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샤론 레인즈워스 생일[당신과 함께 보내고픈 기념일]

달깍-.

찻잔과 접시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연분홍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은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날 때의 그 자세는, 기품이 엿보였고 그녀를 성숙한 여인으로 만들어주는 효과를 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생일을 맞아 여는,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다과회를.”


샤론이 티 없이 환하게 웃었다. 한 손에는 레인즈워스가(家)의 여인이라면 반드시 소지해야 할 부채를 쥐고. 오늘은 기쁜 날이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생일을 축하해주시려 발걸음하신 여러분께 감사를 표하는 바에요.”


왜냐하면 오늘은, 샤론의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기념일이자 생일이었으니까-.


다과회가 무르익었을 때쯤, 샤론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다과회가 막 시작될 때와 다름없이 여전히 홍차를 우아하게 홀짝거리고 있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표정이랄까.

이번 다과회는 좀 특별했다. 다과를 먹으며 차분하게 서로 속닥대는 것이 아닌, 무도회 같은 분위기를 내는 다과회로 계획했다. 샤론은 다과회에 음악을 넣을 수 있도록 유명한 악단을 불렀다.

무도회라면 빠질 수 없는 게 춤이다. 무도회 분위기를 내는 다과회에서는 사람들이 드레스자락을 펄럭이며, 사랑하는 연인과 손을 맞잡으며, 음악에 맞추어 잔잔하고 또 흥겹게, 모두들 춤을 추고 있었다.

샤론은 그들을 바라보며 하릴없이 홍차만 마셔대고 있었다. 홍차를 홀짝이다가 다 마시면 다시 찻잔에 홍차를 붇고, 홍차를 너무 마셨다 싶으면 요깃거리를 입에 집어넣고.

끊임없는 반복이었다. 샤론이라고 앉아만 있고 싶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일어나서 밝고 경쾌하게 춤을 추고픈 심정이었다. 원하는 사람과 함께 춤을 출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모처럼 다과회인데, 아가씨께서도 좀 즐기셔야죠?”


-샤론이 함께 춤을 추고 싶은 사람은 하필 미스터 원 맨 플레이를 직접 몸으로 구사하는 사람이었다. 이 얼마나 슬픈 말인가.
미스터 원 맨 플레이란, 타인과 리듬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을 뜻했다.


“시끄러워요, 브레이크.”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쥘부채에 손을 가져다대며 브레이크를 흘끗 째려보자 그가 고개를 휙 돌린다. 시선회피였다. 10년 넘게 모셔온 아가씨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브레이크였다.


“내가 즐기기 싫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요?”


한탄과 분노가 섞인 목소리에 브레이크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모처럼 좋은 기념일인데 샤론의 분노 게이지는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자 아가씨, 진정하시고. 여기 선물~!”


그녀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대책으로 어디선가 꺼내든 선물을 내밀었다. 에밀리도 달달달 떨리며 “선물이다, 선물!”을 외쳐댔다. 샤론은 부채를 움켜쥔 손을 펴고 선물을 받았다.


“무슨 선물인가요?”


기세는 좀 누그러졌으나 의심하는 기색이었다. 의심어린 눈빛에 브레이크가 난감하게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아가씨의 취향에 맞추어 준비했죠.”


샤론은 브레이크의 해명에도 의심어린 눈빛을 지우지 않으며 상자의 리본을 풀고 포장을 뜯었다. 이럴 땐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 같다. 그녀는 안에 내용물을 발견했다. 1초, 2초, 3초가 지났다.

샤론은 탁자 위에 얌전히 있던 쥘부채를 잡았다.


“브-레-이-크-! 드디어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건가요?!”


쥘부채를 쥐지 않은 샤론의 다른 한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평범한 책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그 표지에는 미모가 빼어난 여인 두 명이 서로를 바라보며 얼굴을 붉히는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에이, 그렇게 화내시면 안 되죠~ 아가씨께서 애용하시는 출판사에서 어렵게 구해온 책인데요?”


분노하는 아가씨를 앞에 두고 능청을 떠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그 후로 10분간, 브레이크는 화를 표출하는 아가씨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어야 했다.


“보는 눈이 많아 이걸로 끝난 걸 다행이라고 여겨요!”


“그거 말고도 사실 선물 하나 더 있어요. 째려보지 마세요? 이번 건 거짓말 아니라고요.”


샤론은 바닥에 떨어지고 뜯어진 선물상자를 잡았다. 그 안에는 자그마한 상자가 들어 있었다. 어째서 이걸 몰랐던 거지. 작은 상자는 리본으로 감싸져 있었다.

상자의 리본을 풀자, 리본에 가려져 있던 고급스러운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자의 뚜껑에는 금색으로 ‘Sharon Rainsworth’ 라고 쓰여 있었다. 샤론은 마음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며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푹신한 천 위에는 귀걸이 한 쌍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귀 안 뚫었는데.”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요. 이리 줘 봐요, 내가 뚫어줄게요.”


브레이크는 상자 안에 들어있는 귀걸이를 가져갔다. 샤론의 귀에 브레이크의 손길이 닿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른 샤론은 두 눈을 꼭 감았다. 뚝, 하고 귀가 뚫리는 소리가 났다.


“아파요?”


“음, 생각했던 것보단 안 아파요. ……쟈, 쟈크스 오라버니, 고마워요……!”


샤론이 부끄러움을 감추려 애쓰며 브레이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큰 뒤로 거의 쓰지 않던 ‘쟈크스 오라버니’라는 호칭이 얼떨결에 나와 버렸다. 브레이크는 그런 샤론을 보며 옅게 미소했다.

다른 한 쪽도 뚫자 두 귀에는 전에 없던 무게감이 생겼다. 샤론은 흔들리는 귀걸이를 슬쩍 매만졌다. 브레이크는 느긋하게 앉아서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해가 지며 노을이 짙게 깔렸다. 다과회는 끝나가고 수많은 귀족들이 저택으로 돌아갔다. 베델리우스 가문도, 나이트레이 가문도, 바르마 가문도, 모두 다과회장을 떠나갔다.

남은 건 오직 다과회의 주최자인 레인즈워스 가문뿐. 하지만 그마저도 갖가지 연유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미련이 남은 샤론과 그녀를 모시는 브레이크만이 파장 직전인 다과회에서 다과를 들고 있었다.


“우리도 어서 들어가죠, 아가씨.”


저녁 무렵의 공기는 싸늘하고 차가웠다. 보다 못한 브레이크가 샤론에게 손을 내밀며 재촉했다. 샤론은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브레이크, 같이 춤 춰요.”


“저 춤 못 춘다고 예전에도 말했는데요.”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어요? 여태까지 함께 춤 춰본 적도 없었으면서!”


샤론이 눈물을 글썽였다. 함께 있었던 시간이 10년을 훌쩍 넘었는데, 그간 춤 한 번 춰보지 못한 게 억울하고 또 속상했다. 분명 브레이크도 춤을 배웠을 텐데, 어째서 자신과 춤추는 건 꺼려하는 건지 모르겠다.

울기 직전의 샤론이 브레이크의 시야에 들어오자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다시 손을 내밀었다. 우는 아이는 정말이지,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니까.


“그럼 아가씨, 저와 함께 춤추시죠.”


샤론은 고인 눈물을 장갑 낀 손으로 닦으며 브레이크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춤추고 들어가는 거예요? 감기 걸릴지도 모른다고요.”


고개를 끄덕인 샤론이 스텝을 밟았다. 시끌벅적한 다과회보다는 이렇게 단 둘이서 생일을 맞이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녀의 신분이 레인즈워스가의 차대 당주였으므로 면식이 있는 귀족들을 빠짐없이 초대해야 했다.

악단도 가버리고 음악 한 점 없었지만 찌르르 거리는 풀벌레 소리가 정겹게 울렸다. 손을 맞잡고 자연의 음악을 들으며 샤론은 천천히 움직였다.

쟈크스 오라버니, 알아요? 오라버니와 단 둘이 내 생일을 맞이하고 싶었다는 거. 그리고 지금 함께 추는 춤이 나의 두 번째 생일 선물이라는 걸.

그리고-…….


“꺄악! 왜 이렇게 빨라요!”


“말했잖아요. 전 춤 못 춘다고-.”


“이, 이건 춤 못 추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보다 속도 줄여요!”


“줄이는 방법을 모르는 걸요?”


브레이크의 스텝은 너무 빨랐다. 그 때문에 샤론의 발이 땅에서 떨어질락 말락 했다.


“브레이크! 발이 땅에 안 닿아요!”


“어떻게 멈추는지 모르겠어요-.”


“이, 이 미스터 원 맨 플레이!”


샤론의 비명 아닌 비명이 저택의 정원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샤론은 현기증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모습도-


-좋아해요,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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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4-13 13:33 | 조회 : 1,092 목록
작가의 말
유렌54

4월 13일-샤론 레인즈워스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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