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고백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팠다. 이틸은 어렵게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요 몇일간을 후보자들끼리의 친목을 다진다는 명목으로 볼프레예를 따라 돌아다녔더니 몸살 감기가 심하게 걸린 모양이었다. 두통에 근육통이 겹쳤지만 미열에 그쳤기에 그녀는 볼프레예를 수발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이럴 것이라면 치유 관련 마법을 많이 익혀둘 것을, 후회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봤자 지금 쓸 수 있는 마법도 없다. 이 저택에서 볼프레예를 따라다니며 어디에 쓰겠는가? 더군다나 그녀는 이틸이 마법 사용자라는 것 또한 모를 터고, 저택 안에서도 알려지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었다.

큰 거울 앞에 앉아있는 볼프레예는 어느새 기품이 갖춰지고 있었다. 조금씩 천진난만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틸이 죽기 전에 알고 있던 볼프레예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후보자가 뽑히고 만남을 갖기 시작한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았지만, 시녀들 사이에서 볼프레예의 소문은 무수했다. 금발의 웃음의 천사라느니, 자비로운 여신이라느니... 사교계에 등장한 적도 없는 갑자기 나타난 아름다운 한 영애이니, 그녀의 작은 행동에 많은 의미가 부여됐다. 자비로운 여신이라는 네임은 첫번 째 아만드 영애의 주도하에 있는 티파티에서 부여된 별명이었다.

그녀는 성질이 좋지 않다는 악명을 따라, 처음 보는 볼프레예를 시험하려 시녀에게 찻잔을 -실수로-상체부터 들이붓게끔 했다. 그때가 노엘이 나와 이야기를 마치고 들어갔을 때였고, 노엘은 장면을 목격하곤 그 잘못을 아만다에게 물었다고 한다.

경미한 화상을 입었음에도 볼프레예가 그 상황을 무마시켰고, 몇 일뒤 그 시녀는 쫒겨났다고 한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그 시녀를 볼프레예 쪽에서 비밀리에 다시금 고용했다. 뭐 말로만 비밀리에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소문은 이쪽에서 퍼트렸으니깐. 덕분에 좋은 소문을 얻고 노엘의 관심까지 받았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물론 좋지 않은 것은, 무려 아스타냐 후작의 딸인 아만다 영애의 눈 밖에 아주 멀-리 나버렸다는 것이었다. 다음 티파티에서, 아만다 영애와 많은 친분이 있는 영애들에게선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설령 받았다고 했을지언정, 그녀는 앞자리에서 수모를 당하거나 맨 끝자리에 앉게 됐다.

오늘은 예외적으로 좋은 분위기였는 듯, 볼프레예가 웃으면서 마차에 탄다.

" 이틀 뒤 황궁 무도회에서 황자가 에스코트를 신청했어. 자기 때문에 이런 꼴 당하는 거 알고는 기라도 좀 살려주려는 건지 "

" 아만다는 오늘도 난리 쳤고? "

" 뭐, 아시다시피. 그 년 그거 언제까지 참아야 하지? "

" 아만다... 무도회에서 골탕 좀 먹여줄까? "

" 헉, 어떻게? "

" 일단 아만다한테 관심 쏠리게끔 해봐 "

아- 작당 모의 하는데 머리가 아프다. 이틸은 머리에 손등을 대곤 창문 밖으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마차에서도 저 멀리 탑이 보였다.

- 내가 다시 아녹을 만날 수 있을까?

멀어지는 탑처럼 그녀의 존재조차 그 탑에서 지워졌겠지.

" 응. 아, 그거 알아? 이번 황궁 무도회에 탑주도 참석한다는데 "

" ....탑주? "

정말 아녹을 말하는 것일까? 이런 행사는 대부분 참여하지 않는 아녹이. 어째서 별 의미없는 여름을 축복하는 황궁 무도회에?

아마 이 쯔음에 아녹은 연구한다고 바빠서 더욱이 코빼기도 못비출텐데. 아녹이 볼프레예와 이어지는 것이 한 단계 더 빨라지는 것일까. 썩 기분 좋은 생각은 아니다.

" 탑주- 말이야, 아주 상상도 못할 사람이야. 자기 심기를 거스르면 아무리 지위 높은 사람일지라고 해도 잔인하게 죽여버린다고. 절대 가까이 해선 안 돼...라고 소문이 자자하더라 "

" 음- 소문? 대단하네. 그 정도면 권력이 어느정도란 거야? "

" 권력이 중요한게 아니라니깐? 잘못 띄면 죽게 생겼는데 그게 중요해? "

자꾸 입에서 아녹의 흉이 나온다. 어째서인지 볼프레예에게 늘어놓는 아녹의 험담은 썩 가치를 가진 것 같지는 않다.

" 중요해. 오히려 그렇게 쓸어버려도 건재한 사람이. "

-아.

이제 그녀의 눈치를 알겠다. 세상에서 원하는 것 없이 원한으로 똘똘 뭉친 그녀가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이유가 현재 돌아가고 있는 저택이니. 아무래도 볼프레예의 맑게 반짝이는 눈을 보니 험담을 잘못 늘어놓은 듯 싶다. 이래서야, 역시 아녹과 볼프레예는 운명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건지. 그렇다면 내가 저택을 몰살시킬 수 있다고 한다면? 그녀가 탑주에 가지는 관심은 줄어들까. 그리고 볼프레예가 좀 더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

그렇게 이틀이 흘렀다. 황궁 무도회는 소위 초대자들만 참석하는 격식을 따지는 자리였기에 이틸은 자연스레 시종, 시녀들의 다과회로 물러났다. 이렇게 되버리면 아만다를 엿먹일 방법이 줄어드는데. 그녀는 골똘히 생각하며 식탁의 제일 첫번째 자리에서 떠드는 아만다의 시녀를 지켜봤다. 아무리 이틸이 별 생각 없었다지만, 현 대결 구도인 볼프레예vs아만다. 그런 볼프레예의 직속 시녀인 그녀가 그 시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만으로 살벌한 분위기였다. 이틸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한 시종은 분위기를 못 이기겠는지 큼큼- 기침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 볼프레예 양? "

시녀들의 이름을 그 주인으로 부르는 것을 즐기는 아만다의 시녀. 그녀는 이틸에게 질문을 걸어왔다.

" 예, 말하시죠 "

" 제가 이 리본을 엊그제 샀거든요. 처음엔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 꾀죄죄한게 더러울 것 같기도 했지만...그래도 리본이니 대우를 해서 묶었는데 지금 막 출처를 알아보니 역시 더러운 것 아니었겠어요? 걱정 말아요. 그래서 이건 제가 짓밟아 줄거거든요, 헤헤 "

저 년의 이름이 엘틴이라고 하던가. 갑자기 리본 얘기를 꺼낸다 싶을 때 아차- 했다.
혹시 볼프레예의 집안 사정을 알고 있어서 빗대어 하는 이야기인가? 확실히 볼프 집안의 자제들이라면 입을 놀리고도 남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설마, 그저 찔러보는 것이겠지.

이틸이 완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지만 볼프레예 그녀의 목적을 위해 방치해 둔 일이다. 그것을 끄집어내 말한 것이라면, 이틸은 제 앞의 시녀를 절대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이틸은 아픈 머리에 눈을 꾹 감으며 다시 떴다. 그녀의 눈에선 열불이 활활 타올랐다. 때마침 이틸이 입을 열려고 할때 자리를 떴던 시종이 들어와 앉는다.

" 아만다 양, 그렇게 출처도 모르고 머저리같이 아무거나 주워 입는 성격인줄은 몰랐군요. 당신같은 사람에겐 그 어여쁜 리본이 더 아까운 것 같습니다. 저라면 차라리 멍청함을 상대에게 과시하기보단 개처럼 입을 여물고 있을텐데요. 사람의 가죽을 썼으니 개만도 못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참...안타깝네요 "

시종이 말을 한 것이었다. 분명 흘려가듯 여유있이 말했지만 힘을 줘, 머저리,멍청함, 개에 크게 강조한 억양이다. 이틸은 갸웃하며 시종을 돌아봤다. 방금 그 분위기에 눌려 나간 시종이 맞는가? 시종이 이틸을 마주했고 둘은 눈이 딱 마주쳤다. 이틸은 즉시 알 수 있었다. 시종의 얼굴을 하고있는데, 알맹이는 시종이 아니다. 아녹- 그의 기운이었다.

' 따라 나올래? '

그가 이틸의 머리에 음성 정보를 쑤셔넣었다. 이틸은 뭐에 홀린 듯 그 시종의 뒤를 졸졸 따라 나간다. 둘이 자리를 비우니 그곳엔 테러같은 언행을 받은 아만다의 씩씩거림만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사람이 한적한 정원으로 나갔다. 높게 잘 관리한 식물들은 그들을 가려주는 데 큰 일조를 하고 있었다. 그는 변신을 풀고는 아녹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볼프레예와 비슷하지만 좀 더 차분한 톤의 화사한 금발에 날선 이목구비, 확실한 아녹이었다.

" 말해. 볼프레예에 대해서 "

아 이것 때문이였나. 혹시나 해서 따라나온 이틸의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

" 그녀가 무엇때문에 그렇게 욕망적이었는지 내게 설명해 "

이틸이 아무말도 않자, 그는 자신의 말을 풀어서 이해시킨다. 그녀는 자신을 알고 있었던 아녹이 안부 인사도 안하고 볼프부터 찾는 것에 매우 화가 난다. 자신도 결국 볼프레예를 위한 도구였나. 아녹이 시간을 돌릴 수 있었다면, 그는 볼프레예를 살리고 무언가 볼프레예에게서 꼬인 것을 해결하려고 했겠지. 그리고 그것에 나를 붙인 것이고?

" 아녹, 당신은...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요? "

이틸은 평소보다 조금만, 딱 조금만 솔직해보자 한다.

" 이틸로스, 제발.. 말"

그녀는 아녹의 말을 가로막았다.

" 나를 지켜주고 길러줬잖아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 아끼는 그 볼프레예의 목을 조른 것도 후회했고, 당신에게 진작 내 마음을 말하지 못했던 것도 후회했어요. 난 많은 것 바라지 않는데, 나 보고 싶지 않았어요? "

" 그저 시장에서 본 너가 불쌍해서, 가능성 있어보여서 거둔 것이지. 난 거기서 더 이상 감정이 없어. 미안하다. 너가 그녀에게 그런 해코지를 할 걸 알았다면 난 널 데려오지도 않았을거야. 그게 너가 날 좋아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볼프레예를 평생 볼 수 없었다면 난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야 했을 거다. "

날 거부할 거니깐, 말하지 않았는데. 귀로 직접 들으니 마치 칼로 심장을 도리는 것만 같다. 차라리 볼프레예에게 찔릴 때가 더 아프지 않았던 것 같아. 이 순간에도 아녹의 볼을 쓸어내리고 싶고 그에게 안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이틸은 자신이 참 바보같았다.

이틸의 눈은 똑바로 뜨여있다. 시야가 흐려 보고싶던 아녹의 모습이 흐려졌지만, 이틸은 지금이 마지막일수도 있으니깐- 생각하며 그를 똑바로 보려 노력했다. 자신을 탓하고 확연히 미워하는 아녹에, 갑자기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졌다.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왔다.

" 그래요. 내가 볼프를 죽였어. 내가... 내가 잘못을 했죠. 미안해요 아녹 "

절대 그녀가 자신을 먼저 찌르려고 했다는 건, 말할 수 없었다. 그래봤자 아녹한테는 변명으로 볼프레예를 격추시키고 문제를 빠져나가는 비겁자가 될 것이니깐.

" 적어도 미안하다면, 아까 내 질문에 대답을 해 줘 "

" 아뇨? 못 해줘요. 그래요 막말로 나, 당신 사랑하는데-그래서 걔 목을 졸랐는데. 내가 왜 당신 좋을 짓을 해요? 옆에서 볼프레예를 평생 저주할거야 "

그녀를 저주할 생각은 없다. 그저 아녹을 비참하게 하고 싶어.
아녹의 망연자실한 표정에, 더 이상 추해지기 싫은 이틸은 눈물을 손등으로 쓸고 잘있어요- 를 억지로 내뱉었다.

그녀는 엉망진창으로 정원을 내달렸다. 더 이상 아녹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거리로 도망치듯 달려서 제 심장을 부여잡았다.

- 미친년 왜 나한테 칼을 쑤셔서는!!!!!

조금이나마 친구라고 생각했던 볼프레예가 미칠만큼 미웠다. 왜 탑에 왔어. 왜.
그녀는 아녹이 보이지 않는 거리였지만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혹여나 더 천천히 갔으면 아녹이 나를 붙잡아 주지 않았을까 후회도 했다. 흘러나오는 눈물에, 이마의 열이 자꾸만 높아갔다. 그녀가 벤치에 쓰러지려 할때 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 이틸로스- "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눈물에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제발 날 위로해줘요. 그녀는 누군지 모를 그를 끌어안고 소리를 내 울었다. 머리속이 새하얗게 변색되는 것도 모르고는 목 놓아 엉엉, 속으로 서글프게 그를 불렀다.

- 아녹 내 하나 뿐인 구세주

- 아녹 내 하나 뿐인 짝사랑

-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그대

" 흑... 흐윽, 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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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5-09 01:58 | 조회 : 233 목록
작가의 말
승잠또

짝사랑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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