품성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

이틸은 눈을 휘며 웃고는 아부를 했다. 그리곤 그의 머릿결 사이에서 볼쌍스럽게 박힌 나뭇잎을 빼내며 노엘에게 눈을 마주치며 갸웃했다. 탑에 있을 때로 따지면 이건 그녀의 입장에서 자신을 내려달라는 신호였다.

" 황자의 몸에 함부로 손도 대고- 흐음, 이건 너무 대담해서 벌을 줘야겠는데 "

밖에서의 노엘은 이렇게 신분을 따졌던가. 이틸은 아무래도 입장을 달리해야겠다 생각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이틸은 처음보는 시녀였으니. 노엘은 그녀를 가볍게 내려주었다.

" 그러니 그대를 알아야겠네, 이름이 뭐지? "

" 안젤라입니다. 이 무례는 자비롭게 처리해주셨으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

그녀는 혹여나 볼프레예에게 불똥이 튈까, 서둘러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머리를 조아렸다. 탑에서 살았던 그녀에게 굳건한 자존심에는 금이 갔지만, 어린 시절엔 무릎이 문제인가? 무엇을 팔더라도 사기만 안당하면 다행인 바닥에서 자랐다. 이틸은 막상 무릎을 꿇고나니 그 상대가 노엘이라는 것에 헛웃음이 났다.

" 빨리 일어나, 옷 더러워지니까 "

" 예? "

" 귀 먹었나? "

그는 이틸을 보며 애써 짜증을 감추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일으켰다. 보통시에도 이렇게 친절한지는 의문이었지만, 노엘은 그녀의 망가진 손을 보며 손수건으로 감쌌다. 탑에선 하지도 않던 짓거리에 그녀는 저항도 않고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노엘의 모습에 마음이 놓아질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머리를 싸메고 현 상황을 연구했는데, 지금은 마치 탑에 있었던 이틸이 된 느낌이다.

" 감사합니다 "

그녀는 고개를 짧게 도리질하고는 감사를 전했다.

" 나중에 꼭 직접 돌려주도록 해. 그러면 내가 그대의 주인을 눈여겨 볼 희망이라도 있지 않겠어? "

" 아.. 예 참 그러시겠습니다 "

노엘이 빛을 받아 더욱 영롱하게 비추는 적색 혜안을 반쯤 가리며 웃는다. 그의 차분한 은발에는 혜안을 받춰주는 효과라도 있는 듯 잘 어울려, 참 아름답다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탑에서 처음 봤을 때는 어두운 분위기에 어른스럽게 뻗은 콧대를 하고, 쌍커풀이 길게 패인 아이홀에 적안을 이루었기에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노엘도 그렇고 볼프레예도 그렇고 사람은 모쪼록 밝게 웃을 때 보아야 하는 것인가..

이틸은 자신의 관리가 잘 되지 않은 보라색 머리칼을 번갈아보며 조금은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노엘에게 그가 왜 손수건을 줬는지 물어볼 새도 없이 서둘러 아랫층으로 들어갔으며 티파티가 끝나고 볼프레예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다. 밤이 찾아올때까진 볼프레예가 처음으로 황자를 봤다며 조잘거리는 것을 들었고, 그녀가 떠나간 후 이틸은 노엘이 묶어줬던 손수건을 밖으로 던져버렸다.

어차피 볼프레예는 그의 약혼자가 될 운명일 것이고- 그것에 이 손수건은 딱히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노엘도 이틸의 존재는 금방이고 까먹을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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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5-06 02:03 | 조회 : 942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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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잠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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