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떠날 거야.(2)

율의 쪽지를 봤을 때, 순간 도희는 마치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솓는 기분이였다. 떠난다니.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저 홀연히 떠난다니.

"하, ...하루도 못버티고 돌아오겠지."

턱 밑까지 차오른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며 도희는 확신했다. 율은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 돌아올 것이라고.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돌아오면, 다신 이런 장난 치지 말라고 해야겠어."

어린애도 아니고 진짜. 도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율은 자신 없이는 살기 힘들거라, 도희는 확신했다. 그러니 금방 돌아올 것이란 것도 확신했고.

도희는 율이 남긴 쪽지를 싸늘하게 바라보다 이내 들고있던 손에 힘을 주며 꾸겨버렸다. 그리곤 휴지통에 버려버렸다. 이 율의 행동은 그저 쓸데없는 반항이였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눈을 감으니 온전히 생각하는 것에 집중 할 수 있었다.

어디로 떠나? 얼마나? 아니, 돌아오긴 할까. 안돌아 오면 어쩌지? 마음 한 쪽에서 기어나오는 불안한 물음들을, 도희는 무시했다. 그럴 일 없어. 율은 돌아와. 어차피 돌아올거, 어디로 갔는지는 상관 없어. 어차피 금방 올거니까, 언제 돌아 오는지 생각 안해도 될거야.

"잠이나 자자."

복잡한 생각을 밀어내고 머리를 비워내려 노력해 본다. 쉽지 않은 일이였다. 옆에 율이 항상 누웠던 자리로 부터 허전한 냉기가 전해졌다. 몸을 섞은 뒤로 자연스럼게 침대를 같이 써서 그런지, 몸은 이미 그 환경에 익숙해졌었나 보다. 율의 빈자리로 인한 잠자리의 미묘한 변화가 거슬렸다.

바뀐 잠자리 때문인지, 복잡한 머릿속 때문인지. 도희는 도저히 잠에 이를 수 없어 늦은 밤까지 그저 몸을 뒤척였다.

*

결국 도희는 잠을 설쳤다. 찌뿌둥한 몸을 잠결에 뒤척이다 옆자리를 손으로 쓸었다. 옆에서 아름답게 햇볕 아래 잠들어있는 율은 없었다. 그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지 않았다. 율이가 없다는 사실에 갑작스런 두통이 오는 머리는 지끈거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루의 시작은, 최악 그 자체였다. 뭔가 의식하면 의식 할 수록 기분이 나빠지는 듯 해서 생각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도희는 덤덤하게 나갈 준비를 했다. 세수하고 양치하고, 샤워한 후 옷을 입고 간단히 배를 채웠다. 율만 없을 뿐,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양치를 하던 도중 눈에 띈 율의 칫솔, 샤워하다 보이는 율이 사용하는 동그런 목욕 스폰지. 옷장 옆에 작은 바구니에 놓인 율의 귀걸이들과 부엌에 덩그러니 있는 율의 머그컵. 율이 없어서 그런지, 율의 모든 흔적이 두드러지게 보였다.

똑같은 하루의 시작이였다. 오늘따라 눈에 띄는 율의 흔적과 가슴 한가운데 뻥 뚫려버린 느낌만 빼면 말이다.

율이 떠나고 나서도 아슬아슬 하게 나마 일상생활이 가능했던 것도 율이 떠난지 이틀 후, 불가능해졌다.

한 곳에 뭉쳐놨던 불안은 이틀 째 되는 날 도희의 온 몸으로 퍼졌다. 율이 돌아오지 않을거라는 생각에 자꾸만 잠식되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였다. 그 생각에 격하게 부정 할 수록, 그 것에 얽매이듯 빠져나올 수 없었다.

"..."

돌아와. 돌아와 율아.

제발.

마음속 깊이서. 처절하게 외쳐봤다. 돌아오라고. 가슴이 욱신거렸다. 숨 쉬기도 힘든 느낌.

율이 없어진지 이틀 째. 집까지도 도희에게 있어 갑갑한 존재가 되어가는 듯 했다. 예전엔 혼자서만 잘 살았는데, 왜 이제와서 그저 휑하고 혼자 서 있기에 쓸쓸한 집이 되어버렸는지 모르는 일이였다.

"...연락도 없고."

갑갑한 창문을 열곤 하늘의 둥그렇지 않은 달을 바라봤다. 살짝 찌그러진 달은 마치 온전치 못한 도희의 정신 같았다. 이성은 있지만, 위태로운 정신.

정말이지, 연락이라도 되면-.

"...?"

연락. 연락?

"...!"

그래. 연락. 인간의 편의를 위해 발전한 현대 문명에는, 쉽게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왜 지금 깨달은 걸까. 왠지 모르게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부여잡고 밀려오는 흥분을 가리앉히며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폰을 들어올리는 손이 덜덜거리며 떨렸다.

"가율, 가율, 가율..."

핸드폰의 연락처 앱을 실행하곤 율의 이름을 찾아 스크롤을 내렸다.

"율... 율..."

길게 내려가던 스크롤이 화면 바닥까지 닫아 더이상 내려가지 않았다. 그러나 율의 연락처는 찾지 못했다.

수많은 연락처가 저장되어 있는 이 폰에, 그 무수한 연락처의 주인들 보다 몇배, 아니 몇백배, 아니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만큼 더 중요한 율의 연락처가 보이지않는다. 혹시나 지났쳤을까 스크롤을 아래서 부터 위로 올리며 다시 확인에 봤으나, 사실이 달라지진 않았다.

"하... 하하..."

이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웃음만이 나온다. 웃음에서 허탈함과 좌절감이 깉게 묻어나온다.

"그래, 율이 연락처도 모르고 있었네."

버러지 같은 놈. 도희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은 채 스스로를 욕했다.

율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온전히 내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연락처를 알 지 못한다는 것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율이 떠난게 맞는걸지도."

참 이기적이였던 과거의 자신은 율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었다. 제발 곁에만 있게 해달라 빌어야 했던 사람은 율이아닌 자신이였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자기만을 생각하고 그릇도 안되면서. 과분한 사람을 품으려했다.

괴로웠다. 아주 괴로웠다. 이 몰려오는 후회의 감정은, 처음이였고, 아주 고통스러웠다. 그 뒤 늦은 후회는 어쩌면 아무 소용 없는, 불필요한 감정이였다. 그저 괴롭기만 하고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그런 감정.

그러나 도희는 후회가 온 몸을 짓누를 때 까지 가만히 내버려뒀다.

"...고통스러워도 싸."

미안했다. 율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그까짓 사랑이 뭐라고. 그렇게 죽어라 인정하지 않았던 걸까. 순 아집이였다. 과거의 자신이 행동한 모든것이 후회로 다가오는 느낌이였다. 숨이 막혔다. 맨 정신으론 버티기 힘들었다.

"...후우..."

베란다의 난간에 기대 찬 바람을 쐬다 주머니서 담배 한개비를 꺼냈다. 베란다에서 흡연은 안됐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어두웠던 사방이 순간 밝아졌다 다시 어두워진다.

아지랑이 처럼 피어오르는 연기가 캄캄한 하늘 속으로 흩아진다. 탁하고 쓴 담배연기가 폐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 하얀 연기는 시야를 가려 기분을 몽롱히 만들었다.

"율..."

자신에게는 과분한 이름을 혀로 굴려본다. 참 예쁜 이름이였다.

"돌아와줘."

적어도 사과는 하고 싶었다. 돌아와 달라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을 해서라도, 마지막으로 라도 율의 얼굴을 보고싶었다.

투둑,
탁한 눈에서 맑은 눈물이 떨어졌다. 뺨을 타고 떨어져 바닥을 적시는 눈물의 촉감을 미쳐 알아채지 못한 도희는 눈물을 훔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떨궜다. 안그래도 연기 때문에 흐릿한 시야는 차오르는 눈물에 앞이 안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와서 기회를 달라는건, 웃기는 일인걸까.

웃겨서 남들이 비웃어도, 손가락질 해도 상관없다.

그저, 늦지만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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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3-01 21:15 | 조회 : 1,402 목록
작가의 말
연어구이

멍멍이 기여어님, SUNO님 댓글 감사합니다. 하트도 정말 감사해요...!! 하트 충전하고 힘냅니다. 요즘 두통이 심해져서 힘드내요.. 아이고 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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