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사 레인의 우울(중편)

누구에게든"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울 수 있다면 지우고 싶은 그런 기억이 있을것이다. 보통은 내 기준으로 기억하기 마련이라, 그 당시의 상황보단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해서 내가 어땠다란 식으로 그 때의 느낌을 떠올리게 될거다.

내 경우에도 내 생애 최악이라 꼽을 수 있는 그런 최악의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뭣모르던 때라, 속수무책으로 하라는대로 억울한 일이 생겨도 아무런 말도 못하는 그런 바보같은 시절을 보냈었다.

...그 사람은 여전히 그 곳에 있겠지만, 가끔씩 어디선가 마주치거나 만났을 때, 왜 그렇게 자신을 괴롭혔냐, 내가 그렇게 못마땅했냐 잡고 물어보고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구든 처음부터 다 잘하는 사람은 없으니, 나도 흔히 말하는 과정을 거친건데, 그걸 허용해 주는 사람을 만나느냐, 비난을 하는 사람을 만나느냐의 차이였던 것 같다.

...너무 우울한 얘기를 해서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할께. 내가 이 얘길 꺼낸 이유는, 나한테 큰 상처와 안목을 길러준 그 사람이 내가 모시는 한성 도련님과 친구란걸 최근에 우연히 알게 됐거든.

친구란걸 안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건 아니지만, 아직은 그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게 솔직한 내 심정이야. 시간이 많이 해결해주긴 했지만, 망각 했다고 해서, 일어난 일 자체가 없었던 일이 되는건 아니니까.

내가 이 곳에서 머무르는 동안엔 절대로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게 내 맘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
"유한성~너 요즘 얼굴 보기 힘들다?"
"...너랑 내가 자주 봐야 할 이유가 있던가?"

화창한 정오, 원래대로면 정원에서 조용한 티타임을 가졌어야 했는데, 친구란 이름의 웬수가 불쑥 집에 찾아온 것이다.

"탁"
"너 할 일 없냐? 니 친구는 어쩌고?"

읽고 있던 책을 책상에 놓으면서, 자신의 방에 들어온 불청객을 쳐다본다. 오늘은, 이름이 하혜성...?아무튼 걔랑 안온걸로 봐선, 심심해서 놀러온 게 분명하다.

"혜성이는 가족여행~!섭섭하게 말도 안하고 그냥 갔더라고?"
"...그래서 뭐하러 온건데? 난 걔처럼 너랑 놀아주는 취미는 없..."

어쩐지, 그래서 우리집에 올 이유가 없는 네가 친히 온거군. 근데, 심심한거면 다른 친구 집에 가면 되지. 굳이, 나한테 찾아오는 이유를 모르겠네.

"너희집에 유능한 집사 있다며~! 그 집사 하루만 빌려주라!"
"...니 집사는 어딨고? 왜 남 집사를 빌려달라 난리야"

집사란 말에 레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레인이라면, 저녀석 시중쯤이야 어렵진 않겠지만, 내가 누리고 있던 편안함(?)을 저녀석에게 무상으로 제공하긴 싫다.

사실 같은 도련님 사이에, 집사든 시종이든 달라는 것만 아니라면 잠깐 빌려주는건 친구 사이엔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가 내키느냐, 싫으냐의 문제지.

"레인은 안돼. 다짜고짜 전속 집사 빌려달라 하는건, 아무리 너라도..."
"탁"

"그럴것 같아서, 미리 준비해왔지. 이정도면 하루정돈 빌려줄 수 있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데?"

내가 읽고 싶어하던 소설책을 직접 공수해 오다니, 이거 절판된거라 구하기도 힘들었을텐데? 나야, 내가 구할 수고를 덜었으니 고맙긴한데.

"그건 비밀! 그냥 이것 저것 같이 해보면 재밌을 것 같아서!"
"...적당히해라. 문제 생기면 알지?"

레인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한창 재밌게 읽고 있는 소설을 구해준 평소라면 무시했을 친구 녀석의 요구를 오늘은 들어줘야 할 것 같다.

"당연하지, 한성 도련님의 집사잖아? 워낙 유능하다 여기까지 소문이 자자해서, 어떨지 기대되네"
"...달라해도 안준다. 잠깐 빌려주는거야"

"뭐 나중에 내가 나한테 오라고 영입하면 되니까~일단은 알았어"
"해보던가. 근데 쉽지 않을껄?"

레인은 이래저래 불평은 많아도, 자신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받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받은만큼, 맨날 때려친다 협박하지만 자기 나름대로 갚을테니까.

"갖고 싶다면"네가 할 수 있는 모든걸 동원해야 할꺼야. 김하늘. 근데, 아마 넘어가진 않을껄?

"오늘 저녁 식사 전까지. 더이상은 안돼"
"쳇, 저녁 식사 후는 안돼~?"

애절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김하늘을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어디서 수작질이야. 네 그런게 통하는건 네 친구뿐이라니까?

"...맘변하기 전에 가보지 그래? 책따위 내가 구하면 그만..."
"왁, 치사한 새...하하, 그래 한성아. 그럼 저녁 식사 전까지 돌려보낼께"

"어 그만 꺼져. 책 읽는데 방해된다"
한손으로 대충 내쫓듯이 휙휙 흔들자, 김하늘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뭐, 내가 다시 데려가면 되니까"
유한성에겐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중얼거린 김하늘은 유한성이 있는 방을 뒤로했다. 레인...?그래 잊을 수 없는 이름이지. 어딨나 했는데 여깄었네 남우현.

...그 때는 네가 나한테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함부로 대했었는데, 지금이라면 예전처럼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거다. 우현이가 어떻던간에, 이번엔 꼭 잘해줄꺼다.
-------------------------------------------------------------------------------------------
"어디보자...어디 쓸만한 평민이 없을까, 도련님 취향에 맞는 얼굴이나 성격인..."
자신의 명령하에 올라온 서류들을, 절도있는 동작으로 휙휙 넘기다 사진, 인적사항만 보고 면접을 봐봤자 어떤 사람인지는 써봐야 정확하지 않나?란 생각이 들었다.

"자료는 아깝지만, 직접 나가서 찾는게 빠르겠네. 오랜만에 시찰이나 다녀올까?"
어자피, 이것도 도련님이 내리신 집사의 업무중 하나니까. 잠깐 나갔다 온다해서, 크게 문제되진 않을거다.

"오랜만에 이 답답한 복장을 벗는건가...기왕에 나가는김에 그것도 해볼까?"
갑갑함을 벗어난다는 생각에, 쌓였던 피로가 날아가는 것 같다. 그래 휴가가 별거냐, 이 저택에서 벗어나는게 휴가지.
-------------------------------------------------------------------------------------------
"...외출했다고? 어디 간다고 얘기는 못들었고?"
"그게...아무말도 없이, 쪽지만 남기고 사라지셔서..."

"꾹"
"사라졌다고? 어디로 간건데"

내가 널 보자고, 팔자에도 없는 책찾기를 했는데 이렇게 쉽지 않아서야 조금 화가 나긴 하지만, 찾아서 보면 되니까. 크게 문제 될건 없다.

"그게...마을 시찰을 다녀오신다 하셔서, 어느 마을인지는..."
"하 진짜, 넌 대단해 레인. 하긴 그래서 내가 이제야 널 찾은거겠지만"

김하늘은 자신의 주먹을 꽉 쥐었다. 남우현 네가 어떻던간에, 난 널 반드시 만나야겠어. 물론, 쉽게 만나진 못할것 같지만. 내 사전에 포기는 없으니까.

"재밌네, 그래. 숨을거면 잘 숨어봐 하하하"
잡히면 뒷감당은 많이 힘들겠지만, 어쨌든 재밌게 됐네. 쉽게 잡는것보단 이렇게 공들여 잡는게 훨씬 재밌으니까.
-------------------------------------------------------------------------------------------
"와 진짜 오랜만에 나오는거라, 뭐든 다 신기하네"
한성 도련님의 대저택에 온뒤론 밖으로 나올 일이 거의 없어서인가, 오랜만의 외출은 각별했다. 그러고보니, 여기 온지는 꽤 됐는데, 자세히 둘러볼 시간이 없었네.

"뭐 마을 구경도 하고, 도련님이 시키신 일만 해결하면 문제 없겠지"
우선은 쭉 둘러볼까? 여기온지가 벌써 2년인데,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자체를 모르는 레인은 눈에 보이는 모든것들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와 이런것도...!이거 얼마죠?"
"하하 보는 안목이 있으시네, 형씨 예쁜 여자한테 선물할려고?"

보석 세공 상인이 만든것 만큼은 아니지만, 시장에서 이정도 퀄리티의 물건이면 나쁘지 않다. 혹시 몰라서 돈을 넉넉히 가져오긴 했는데, 가격도 이정도면 적당하다.

"아뇨, 그냥 예뻐서요. 이거 남자가 차도 괜찮죠?"
"팔찌라 성별은 크게 문제 없을겁니다. 그나저나, 첨 보는 형씬데 눈썰미가 좋네"

흠, 여자 전용은 아니면 내가 하던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줘도 크게 나쁘지 않겠네. 아무말 없이 나간거니까, 예의상 선물로 사갈까. 음, 한성 도련님이면...

"슥"
"여,여기 이 제품은 어떠세요? 손님한텐 이게 더 잘 어울릴 것...같아서요"

"! 꽤 안목이 좋으시네요, 이것도 살께요"

상인의 옆에 있던 조수로 보이는 남자얘가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용기있게 자신에게 제품을 권했다. 적극적으로 물건을 팔고자 하는 자세, 나쁘지 않아.

"저기 어머니한테 선물할려고 하는데 어떤게 좋을까요?"
계획엔 없었지만, 나중에 돌아가면 드릴 선물도 지금 사야겠다.

"아...실례지만 연령이..."
"아마 40중반...? 취향은 화려하지 않은걸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하하 제가 지금 혼자 살아서 잘 모르겠네요"

"그러시면, 이런건 어떠세요?"
"슥"

"흠, 이거면 나쁘진 않네요. 이것도 포장해주세요"

처음보는 손님일텐데, 이렇게 자신의 마음에 드는 물품을 제안하는게 보통이 아니다. 이사람, 괜찮은데?

"저, 초면에 이런말을 하면 실례지만, 혹시 저랑 같이 일해보실래요?"
신분을 증명할 만한게...큭, 두고 온건가. 이 옷차림으론 별로 신뢰가 안갈...텐데.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상한 일이라면..."
"이,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옷이 이렇지만, 폰아트레쉬가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나같아도 사기꾼인가 의심할만한 그런 평민의 옷차림이니, 의심해도 할말은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안목이면 그 까다로운 한성 도련님의 요구도 잘 맞춰줄 것 같단 말이지. 이건 감이지만!

"다음번에 제가 찾아 뵙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시간 되실때 찾아와 주실수 있을까요?"
"저도 바빠서, 음...일단은 알겠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비싼 물건을 떡하니 세개나 구입한 나를 돈 많은 집 자제로 생각한건지, 조수(?)를 붙잡고 얘기해도 별 말이 없다. 휴, 듣지 못한건가? 그럼 다행이지만.

"찾아오실땐 레인 폰아트레쉬의 추천으로 왔다고 말하면 될겁니다. 이건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보여주시면 됩니다"

"...!이건 딱 봐도, 중요한 물건 같은데, 제가 받아도 괜찮나요?"
주니까 덥썩 받아든 물건을 보니, 뭔가 고급스런 문양이 새겨진 회중시계다. 굉장히 중요한 물건 같은데...그걸 내 줄 정도면 신뢰해도...괜찮겠지?

"네, 나중에 돌려받으면 되니까. 문제가 생기시면, 꼭 보여주세요"
"...알겠습니다"

퇴짜 맞으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했던 레인은, 자신의 회중시계를 받고 고개를 끄덕인 남자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휴, 다행이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이름은 알아둬야, 제 주인님께 미리 보고 할 수 있어서"
"아 제 이름은 주인공입니다"

"주인공...?특이한 이름이네요. 주인공, 인공은 좀 이름이 이상하고 주인...?이 괜찮네요. 아 죄송합니다"

평소라면 머릿속으로만 생각했을것을 자신도 모르게 입으로 중얼거린 모양이다. 급하게 수습하고자 말을 덧붙였지만, 정작 상대는 그닥 신경쓰지 않는것 같다.

"그런 얘기를 많이 들어서, 보통은 주인이라 많이 불러요. 편하신대로 불러주세요"
"아, 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저기 물품을 안가져가셨..."
"아 깜빡했네요, 죄송합니다.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더 많이 사겠습니다"

환하게 웃으면서 자신이 건넨 물품을 받아든다. 포장을 따로 해두긴 했지만,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뜯어봐야 알 수 있을거다. 사실 만져보면 대강 알 수 있지만.

"많이 파세요. 덕분에 좋은 물건 사갑니다"
"옙 자주 들려주세요 나리. 하하 오늘은 운수가 좋구나 주인아"

"...."
...이름이 레인...?인건가. 폰아트 뭐라 했는데, 귀족 가문의 이름은 평민인 자신은 어자피 잘 모르니까. 주인 아저씨한테 잘 얘기해서, 한번 가봐야겠다.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일지 궁금하다. 같이 일하자 제안 받은게 처음이라, 기분이 묘한것도 있지만. 함께 일한다면 나쁘진...않을것 같다.
-------------------------------------------------------------------------------------------
p.s 어떤걸 써야할 지 엄청 고민했는데, 고민해도 별 소용이 없다는걸 느꼈네요. 일단은 써보고! 안써지면 다음날에 써보고, 안되면 기분 전환 해보고...이런식으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사실, 연재라 하기엔 너무 부끄러운 글솜씨지만...재밌게 봐주셨다면 감사합니다!

0
이번 화 신고 2019-03-01 16:42 | 조회 : 1,243 목록
작가의 말
키스키

하늘이와 우현이, 그리고 한성이 가문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과 관계도 따로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