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루퍼스 바르마 생일[달콤하고 씁쓸한 거짓말]

그건 평소와도 같았던 어느 날이었다.

똑똑, 레임이 문을 두드렸다. 그의 손에는 온갖 서류들이 잔뜩 들려져 있었다. 판도라의 성실한 사원답게 옷깃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방에서는 간결한 대답 하나 들어오지 않자 레임은 하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어둡지는 않았지만 그늘져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엎드려 자고 있는 주인의 얼굴이 레임의 눈에 들어왔다. 주름 하나 없이 평온한 기색으로 레임과는 정반대의 흐트러진 옷차림을 한 루퍼스가 새근새근 꿈나라에 빠져 있었다.

이걸 깨워야 하나. 책상 위에 굽이치는 붉은 머리카락이 꽤나 신경 쓰였다. 어라, 머리카락이 잉크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쩌면 좋지? 레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루퍼스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레임에게 제가 손수 쓴 편지를 지인들에게 전해주라고 시켰다. 그의 표정은 밝았다.

덕분에 아침부터 여러 가문에 가야하는 레임만 고생이었다. 레임은 날이 채 완전히 밝기도 전, 거리를 누비며 루퍼스의 지인이 속한 가문에 편지를 보내고 의무적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루퍼스님.”


레임이 조용히, 하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로 루퍼스를 불렀다. 루퍼스는 잠시 뒤척이더니 투정하지 않고 차분히 깨어났다. 하지만 눈동자에는 여전히 졸음의 빛이 감돌았다.


“내가 당부한 일은 전부 마치고 왔느냐.”


“예, 그리고 이 서류도.”


손에 한가득 들려 있던 서류들을 루퍼스의 책상에 가지런하게 올려놓은 레임이 안경을 올렸다. 루퍼스는 자주 보이지 않던 웃음을 입가에 한가득 매달았다.


“날이 좋다. 오랜만에 벚꽃놀이나 한 번 가보자꾸나.”


창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걷히자 만발하게 피어있는 벚꽃나무가 시야에 활짝 들어온다. 루퍼스는 책상 위에 내려놓았던 쇠부채를 손에 쥐었다. 그의 얼굴은 기대하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맑았다.


“저, 루퍼스님.”


“음, 왜 그러느냐?”


레임은 안경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우물쭈물했다. 그러나 결심이 섰는지 눈매를 단단히 굳혔다.


“……머리카락에 잉크가 묻었습니다.”


“뭐?”


루퍼스가 제 붉은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확실히 검은색이 묻어 있었다.


“지켜만 본 것이냐?”


저를 힐끗 째려보는 루퍼스의 눈길을 느낀 레임이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루퍼스는 레임을 책하려다가 오늘은 좋은 날이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도 머리카락 끝부분이 검게 채색된 것은 아쉬웠다. 얼마나 힘들게 기른 건데!


4대 공작가문의 사람들과 그 외의 루퍼스의 지인들도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장소는 벚꽃이 만발한 정원.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었고 잔디밭에도 분홍빛이 돌고 있었다.

이국의 가문답게 상만 차려놓은 채 의자는 놓지 않고 자리에서 앉아서 연회를 즐기는 문화를 채택했다. 그 덕분에 따스하고 온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정감이 있었다.

루퍼스는 모두가 웃고 떠드는 연회 한가운데에서 조용히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지금만큼은 말동무도 없이,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레임은 멀찍이서 모자장수, 그리고 셰릴의 손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심심하다고 멋대로 불러들이는 건 예의에도 어긋나고 굉장히 미안한 짓이었다. 특히 즐겁게 웃으며 떠들고 있는 사람에게 그럴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루퍼스는 셰릴을 찾기 시작했다. 오늘만큼은 모두 행복하게 연회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에 셰릴에게도 접근하지 않으려 했는데. 자신이 없으면 누가 그녀의 휠체어를 밀어주겠는가.

속으로 온갖 핑계를 만들며 루퍼스는 레인즈워스 가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향했다. 역시나, 그곳에 셰릴이 휠체어에 앉아 상에 있던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셰릴!”


루퍼스가 반갑게 셰릴을 불렀다. 셰릴은 찻잔을 든 손을 멈추며 루퍼스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루.”


셰릴은 온화한 미소를 띠며 루퍼스와 마주했다. 루퍼스는 셰릴의 옆에 서 술로 목을 축였다.


“오랜만이야. 와줘서 고마워.”


“어머, 그게 무슨 말이야. 오는 게 당연한 거지.”


자그마치 몇 십 년 지기 친구였다. 사이가 나빠진 것도 아니고, 오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루, 우리 결혼할래?”


갑자기 꺼낸 물음에 매일같이 결혼해달라고 청혼하던 루퍼스가 오히려 당황했다. 셰릴이 먼저 제게 청혼할 리가. 의심되면서도 루퍼스의 머릿속에서 팡파르가 울렸다.


“저, 정말?”


“물론 아니지, 호호.”


역시나, 기대했던 자신이 잘못이었다. 그나저나 셰릴은 분명 농을 즐기지 않았을 텐데. 오늘 무슨 날이라도 있는 건가? 루퍼스는 셰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농을?”


“어머,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거야? 날짜를 보지 않았어?”


셰릴이 웃음기 반, 찡그림 반이 섞인 표정을 하며 루퍼스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날짜 확인을 했던가? 저번 주부터 업무가 바빠 날짜 같은 건 거들떠도 보지 않았는데…….

오늘 연회를 연 건, 순전히 업무에서 벗어나는 날이며 벚꽃이 활짝 핀 날이어서 그랬다. 이 둘 중 하나의 조건이라도 충족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연회는 열리지 않았을 터다.


“오늘이 무슨 날이지?”


“정말 모르는 거야? 오늘 만우절이잖아.”


만우절. 4월 1일. 상대에게 거짓말로 장난을 쳐도 허용되는 날. 루퍼스는 셰릴이 자신에게 농을 던진 이유를 알아챘다. 그리고 불현 듯 한 가지 사실도 깨달았다.


“게다가 오늘은 너의 생일이잖아, 루.”


루퍼스가 기억한 것과 동시에 셰릴이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아아, 오늘은 내 생일이구나. 루퍼스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모두들 네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다던데? 후후, 청춘이란 역시 좋구나.”


에? 루퍼스가 레임 쪽을 휙 돌아보았다. 레임이 빨갛게 얼굴을 붉힌 채 비밀을 고백해버린 셰릴에게 원망스러운 눈빛을 던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셰릴의 서늘한 웃음을 목격한 레임은 곧바로 깨갱, 하고 브레이크와 샤론에게 무어라 얘기했다.


“성대한 연회도, 생일파티도 모두 좋지만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역시 나이가 들긴 했나 봐. 화려함보단 안온한 기분이 더 좋아졌거든.”


“셰, 셰릴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어머, 그건 네 관점이지, 루. 게다가 너도 똑같이 나이를 먹고 있잖아?”


루퍼스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물론 자신도 셰릴과 똑같이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지만 지금도 그녀가 예전처럼 아름답게 비춰지는 건 사실이었다.
때마침 환한 불꽃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한 줄기의 빛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꽃잎처럼 피어올랐다가 내려앉았다. 루퍼스는 셰릴과 단 둘이서, 젊은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고 무의식적으로 느꼈다.


“……지금도 그 약속, 변함없는 거지? 우리 둘은 친구로 남기로 했잖아.”


“그럼, 당연하지.”


씁쓸한 어조가 입안을 가득 매웠다. 루퍼스는 셰릴에 대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일찍 깨닫지 못한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고 후회했다. 셰릴은 그런 루퍼스를 보며 입가에 맑은 미소를 매달았다.


“생일 축하해, 루. 생을 마치는 날까지 이 우정 변치 않기를.”


“고마워, 셰릴.”


술잔과 찻잔이 부딪치며 청량한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루퍼스는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대며 생각했다. 만약 친구로 남자는 말도, 우정으로 남자는 말도.

이 모두 셰릴이 만우절임에 꺼낸 말이 아닐까.

루퍼스는 셰릴을 지그시 바라봤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물어보기를 그만둔 루퍼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축제처럼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루퍼스에게 가장 의미 있는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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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4-02 22:39 | 조회 : 1,101 목록
작가의 말
유렌54

4월 1일-루퍼스 바르마 생일 / 개인사정으로 하루 늦게 올렸습니다ㅠㅠ 정말 죄송해요ㅜ 정신없이 쓴 글이라 매끄럽지 않을텐데 제가 나중에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양해해 주세요!ㅠㅠ 그리고 읽어주시는 분들,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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