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떠날 거야.(1)

말 잘 듣는 개. 율은 도희 곁에서만 있을 수 있다면 뭐가 되든 상관 없었다. 생명이 없는 물건 흉내를 내라 해도 기꺼이 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된다해도 도희를 원망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욕심은 계속해서 불어났다. 숨이 찰 정도로 가슴 가득히 채워졌다. 이성으로 욕심을 억누르는건 점점 힘들어졌다. 지금까지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아서 이렇게 서툰걸까, 하고 절망감 마저 들 정도로, 율은 위태로웠다.

도희를 바라봐도, 도희의 손을 잡아도, 포옹하고, 살을 부비고 입을 맞춰 보아도. 욕심은 가라 앉긴 커녕 더 부풀어져만 갔다.

위험했다. 욕심이 끝내 이성을 찢고 밖으로 내보여지면, 무슨 행동을 할지 몰랐다. 도희를 협박할 수도 있고, 감금할 수 도 있다. 심지어 도희를 다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이르자 율은 울음을 터트렸다.

지금 이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끔찍했다.

마음이란건, 생각처럼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도희의 곁에 있으면 있을 수록 점점 절망에 빠졌다. 행복하지 않았다. 우울했다. 도희를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희를 지키려면 그를 멀리해야한다.

이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

율의 고뇌와는 상관없이 항상 아침은 밝아온다. 도희는 대학교로 갔고, 집에는 율만이 남아있었다. 덩그러니. 홀로 서 있는 이 공간에는 도희의 공백이 너무나도 컸다.

"..."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 한지 며칠. 율은 지쳐버렸다. 그저 공허한 마음이였다. 이렇게 힘들거면, 차다리 멀리 떠나 버리는게 자신에게나 도희에게나 나은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떠나자."

그래. 떠나자. 최대한 멀리. 로맨스 소설에서도 잠시 연인과 떨어져 홀로 여행 하는 주인공이 있었다. 그러니 잠시 마음을 가다듬는 것도 괜찮을지도.

예전 자신의 옷을 옮겼던 케리어를 장롱 속에서 꺼냈다. 케리어를 열고 하나, 둘 옷가지와 필요한 물건을 간단히 챙기기 시작했다. 짐을 챙기는 동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한동안 폭풍이 몰아치던 마음속이 잔잔한 바다가 된 것 마냥 차분해졌다.

핸드폰을 들어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서너번 울렸을까, 딸각, 하는 소리와 함께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 아가니?]

"...아저씨."

[무슨일로 전화를 다하니,]

"저... 당분간 여행을 좀 다녀오려고요."

[...도희랑?]

"아뇨, 저 혼자서요."

혼자 간다는 말에 전화 너머선 아무 말 없이 침묵이 흘렀다. 아저씨는 눈치가 빨랐다. 율의 감정을 눈치 챘을 수도 있었다.

[어디로 가니?]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냥, 국내로 가려고요."

[...그래. 더는 묻지 않으마. 잘 다녀와.]

"...네."

몸 조심하고, 아저씨의 걱정스런 말에 대한 율의 대답과 함께 전화는 끊어졌다. 율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케리어를 일으켰다. 조용히 도희의 방을 둘러보다, 이어 메모지를 한장 가져와 잘 정돈된 침대 위에 짤막한 쪽지를 남겼다.

[떠날 거야.]

*

케리어를 끌며 무작정 거리로 나왔다. 최대한 멀리로 가고싶었다. 하지만 해외는 싫었다. 한번도 가본적 없고, 여권도 없으니까. 그냥, 국내에서 가장 먼 곳으로.

"...제주도."

제주도로 가자.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타곤 차 문을 닫는 동시에 율은 말했다.

"공항으로, 가주세요."

*

공항에 도착한 뒤 마냥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였다. 휴가철은 아니지만 갑작스럽게 비행기 표를 얻는건 쉽지 않은 일이였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공항 직원은 친절하게 율을 도와줬고, 싼 가격으로 표를 얻을 수 있었다. 비행기를 탈 때는 괜히 심장이 떨리는 기분이였다. 처음 타보는 거라 마음도, 행동도 절로 조심스러워 졌다.

"아-."

자리는 비행기 창가 쪽이였다. 자리에 착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는 이륙했다. 이륙하는 동안 거대한 엔진소음에 귀가 먹먹해졌지만, 작은 창으로 보이는 풍경은 참 예뻤다. 모든 것이 손에 다 잡혀 들어올 듯 작아졌다.

"...도희의 마음도, 손에 잡혔으면 좋았을텐데."

쓰게 웃어보인 자신의 얼굴이 창가에 비춰지자 율은 고개를 돌리곤 좌석에 기대 눈을 감았다. 이 여행의 끝에선, 욕심을 조금이나마 버릴 수 있을까,

*

비행기는 듣던 대로 아주 빨랐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아직 해가 지지 않았을 때, 율은 제주도 땅을 두 발로 딛고 설 수 있었다. 율이 공항 밖으로 나와봤을 때, 겨울이 되어가는 때 인데도 불구하고 쌀쌀하지 않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청량한 파란색 하늘이 넓게 펼쳐진 풍경에, 율은 저절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예쁘다."

참 예쁘다. 눈이 시릴 정도로. 도희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이렇게 뻥 뚫린 예쁜 하늘이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벌써부터 도희가 보고싶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지. 케리어 하나만을 들곤 율은 공항 주위를 서성거리다, 주변 전봇대에 붙여진 한 전단지를 발견했다.

[민박집. 제주시 00구 00로 00번지. 할매 하나. 사투리 안써요. 싸요. 누구든 환영해요.]

투박하지만 따뜻하고 친근한 글씨체였다. 율은 혹여나 종이가 찢어질 세라 조심스럽게 전단지를 떼어냈다.

"...00구 00로 00번지..."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니 먼 거리도 아니였다. 율은 서둘러 택시를 잡으며 그 민박집에 아직 손님이 없길 바랐다.

*

율이 향한 민박집은 꽤나 시골같은 풍경 속에 덩그라니 자리 잡고 있었다. 대문 없는 집이였다. 조심스레 마당으로 들어가 보니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네 집에 가봤으면 이런 느낌이였을까, 하는 동시에 율은 ''가족'' 이라는 단어에 소름이 돋아 고개를 저었다. 가족은, 율에게 있어선 끔직한 존재였으니까.

"...저, 계세요...?"

집 마당에 [민박집] 이라는 팻말이 있는걸로 봐선 이 집이 맞을 텐데.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외출하셨나...?"

율은 마당을 서성이다 결국 마당 한 쪽에 있는 평상에 엉거주춤 앉았다. 그리고 얼마 기다리지 않아, 해가 질 때 즈음 집 주인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오셨다. 할머니는 잠시 놀란 듯 하다 이어 손님이라는 걸 알아채고 환하게 반겨주셨다.

"아유, 반가워요, 젊은 청년, 민박하러 왔어요?"

"네, 며칠 묶을 수 있나요...?"

"그럼, 당연히 되고 말고,"

살가운 할머니의 태도가 율의 경계심을 허물었다. 율은 본능적으로 할머니가 마음을 놔도 되는 상대라는 걸 알아차렸다. 할머니는 낮가림 심한 율에게 친근히 말을 붙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율은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몇마디 나누다 보니 기울어져 있던 해가 지며 어둑해지고, 할머니는 어서 집으로 들어오라 손짓했다.

*

해가 저문지 오래, 도희는 이제서야 과제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시간이 늦어지자 도희가 과제를 하던 대학 도서관에도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가볼까나."

도희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집에 돌아가려니 조금은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도희가 율과의 관계에서 뚜렸한 선을 그은 이후, 둘 사이의 분위기는 그다지 편안하지 못했다.

집에 가면 율이 뭐라도 해놨겠지. 과제를 하느라 밥을 건너 뛴 상태여서 허기가 진 상태였다. 집에 자신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 마음이 따뜻해 지는 것은 신기한 일이였다.

율에게 그냥 사랑한다고 말해보는 것도 생각해봤다. 그럼 무거운 분위기가 조금은 나아질 테니. 하지만 뭔가, 율에게 거짓말 하는 것 같아 꺼려졌다. 율만은 진심으로 대하고 싶었기 때문이였다.

진실만으로 대한다라, 아마 율이 소중해서 일 것이다.

소중해서 진실만을 보여주고, 그래서 상처를 준다.

참 모순적이였다.

생각에 잠긴 채 집 근처에 다다르자, 도희는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집 바로 아래로 가니 집에 불이 모두 꺼져있었다. 뭐지? 어디 나갔나? 아니, 나갈 일 없을 텐데. 벌써 자고있나? 하지만 아직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니, 자기엔 이른 시간이였다. 무슨 일이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깜깜한 어둠만이 도희를 맞이했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다.

율이 반겨주지 않았다.

"...율아...?"

불안한 느낌이 온몸을 감싼다. 온 집안을 둘러봤짐나 율은 보이지 않았다. 도희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방으로 가 불을 켜 봤다. 혹시나 율이 자고 있을 까봐.

"..."

그러나 율은 방에도 없었다. 그러다 침대에 놓인 한 쪽지가 도희의 눈에 띄었다.

"...?"

도희는 조심스럽게 쪽지를 집어들었다.

[떠날 거야.]

또박또박 눌러 쓴 글씨체. 율의 것이였다.

"떠날... 거야?"

순간 사고회로가 정지 된 듯 도희는 그저 멍하니 쪽지를 바라봤다.

도희는 쪽지를 든 채로 율의 옷이 있는 장롱으로 다가가 장롱을 열어봤다.

"없어..."

율의 옷들도, 율의 케리어도 없었다.

"없어..."

율이 없었다.

항상 있었던 율이, 항산 자신을 반겼던 율이, 자신의 것인 율이-

없었다.

"...장난해?"

이 어이없는 상황에, 절로 나오는 건 콧웃음 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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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28 21:43 | 조회 : 1,226 목록
작가의 말
연어구이

율이랑 도희는 제 친구와 같이 만든 커플이여서, 이 소유욕만이 아니였다의 내용을 친구가 이미 다 알고있어요 ㅋㅋ 그래서 중간중간 더 세세한 부분이나 새로운 소재를 넣을려 노력합니다. 친구야!!지루하진 않니 ㅎㅁㅎ 저번화에 댓글 달아주신 멍멍이기여어님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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