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1)

(이전 이야기)

나와 친한 친구들이 같이 지옥에 가는걸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일시적
인 감정이라 생각해야지.

무엇보다, 주하는 아픔이 많은 아이기에 내가 옆에 있어주어야 한다. 주하
를 위해서라도 나는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상처> (1)

10월 중반의 아침, 산산히 부는 비바람은 늦여름의 남은 더위를 몰아 낸 듯이 시원하게 불고 있다.
골목길에 뚝뚝, 낙엽위에 떨어지는 맑은 빗소리는 어느 새 벌써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여유로운 10월, 나와 현우는 학교에 지각하여 헐레 벌떡 뛰어가고 있다.

"아 진짜! 야! 박주하! 내가 일찍 일어나랬지?"

저 새끼는 아침부터 나한테 소리를 지른다. 시끄럽게...

"너 그말 몇번짼지 알아? 미안하다고!!"
"이게 미안하다고 될 일이냐? 너때매 학교에서 학원 숙제 못하게 생겼잖아!"

우리 반은 지각을 하면 1분이든 10분이든, 무조건 깜지 1장을 쓰도록 한다.
그것도 3,000자.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죽기살기로 지금 뛰어가고 있는 것이다.

"야, 근데 김민준은 요즘 뭐하고 다니냐?"

항상 10시, 11시에 학교에 오는, 우리 바람직한(?) 김민준씨.
PC방이 그렇게 재밌냐... 난 너 보고 싶은데.

"오늘 그새끼 학교 일찍왔다는데?"
"에? 왠일로? 걔가 왜?"

현장체험학습날에도 30분 늦게오는 그런친구다.
그 김민준이 제때에, 그것도 우리보다 일찍?
오늘 뭔일이 생길라나...

"몰라, 낸들 어캐아냐. 맞다, 걔 최근에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대."
"뭐어어어어??"

김민준이...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근 몇년간 책을 피는 꼴을 본적이 없는 친구다.
그런 김민준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너, 그거 뻥이지?"
"새꺄, 내가 구라치는걸로 보여? 나도 그거 듣고 놀랐다고. 학원끊었대."

학원까지?
4학년, 그때부터 줄곧 중3인 지금까지, 거의 5년이란 시간동안 영어 문제집이라곤 손 하나 까닥하지도 않은 미친놈이...
학원을 끊었다고?????

"야야! 박주하! 너 지금 이 소리 안들려?"
"무슨 ㅅ..."

'띵동 댕동, 띵동 댕동!'

이 소리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야야!! 이거 종치는거잖아!!"
"그래!! 우리 지금 망했다고!!!"

저 아름다운 선율의 종소리는 우리 학교의 조례를 알리는 종소리이다.
한마디로 지금 우리는 망했다는 것이다.

불안한 하루의 시작, 오늘 무슨일이 있을려나...
하고 생각한 순간,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야, 나 갑자기 소름 돋았어."
"그거 귀신지나가서 그래. 너 이제 망했다."
"이 십새끼가."

나는 애써 나오려는 불안감을 현우의 장난으로 가볍에 잊었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잊으면 안되는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야! 이현우! 나 버리고 먼저가냐!"

살금살금, 복도를 지나 어느덧 우리반 앞에 왔다.
역시나, 오늘도 여느때와 다르지 않게 아침부터 샘이 직접 만드신 막대기로 교탁을 툭툭치고 계셨다.

"왜 아직도 두명이 안오고 있어!"

저 아이들이 흔히 부르는 '매직 스틱'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글루건에 꽂는 심 6개를 한데 모아 청테이프로 꽁꽁 둘러싸 밀봉하여 만든, 희대의 살상무기다.

참고로, 맞으면 존나게 아프다.

나와 이현우는 살금살금 소리가 들리지 않게 뒷문을 열어 조심히 들어가는 중에...
'끼이익...'
아 망했다.

"거기 스탑."
선생님께서 우리가 왔다는걸 짐작하셨나보다.

"거기 둘. 박주하랑 이현우. 일어섭니다."

하, 젠장. 걸려버렸다.

"빨리 안일어나?!!"

"네네!"

허둥지둥, 하던짓을 그만 두고, 우리는 일어섰다.

"너네 둘은,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온다."

하, 오늘은 또 어떤걸 시키시련지...

'띵동 댕동, 띵동 댕동!'

조례 후 5분 쉬는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하아, 개같다."

2교시 수학 후 쉬는시간, 절반 이상의 아이들이 엎드려 자신의 꿈을 펼치고 있다.
그것이 머릿속의 상상인 것은 모른채.

"에라, 모르겠다. 나도 자야지."

하고 나는 팔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역시 창가 쪽 자리라 그런지 잠이 솔솔 온다.
...
'어..? 여긴...'

저녁 노을 비치는 시간에 우뚝 선 느티나무 하나와 벤치.
공원이다. 여긴 어렴풋이 몇주전 꿈에서 본적 있는것 같기도 하다.
그 꿈에서 민준이가 나왔었나...

"주하야!! 나 너한테 할말 있어!"

이 목소리는??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우리 김민준이 왔다.

"무슨 말 하려고 하는건데? 중요한거야?"

먼거리를 달려와서 그런지, 민준이는 숨을 헉헉거린다.

"헉...헉...주..주하야..."
"천천히 말해, 괜찮아."
"나...나랑 사귀자."

뭐...뭐라고?
이게 무슨일이야. 세상에. 꿈이야 생시야?
나는 내 볼을 꼬집었다.
안아프다.

"아 씨발, 꿈이네."
"야, 박주하. 뭔 꿈을 꾸길래 그렇게 히히덕 대냐?
설마..? 어머!! 우리 주하도 남자였구나!!"

하하... 이현우 이 개새기, 내 단잠을 방해하다니.

"섹스했다, 씹새야."
"뭐..?"

이현우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떠냐? 내 섹드립이. 당황스럽지?

'띵동 댕동, 띵동 댕동'

종소리와 함께 3교시 국어시간이 시작되었다.
"주하야, 긴히 상담좀 하자."
"응, 자리에 앉아~"

다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국어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오늘은 어떤 이상한 일을 할려나...

"자, 오늘은 '사자성어'를 이용하여 자신의 목표를 정하는 수업을 한번 해보려고 한다."

아이들의 비명이 곳곳에서 들린다. 하긴, 사자성어만큼 힘든 것이 어디 있다고.

"시끄럽고! 앞쪽부터 알아서 선택해라. 물론 그것을 고른 이유도 있겠지?"

발표를 시키려나 보다. 이 악랄한 선생.
내 자리는 중간 자리라 10개 정도가 남아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간ㄷ나한 두 가지를 뽑았다.
하나는 고... 음... 나머지는... 모르겠다.

"쌤 이거 두 개 무슨 뜻이에요?"
"하나는 고, 진, 감, 래. 고진, 고생이 다 지나가면, 감래, 달콤한 게 온다는거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거지."
"이거는요?"

나는 무슨 ...천 이라고 한자로 적혀있는 것을 들고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지성감천. 지극 정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뜻이다.

음, 평소 좋아해 온 사람에게 지극 정성을 다하면 후에 그 사람이랑 사귈 수 있게 된다는 말이지."

"둘다 좋은 거네요."

고진감래와 지성감천. 둘다 작은 네 단어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매우 크게 와 닿는다. 그리고 그가 생각난다.

내가 좋아하는, 우리 민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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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14 16:08 | 조회 : 458 목록
작가의 말
젠틀한꼬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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