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온통 회색

태형아,
사실 그 날에 대해서는 쓰고싶지 않았어.

왜냐하면 나에게 너무나 고통스럽고 처절한 순간이었거든.

너는 어느 때와 다름없이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
그리고 나는 거실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지.

내가 바이올린을 켠지 10분이 채 안 지났을까?
너는 다급하게 나를 불렀어.
나는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싶어 네가 있는 화실로 달려갔지.

너는 나를 바라보더니 나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어.
그리고 너는 손을 뻗어 나의 검정 머리칼을 쓰다듬었지.

‘아니, 정국아. 너 흑발이구나.’

이 말을 들은 나는 심장이 너무나도 빨리 뛰었어.

태형아, 대체 네가 왜 몇 년간 봐 왔던 나의 머리칼 색을 기억 못 하는 거야?
오늘 아침에도 햇살이 비추는 창문 앞에서 서로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달콤한 입맞춤을 나눴는데.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는데 나에게 머리칼 색을 물은 너의 말투는 너무나 다정하고 단조로워서, 아무렇지도 않은, 흔한 질문을 던진 것처럼 태연해서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어.

나는 그때 네가 나에게 무엇인가를 숨긴다고 생각했어.
네가 절대 나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무언가.
그래서 난 모르는 척 넘어가려고 했어.

‘지금 그거 물어보려고 부른 거야?’
라는 말과 함께, 천연덕스럽게.

너는 나에게 내 그림을 그리는데 머리칼 색깔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어.

거기서 내가 뭐라고 반응해야 했을까?

멍청한 나는
‘금발 도련님, 다 완성하면 부르세요.’
라고 말할 뿐이었지.

너는 내가 널 ‘도련님’이라고 지칭한 것에 대해 발끈했지만 나는 선선하게 웃어 보이며 마저 그림을 그리라고 했어.

화실에 나온 나는 그 문 앞에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지.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왔지.


그래, 차라리 잘 된 거야.
이게 하늘이 주신 기회일지도 몰라.
하늘이 나의 소원을 들어줬구나.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
정말 잔인한 사람이야,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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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5-07 08:26 | 조회 : 996 목록
작가의 말
솔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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