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어쩌면 늦은 깨달음

제주도로 떠나온지 3일째. 율은 자기 감정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다시 깨달아 볼 수 있었다.

추운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어여쁘게 핀 작은 꽃들을 보때도, 처음 보는 푸른빛 바다와 하얀 모래사장을 볼때도, 할머니의 따뜻한 민박집에서 할머니가 차려주신 정성스런 집밥을 먹을 때도.

도희가 보고싶었고, 도희와 함께하고 싶었다.

민박집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눠보기도 했다. 민박집에서 하루를 보내는데, 율의 표정이 좋지 않자 할머니가 먼저 율에게 무슨 일이 있냐며 다가와 주신 것이다.

남에게 자신의 얘기를 하는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율은 조금 고민했지만, 결국 할머니께 자신의 고민을 털어놨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나보다 훨씬 멋지고 좋은 사람이며, 자신의 유일한 삶의 의미인 사람이라고.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고, 처음에는 사랑하는 걸로, 곁에 있는 걸로 만족하려 했지만 그 사람도 자신을 사랑했음 좋겠다는 욕심이 났다고.

"욕심을 부리면 안되는데, 자꾸 욕심이 나요..."

결국 터져버리는 눈물에 율이 고개를 푹 숙였다. 욕심이 나는 그 감정이 싫었다. 왜 그렇게 본능적으로만 생각하게 되는지 모르겠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바닥에 떨어진다. 욕심도 이렇게 몸에서 떨어져 버리면 좋을텐데.

"아가. 속상해 하지 말어. 욕심이라니. 누가 그리 말하든? 사랑하는 이가 나를 사랑했음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건, 절대로 욕심이 아니에요."

모두가 그런단다. 모두가 가지는 감정이야. 자연스러운 거지요.
할머닌 주름진 손으로 율의 눈물을 손수 닦아줬다. 어린아이 달래는 듯한 부르러운 말투와 손길이였다.

"...도희도. 절 좋아하면 좋을텐데. 사랑하면 좋을텐데. 도희는 저에게 잘해줘요. 하지만 저더러 자신이 절 사랑하는 걸 바라지 말래요."

"그래, 도희라는 아가가 그러더냐. 잘해준다라, 율아, 도희는 널 싫어하는게 아닐게야. 그냥, 사랑이라는 감정이 익숙하지 않을게다."

어쩌면 율이 널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는 걸 수도 있어. 사람은 아무에게나 잘해주지 않거든. 도희가 율이 네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도 잘해준다는 것은, 도희도 너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걸 수도 있단다.

기울어져가는 해가 붉게 빛나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할머니는 율에게 그리 말씀하셨다. 사랑이란 감정은, 저도 모르게 생기는 감정이라고. 사랑과 사람의 생은 얽히고 얽힌 관계이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고.

"나도, 옛날 처녀때 도희라는 아가처럼 행동했었지. 그러다 뒤늦게 사랑을 깨닫고 깉이 후회했단다."

저녁 노을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은 맑게 그렁거렸다.

*

5일째 되는 아침. 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케리어를 챙겼다.

할머니와의 대화, 그리고 스스로 깨달은 감정들. 마음속은 이미 잘 정리되었다. 이제 남은 생각은, 그저 빨리 도희를 보고싶다는 생각 뿐이였다.

아침을 먹고 가라는 할머니의 말씀에 율은 할머니와 식사를 했다. 제주도로 온 이후, 지금의 율의 표정이 가장 밝고 빛났다.

"고민이 정리된 듯 하구나. 잘 된 일이야. 어서 먹고 어서 들어가거라. 앞으론 가슴앓이 하지 말구."

푸근하게 웃어보이는 할머니의 미소가 그리워질 것 같았다.

"다음에 또 와도 되요?"

"그럼, 언제든 환영이란다."

만박비를 지불하고 불러둔 택시를 탄 율은, 택시 안에서도 몇번이나 민박집을 돌아봤다. 소중한 경험을 한 것 같았다. 나중에 도희랑 꼭 와보리라, 다짐했다.

공항에 도착해 남아있는 표를 찾아 구했다. 남아있는 것은 저녁 비행기 뿐이였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도희가 율을 사랑해도, 사랑하지 않아도 율이 도희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변함 없었기에, 율은 도희 곁에 있는것 만으로도 만족하고 싶었다. 욕심이라 생각한 감정을 자연스러게 생각하니, 욕심은 눈 녹듯 사라졌다.

이제, 도희에게 돌아갈 시간이다.

*

5일 째가 되는 날. 도희는 결국 전공 강의까지 빠져버렸다. 처음으로 하는 결강이였다.

4일째였던 어제, 도희는 처음으로 후배에게 짜증을 냈다. 달라붙으며 애교를 부리는 후배에게,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짜증나니까 꺼지라고 으르렁 대자, 후배는 물론 주위 사람들 까지도 놀랐다.

항상 미소짓고 거절도 부드럽게 하던 도희였기에, 신경이 곤두선 그의 모습은 대단히 이질감있고 충격적이였던 것이다.

평생 중요히 여겼던 인간관계도, 대학 성적도, 세상 그 어느 것도.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도희에게 율보다 중요한건 없는 듯 했다.

5일 째 되는 날 도희는 그저 집에 틀어박혀 울기만 했다.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아, 맨 정신으론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한병 두병 끝없이 들이킨 술이 이미 열 병이 넘어갔다.

술기운에 몽롱한 정신 속에도, 생각나는 것 오로지 율이였다. 금방이라도 슬픔에 절어있는 자신을 부드럽게 안아줄 율이 나타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불도 키지 않은 캄캄한 집에는, 도희 혼자 뿐이였다.

방바닥에는 빈 술병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재떨이에는 꽁지만 남은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

생활이 불가능했다. 집은 드문드문 율의 흔적이 남아있는 감옥이였다. 율의 옷가지, 귀걸이, 붕대, 칫솔, 머그컵, 신발. 율이 남겨두고 간 모든 흔적을 볼 때 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심지어 침대에도, 율의 체취가 남아있었다. 율이 자주 쓰던 베개에는 율의 향이 깊게 베어있었다.

침대에 누우면 율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도희를 감쌌고, 매일 밤 울었던 나머지 이젠 눈물도 다 말랐나보다. 마음 속으론 울고 있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거실로 나와보니 창가가 눈에 들어왔다.

율이 종종 걸터 앉아있던 그 창가였다. 집으로 들어오면 율은 창가에 기대어 앉아있다 도희야, 하고 집에 온 저를 방긋이 웃어줬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없다. 그가 없는 창가는 밖의 번화가로 부터 나오는 불빛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있었다.

도희는 조용히 겉옷을 입었다.

구석구석 율의 흔적을 품은 집을 나서고 싶었다. 숨이 막혔다. 차가운 공기를 쐬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밖으로 나가 목적 없이 그저 다리를 움직였다. 율이 떠나버린 후 3일이 되는 날 부터, 도희는 아무것도 입에 대기 힘들었다. 음식을 입에 넣기고, 씹기도, 삼키기도 힘들었다. 그저 술만 들이킬 뿐이였다.

맨 속에 술만 먹으니 뒤늦게 속이 울렁거린다.

비척거리며 걷다 결국 거리 가로등 아래어서 벽을 짚고 속을 게워낸다.

"우욱-"

숨이 막혀 켁켁거리며 술을 토해낸다. 3일 동안 먹은건 술밖에 없어 그저 말간 액체만이 나왔다. 왠만큼 속이 비워지자 숨을 가다듬었다.

역류한 위액으로 인한 쓰라림과 춥게 불어오는 겨울 바람에 점점 술에 잠겼던 정신이 돌아온다.

"하아..."

추위 속에서 숨을 쉬자 허연 입김이 나온다. 술이 깨자 주변 온도가 꽤나 낮은걸 뒤늦게 인지한 몸이 추위에 떨린다.

"왜 춥고 난리야."

얼어죽어도 모자랄 판에.

손가락이 얼어 감각이 없어질 때 쯤, 도희는 그제서야 비척이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돌아가야지, 집으로. 그 감옥같은 곳으로. 스스로를 끔직한 곳에 가두려하는 이유는, 벌이였다. 자신은 벌을 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이였다.

한걸음, 두걸음. 얼어서 감각이 없는 다리를 움직여 집으로 향한다.

"...?"

그런데, 집 바로 앞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집의 불이 켜져있었다. 도희의 방 쪽이였다.

"...내가 불을 켜두고 나갔었나."

아니, 오늘 불을 킨 적도 없는데.

"..."

혹시.

혹시라도.

"율아...?"

집에 불이 켜져있는 걸 바라보던 색기없던 눈이 커진다.

가망이 없다. 율은 이미 떠났어. 돌아오지 않을거야.

그리 생각 하면서도 실오가리 같은 희망 하날 도희를 두 손으로 움켜 잡았다.

혹시 몰라.

집으로 향하는 다리가 빨라진다. 죽은듯 미약하게만 뛰던 심장이 큰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한다. 빨리 움직이던 다리는 뛰기 시작했고, 현관 문 앞에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이 떨려왔다.

현관을 열자 눈에 보이는 가지런한 신발 한 쌍. 율의 신발이였다.

아무렇게나 신발을 벗어 던진 채로 불이 켜져있는 자신의 방으로 달려나간다.

그리고 반쯤 닫혀있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을 때, 도희의 시선 안에 들어온 것은 율이였다. 율은 마치 잠시 외출이라도 다녀 온듯 태연한 얼굴로 도희가 어질러 논 술병들을 주섬주섬 치우고 있다, 갑작스런 도희의 등장에 놀란 듯 도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율, 아..."

"도희야,"

자신을 바라보는 율의 눈이 가늘게 접힌다.

도희를 보고 있는 율이, 혹시나 환각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도희는 뚫어져라 율을 바라보며 더듬더듬 손을 뻗으며 율에게 다가갔다. 떨리는 손이 율에게 닿자, 도희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율은 갑자기 자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흐느끼는 도희에 당황했다.

"도, 도희야...?"

결국 율도 주저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울고 있는 도희의 고개를 잡아 들어올렸다.

"왜, 왜울어, 울지마, 도희야."

처음 보는 도희의 눈물에, 율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집에 갔는데 혹시 쫒아내면 어쩌지, 라는 생각을 하며 집에 왔는데, 도희는 없었다. 방이 어질러 져있어 무심코 치우고 있는데, 급하게 도희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지금 도희는 율 앞에서 울며 무릎을 꿇고 있다. 생각하지도 못한 상황에, 율은 그저 어벙벙했다.

계속해서 흐느끼는 도희를 달래고 있을까, 도희의 뺨을 쓰다듬는 율의 소능ㄹ 도희가 꼭 잡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눈물을 떨구며 율과 눈을 맞췄다.

"...해."

"뭐, 뭐라고, 도희야...?"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어...?"

"사랑해. 사랑해 율아."

울음에 잠긴 도희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우는 도희를 율은 그저 끌어안았다.

"나도, 미안해. 말없이 떠나서. 내가 더 미안해."

바닥에 주저앉아 부둥켜 안는 둘은 정신없이 그리웠던 서로의 품을 파고들며 서로의 체취를 맡았다.

그 체취는 어느 향들 보다도 따뜻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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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3-02 21:42 | 조회 : 1,283 목록
작가의 말
연어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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