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그를 사랑하지 않잖아


" 볼프레예, 이제 사랑 놀음은 그쯤하고 약혼자 자리의 역할을 다 하지 그래? "

늦은 밤, 탑의 창문 맡에서 노엘과 볼프레예의 말소리가 들린다. 이틸은 탑에 늦은 귀가를 하던 도중 그들의 대화에 이끌려 벽에 기대어 엿듣고 있었다.

" 알고 계셨군요. "

" 대단해. 탑에 와서 탑주와 바람이라... 이게 당신이 원하는 마지막 권력인가? "

" 권력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전 그저 안락하게 살고 싶을 뿐이지요 "

" 뭐, 나도 덕분에 고맙게 됐어. 당신이 아녹을 이용해서 당신 가문을 박살내고 다 찢어버릴 건 눈앞에 훤하지만 "

" ......황자님의 혜안은 참 대단하십니다. 그럼 그 대단한 능력으로 제가 당신과 아녹을 둘 다 싫어하는 것도 알겠군요? "

노엘의 혜안, 들어본 적 있다. 황가의 핏줄에 이어지는 고유한 능력이라고 하던가.
이틸은 볼프레예의 앙칼진 목소리에 멍하던 정신을 환기했다.
항상 천사표를 보여주던 볼프레예가 내던 목소리는 아니었는데.
그녀는 확실히 화가 나있었다. 노엘이 말했던 것을 보니, 가문을 박살내고 싶은게 그녀의 숨겨진 욕망이었던 것이구나. 몰래 듣고 있는 이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 어디서 감히 아녹을 이용하려고 '

" 흐음, 화가 단단히 나셨군. 첩의 딸인 당신이 이복형제로부터 모진 일을 계속 당해온 것을 보면 참 눈물이 앞을 가려. 뭐... 더한 것도 있지. 어디 그것 뿐이겠는가. 그래 그 정도면 가문을 휩쓸어버릴 원망이긴 해 볼프레예? "

노엘이 제 잘난 듯 입을 조잘거리니 볼프레예의 숨소리가 씨익 씨익 가빠졌다.

" 닥쳐. 어디서 입을 놀려. 그 잘난 혜안이기에 당신의 이용가치가 떨어진 거지.
아녹 선비 나부랭이를 이용하면 돼. 그딴 더러운 가문? 당신 없이도 충분히 가능해. 넌 그저 아녹을 만나기 위한 발판이었어. 버러지 같은게... "

" 풋, 발판 삼았으면 고마워하는게 좋은 것 아닌가? 불쌍한 볼프레예. 모쪼록 그 복수는 성공하도록 빌게 "

볼프레예가 생전 해본 적도 없을 것만 같은 말을 내뱉는다. 대화를 끝으로 발자국 소리가 났다. 아마도 노엘이 자리를 뜨려는 듯 했다. 이틸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숨을 끝까지 참고 은신 마법을 걸었다. 노엘은 텅 빈 복도를 터벅 터벅 걸어나갔고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 이틸은 은신을 풀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이틸은 자신을 길러준 아녹을 좋아했다. 아무리 볼프레예가 굴러 들어온 돌 같았다지만 아녹이 그녀를 좋아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지켜보며 눈만 내리 깔았었다.

그런데, 아녹을 우습게 보고 이용하려고 했다니. 이틸은 어찌 해야 하나 이마에 손을 얹고는 벽에 기댔다. 마음만 같아선 아녹에게 고자질하고 볼프레예를 때어놓고만 싶은데. 그러나 아녹에겐 사실을 고하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겠지. 그녀가 고민할 때 볼프레예도 방을 들어가려는 듯 또각 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틸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 볼프레예 님. "

" .....................!! "

볼프레예가 창백한 안색이 되어서 이틸을 마주봤다. 그래 놀라겠지. 자신의 치부를 노엘뿐만 아닌 나에게도 들켰으니.

" 이틸로스?.... 다 들었군요. "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참 아름다웠다. 창문 아래에 빛을 받고 환하게 반짝이는 금발도 창백하게 질린 피부색도 결점 없이 예쁜 그녀다. 이틸은 그녀가 같은 금발인 아녹과 참 잘어울린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다.

" 네. 저, 당신께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

" 뭐죠? "

" 아녹을 사랑하십니까? "

그녀는 이틸의 질문에 대답이 없었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을까. 볼프레예가 이틸에게 갑자기 득달같이 달려든다. 볼프레예의 손에는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 이틸로스, 죽으세요. 제발 "

푹-

이틸의 복부는 순식간에 단도에 찔렸고 아랫배에서 찌릇한 아픔이 전해진다. 이틸은 볼프레예가 힘을 주려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의 손목을 꽉 쥐고 한손으로 볼프레예의 목을 조르는 마법을 시전했다.

둘 다 필사적이었다. 이틸의 복부는 단도가 진입해 한 손으로 막는다해도 자꾸만 살결을 찔러 들어왔고, 볼프레예의 목은 무언가의 끈에 졸린 듯 조여드는 것이 보였다. 이틸은 손끝에 힘을 줬고 볼프레예의 목이 더욱 조여들어갔다.

이틸은 볼프레예의 앞을 막아선 것을 굉장히 후회했다. 단지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는데, 그녀를 방해할 생각은 거의 없었는데.

이틸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색되려할 때, 볼프레예가 컥- 소리를 내며 이틸에게 기대듯 무너졌다. 손에 주던 힘도 풀리고 아랫배에 묵직히 박힌 단도만이 있었다.

" ......................아.........., ... "

" ......... "

이게 무슨 상황이던가. 이틸은 볼프레예를 목 졸라 죽여버린 살인범이 된 것이었다. 비록 자신은 단도에 찔렸다 해도, 아녹에게는 그렇게 인식되겠지. 자신이 사랑했던 아름다운 볼프레예를 잔혹하게 죽인 이틸로스. 아녹은 그러하겠지.

아프다. 배도, 머리도. 이틸이 어깨를 슬쩍 내리자 볼프레예는 어느 힘 하나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틸은 단도를 빼어내고 바로 치유 마법을 시작했다.

젠장. 젠장. 젠장.

" 볼프레예.. 이틸? "

제발. 아닐거야.

" 볼프레예가 왜 누워있어? "

하필 아녹이었다. 왜 지금, 이렇게....

" 내 배에 흥건한 피는 안보여요? "

말을 끝낸 즉시, 이틸은 단도를 쥐어잡고 목을 그었다.

여기서 더 나아질 건 없다.

이게 최선일 거야. 볼프레예의 수치를 들춰내지도 않았으니. 비록 아녹에겐 내가 나쁜 사람이겠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나. 그녀는 볼프레예 옆에 쓰러져 숨이 멎어가며 생각했다.

'' 넌, 그를 사랑하지 않는데 왜 마지막까지 나보다 나은거야 ''

아녹이 빠르게 달려와 볼프레예의 머리를 감싸 안고 이틸의 기억은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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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5-05 03:16 | 조회 : 288 목록
작가의 말
승잠또

이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 본격 주인공 1화에 죽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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