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2)

(이전 이야기)

"지성감천. 지극 정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뜻이다.

음, 평소 좋아해 온 사람에게 지극 정성을 다하면 후에 그 사람이랑 사귈 수 있게 된다는 말이지."

"둘다 좋은 거네요."

고진감래와 지성감천. 둘다 작은 네 단어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매우 크게 와 닿는다. 그리고 그가 생각난다.

내가 좋아하는, 우리 민준이.

<상처> (2)

"자, 다 골랐으면 종이 줄 테니 적어라."

곳곳에서 우리반 애들의 신경질 소리가 들린다.

"시끄러! 나도 하기 싫은데 뒷반 쌤이 해서 하는거야. 빨랑 적어라."

하, 사람 정말 귀찮게 만드네.

"수행평가로 돌려버린다. 제대로 써라."

... 빌어먹을.

'자신이 뽑은 사자성어 1개와 그 뜻을 쓰시오.'
흐음... 뜻을 쓰기 쉬운 지성감천으로 해야겠다. 아무래도 어려운 말로 쓰면 팔 아프기 쉽상이니까.

'지성감천, 지극정성으로 간절히 기도를 드리면 하늘도 감동하여 원하는 것이 이루어 진다는 것.'
나는 몇 글자 뒤에 더 끄적였다.
'예를들어 짝사랑?'

짝사랑이라 하니 웃음이 나온다. 그놈의 짜증나는 짝사랑 때문에...
1년간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데...
그때의 정민지 목소리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역겨워, 진짜 제발 꺼져."

하하, 생각만 해도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내가 왜 도대체 그 개썅 또라이년을 좋아한건지... 그래도 걔 덕분에 김민준을 만나게 되었으니, 마냥 나쁜 일은 아니었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위 사자성어를 선택한 이유를 자신의 경험과 관련지어 서술하시오.'

이정도 문제면 압박 면접질문 아닌가 생각하지만... 수행평가가 될 수 있으므로 이 아량이 넓은 박주하는 꾹 참고, 쓰도록 하겠습니다.

'쓱쓱'
우리의 연필과 샤프 소리가 교실을 가득 메운다. 분명 여기서 운이 없는 아이는 조만간 발표대상이 되겠지?
하씨, 갑자기 걸릴까봐 존나 쫄리네.

"하... 팔아파."

"그럼 이제 발표를 해볼까? 박주하, 나와서 말해봐."
"네?"

밑도 끝도 없이 바로 내가 먼저 발표라고?
아니 이 인간은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런대... 무섭게.
아침에 느껴졌던 불안감이 이것인가...

"너가 제일 길게 써서 그래. 싫음 말아라."
"네. 다른애 시켜주세요."

쌤은 고개를 출석부로 돌렸는데...
어째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 14번, 박주하 발표해라."

진짜 짜증나는 인간이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일어서서 내가 종이에 썻던 걸 읽기 시작했다.

"저는, 예전에 한 아이를 좋아했었습니다."

'오오~'
친구들이 흥미를 가진 듯 소리낸다.
그러나 유일하게, 이현우는 불안한 눈으로 나를 지켜본다.
뭘봐 이 새끼야.

"그러나 그녀는 저를 좋아하지 않았고, 급기야 제가 고백을 한 것이 부끄러운지 저를 왕따 시키며, 힘들게 했습니다.
그렇게 제가 어둠 속,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있던 그때."

애들이 일제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좀 부담스럽단다, 나의 친구들아.

"어떤 분께서 제게 먼저 손을 건네주었습니다."

이제부터 오글 터진다. 주의해라.

"아니, 그것은 손이 아니라 한줄기의 빛, 그 자체였습니다. 영원히 가려져 있을 것 같던, 그런 어둠 속에서 한 줄기의 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계속 읽었고, 그들은 점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과 몇년을 같이 지내며, 대화를 할 수록 망므 속에 있던 어둠은 지워지고, 빛으로 가득 차올랐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빛은 흑과 백으로 밖에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현우를 힐끗 쳐다보니, 무언가 걱정하는 눈초리이다.
넌 뭐가 걱정인거냐. 과거 일을 꺼낸게 걱정인거냐, 아님...
너 혹시 눈치 깠니? 일단 계속 읽어야겠다.

"이 빛이 빨강, 파랑, 노랑 등의 다채로운 무지개 색을 띠게 된건 짝사랑 하던 그녀를 잊고 그 사람과 오랫동안 지낸 뒤였습니다."

살짝 목이 아팠던 나는 잠시 텀블러의 아이스티를 한모금 홀짝, 들이마시고 이어나갔다.

"언제부턴가 그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알 듯, 모를 듯 흑과 백이 아닌, 푸르른 맑은 하늘, 나무를 보았습니다. 빨강, 노랑, 초록의 다채로운 나무. 저는 이것이 말로만 듣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내가 말을 잘했나...

"그러나 모두 그럿듯이 자신의 망므을 알게 되면, 전처럼 그 마음을 속이기 힘들어집니다. 그렇기에, 저는 지극정성, 온 마음을 담아 사랑하려고 합니다. 한르이 감동할 때 그때까지. 그래서 저는 '지성감천'을 뽑았습니다."

내 말이 다 끝나자마자, 친구들은 환호하며 박수쳤다.
나... 잘한건가?

"박주하."
"네, 저 잘했나요?"
"너, 그냥 문학소년이나 해라."

네?

"야, 이현우."
"왜. 밥먹다 말고."
"나 발표 잘했냐."

이현우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당연하지. 근데 굳이 4학년때 이야길 꺼낼 필요가 있냐."
"그냥... 말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서..."

아, 밥풀 튀었다. 미안하다...

"그렇구만... 그래서 그 여자애가 누구야? 나도 소개시켜줘!"

사실 여자애가 아니라 남자애란다...

"...그래서 민준이는 언제와? 걔 왜 오늘 하루도 우리반에 안 오는거지?"
"바쁜가보지 뭐, 시끄럽고 밥이나 먹자."
"어이! 문학소년!"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민준이다.

"야! 김민준! 너 왜 이제야 오는거야! 너 계속 안와서 뭔 일 있는 줄 알았잖아!"
"그래서 지금 왔잖아 빙구야."

회색 조끼를 걸친 민준이는 마치 패션모델 같았다.
민준아, 너의 유전자가 참 부럽다.

"자, 그럼 나 먼저 일어납니다."
"야, 이현우! 너 어디가! 나 방금왔는데!"

이현우는 먼저 자리를 떴다.
그런데 뒷모습이 어째, 쓸쓸하다.

...
나는 식사를 다하고, 민준이에게 질문했다.
"근데 너 갑자기 영어공부 시작했다매."
"아빠가 목사잖냐. 이번에 영어로 나한테 성경 읽히겠대."

아... 얘 아버지 목사님이셨지.

"근데 그거 누구한테 들었냐? 소문낸 새끼 죽여버리고 싶은데."

이현우요.

"나도 잘 모르겠어. 나 그래도 외고 준비하니까 모르는거 있음 물어봐."

이새끼 스펠링 쓰는법은 안까먹을라나 모르겠네.

"야, 박주하."

교실 의자에 앉아 그림그리던 나를 이현우가 부른다.

"왜 부르니."

"나 안쳐다보냐?"

평상시하고 어째 말투가 다르다.
고개를 올려다보니 이현우가 진지하게 날 쳐다보고 있다.
이새끼 왜이래 갑자기...

"나 니네들이 붙어 있는거 보면 진짜 짜증나."

엥? 갑자기 뭔소리야... 설마...?

"야, 너 왜그래... 갑자기..."
"너네..."

이현우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혹시 나 따시키냐?"
"크..크큭.."

제발 이런 이야기좀 진지한 얼굴로 하지마. 웃겨죽겠다.

"이새끼 뭐라는거야..."
"아니면 내가 혼자 밥다먹었다고 일어서도 안 붙잡냐."
"으이구, 우리 현우 삐졌어요?"

진짜, 귀여워 죽겠다.

"개새끼야, 죽여버린다."

하, 진짜. 나는 얘랑 친구 아니었으면 웃는 법을 까먹었을 것이다.

"근데 박주하..."
"왜?"
"너 점심시간에 담임쌤한테 갔다왔냐?"

아, 좆됐다.

"너 왜 나한테 이제말해!!"
"왜 지랄이야!! 이제 말한게 뭐 어때서!"

혼자 가기 무섭다... 저 머리좋은 새긴 먼저 갔겠지?
이래 뵈도 저 기생오라비는 전교 10위 내에서 놀고 있는 친구로서,
나와는 노는 물이 다르다.

이새끼는 먼저 갔겠지?
벌 사이에 친구도 없는... 의리없는 짜식.

"닥치고 빨리 뛰어가라. 살고 싶으면."

나는 닥치는 대로 교실을 나가 2층 교무실을 향해 냅다 뛰기 시작했다.
하, 정신없어.

(그 시간, 학교 뒤 주차장 - 김민준 시점)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부르는 정민지 때문에 손에 있던 월간 과학 잡지를 놓고 주차장으로 나갔다.
씨발... 한창 재미있었는데...
"야, 나 왜부르냐. 바쁘니까 빨랑 말하고 꺼져."
"저기... 민준아."

씨발.

"야. 내가 성 붙여서 이름 부르라고 말했지."
"미... 미안해. 근데 이게 버릇이 되서."

뭔 또 버릇드립이야. 쫑난지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성 안붙여...

"용건이나 말해."
"나 아직도 너 잊지 못하겠어... 우리 다시 사귀면 안 될까?"

뭔 미친소리야.

"미친새끼야."

씨발, 뭐? 다시 사귀자고? 하, 존나 어이없네.

"야, 정민지. 내가 전에 말했지? 난 너같이 애들 괴롭히는 새끼랑은 말도 안섞는다고. 그리고 4학년때 있었던 일을 왜 아직도 들먹여?"

4학년때, 그러니까 박주하가 정민지한테 고백을 했던 그때, 나는 정민지와 교제하고 있었다.

"그... 그건..."
"됐고, 그냥 빨리 꺼져. 네가 고백할 바엔 차라리 내가 박주하한테 고백을 하겠다."

하고, 나는 뒤를 돌아 걸어가려고 했다.

그때,
"잠깐."

움찔,
정민지의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
뒤를 돌아보니 정민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넌 정말 하나는 아라고 둘은 모르는구나?"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니, 이 새끼 뭘 잘못먹었나.
누구 앞이라고 이딴 좆같은 소리를 싸질러?

"뭔 개소리야 하는거야 지금."
"박주하, 너 좋아하더라?"

정민지는 나를 노려보며 반응을 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박주하가 나를? 이건 무슨 소리야.

"지랄하지마. 걔 남잔데 왜 나를 좋아해."

박주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교회에 다니시는데, 뭔 소리 하는거야.

"하, 난 봤는데. 너가 박주하 안아주고 너 가니까 뒤에서 개새끼 마냥 좋아하면서 날뛰던데?"
"너 지금 주하 염탐한거냐...? 너 주하 건들면 그땐 진자 목 비틀어버린다."

계속 깐죽대는 저 주둥이를 아주그냥 찢어발기고 싶다.

"어머나,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가?
그래도 꼴에 친구라고."

이새끼가 미쳐 돌았나.

"너 진짜..."
"뭐, 맘대로 생각 하시든지. 그럼 난 간다~"

하고 정민지는 유유히 사라진다.

"아 씨발! 아오!"

화를 주체하지 못한 나는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을 발로 찼다.

'쾅! 쾅!'

오늘 너가 부서지나, 내 발이 부서지나 한번 실험해보자.
그런데 왜, 계속 주하가 생각나냐고. 마음 다 접으려고 했잖아.
나를 좋아한다는게 뭔 소리야.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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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15 20:37 | 조회 : 272 목록
작가의 말
젠틀한꼬마씨

눈 많이 오는데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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