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3-1


"자, 모두 32쪽을 펴요. 오늘 배울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성에 관한 이야기예요."


그다지 두껍지 않은 100페이지 이내의 책 안에는 가족, 사랑, 남녀의 성 등의 정보들이 누구의 시점에서 쓰여졌는지 모를 문체로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고, 그 책은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책 중에 한 가지로 꼽히기도 했다.

나이 17살의 호기심 왕성한 학생들은 이미 자신들을 가르치는 교사보다도 더 많은 성에 관한 정보를 접하고 있었으니 굳이 눈 앞에서 지루한 수업을 듣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것이 이 수업의 가장 큰 모순점이었지만 점심식사를 마친 학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의문 제기가 아닌 잠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조금 지친 듯한 모습으로 수업을 듣는 루카스는 칠판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눈 앞에 그려지는 정체불명의 그림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루하게 봐왔던 그림이었지만 자신에게 없는 것을 그림으로 한 번 본다고 해서 그것이 완벽하게 이해될 리가 없었다.


"임신이라는 건..."


수업하는 교사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을 때 루카스는 문득 밝게 빛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고, 그 시선의 끝에 익숙한 얼굴 하나가 보였다.


'안녕, 루카스.'


또렷하게 변해가는 입술 모양을 보고 에반이 하는 말을 이해한 루카스는 재빨리 시선을 칠판으로 옮겼다.

조금만 시선을 옆으로 옮겨도 그와 눈이 마주칠 것 같았다.

푸른 바다와 같은 그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면 루카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려, 그와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게 되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억지로 입이 벌려져 원하지 않은 키스를 한 이후, 루카스는 에반이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항상 조심히 몸을 숨기며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가만히 다물어진 입술 언저리가 뜨거웠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건만 그 날의 키스 이후, 입술 전체에 지워지지 않는 뜨거운 화상자국이 남은 것만 같았다.

루카스는 볼펜 끝으로 입술을 몇 번 건드리다가 옆 얼굴에 닿는 시선이 뜨거워 괜히 턱을 괴고 수업을 들었다.

몇 분 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없어진 것을 깨달은 루카스가 창가로 다시 시선을 옮겼을 때에 그곳에는 에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지나간 지 모를 시간이 지나가고, 길게만 느껴졌던 수업이 끝났다.

1시간 정도 진행된 수업을 들었는데도 머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생각나는 것은 밝은 햇볕을 등지고 자신을 향해 밝게 웃는 에반의 모습 뿐이었다.

루카스는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에 귓볼을 붉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책과 필기구를 정리했다.

수업이 끝난 지 5분도 채 되지 않았건만 물밀듯이 빠져나간 사람들의 무리는 벌써 건물 밖까지 향해있었고, 짐을 정리하는 것이 늦은 루카스는 가장 마지막에 그곳에서 떠나게 되었다.

혼자 있는 것이 좋고, 혼자 생활하는 것이 좋고, 조용한 것이 좋고, 매일 변함없이 이어지는 평범한 일상이 좋다.

루카스는 조용한 건물의 복도를 지나며 혼자 있는 지금 순간에 만족감을 느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만족감은 반대편 복도 끝에서 누군가 나타나기 직전까지 지속되었다가 현재는 원래부터 없었던 감정인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복도 끝 쪽에서부터 에반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로 숨어야 하지? 가장 먼저 든 생각에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루카스에게 보인 것은 개방된 여자 화장실 뿐이었다.

평소같으면 그런 곳에 숨을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서운 기세로 거리를 좁혀오는 에반의 모습에 동요한 그에게 다른 선택지란 존재할 수 없었다.

정상적인 사고를 할 틈도 없이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 가장 끝 칸에 몸을 숨기고 문을 걸어잠근 루카스는 양 어깨를 움켜쥐고 최대한 숨을 죽였다.

곧 한 사람의 발소리가 화장실 안을 가득 울렸고, 뒤이어 다른 한 사람의 발소리가 합쳐졌다.


"에반 크리스토퍼. 여긴 여자화장실이야. 남자 화장실은 복도 끝이란다."

"저번주에 성전환 수술 했거든요. 걱정하지 마시고 편하게 볼일 보세요."


화가 난 듯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화장실에서 나갔고, 남은 한 사람의 발은 고요한 화장실 안을 조용하게 울리며 계속해서 자리를 이동해갔다.

현재 화장실에 남은 것은 에반이었다.

활짝 열린 몇 개의 문을 지나쳐 맨 끝의 자리에 굳게 닫힌 문을 본 그의 입술이 길게 휘어졌다.

수상할 정도로 조용한 그 안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을 루카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그는 목 안에서 낮게 울리는 웃음소리를 억누른 채로 태연히 손을 들어 문을 노크했다.

그 노크음은 루카스가 하던 음을 그대로 모방하여 간결하게 세 번 울렸고, 안에서 답이 없자 다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여 한 번 더 울려퍼졌다.


"루카스? 너 왜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 거야."

"......."

"내가 들어가는 게 좋을까, 네가 나오는 게 좋을까? 셋 셀테니까 둘 중에 하나 선택해."


어째서 화장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걸까, 루카스는 얇은 문 하나를 경계로 대치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생각하는 도중에도 에반의 잔혹한 입술에서는 숫자를 세는 소리가 들렸고, 멈추지 않고 가속되는 심장의 빠른 박동에 가슴이 괴로워져 루카스는 두통이 느껴지는 머리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쾅! 카운트가 끝나고 난 뒤로 울린 커다란 굉음에 눈이 번쩍 뜨인 루카스는 아직까지 얕게 진동하고 있는 화장실의 문을 보고 에반이 그곳을 걷어찼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림자가 한 번 멀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한 번 큰 굉음이 울렸다.

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가차없는 발길질이 연속해서 이어지자 루카스의 머릿속은 새하얀 백지장처럼 변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그만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를 지른 루카스는 문을 차던 발의 움직임이 멈추자 조심스럽게 잠금 장치를 풀어 문을 열었다.

에반은 즐거워보였다. 지친 기색은 없었고, 오히려 문을 부술 때까지 발길질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한 개만 선택하라고 했더니 두 개 다 선택했네."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왜라니, 너랑 더 가까워지고 싶은데 네가 자꾸 피하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온 몸이 떨리는 것이 분노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것은 굳이 따지지 않아도 될 만큼 루카스의 마음은 다양한 감정으로 복잡한 상태였다.


"그나저나 화장실에 들어왔으니 볼일은 보고 가야되겠지?"

"응?"

"내가 한가지만 선택하라고 했는데 두 개 다 선택했으니까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뒷 말은 듣지 않았지만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부탁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그가 하는 말은 절대적이라는 것을 루카스는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보는 앞에서 볼일 보면 오늘 있었던 일은 용서해줄게."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고 싶지 않아 귀를 막았지만 루카스의 몸은 이미 심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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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5-01 20:52 | 조회 : 1,172 목록
작가의 말
거짓말너구리

다음화는 아마 클린x로 찾아뵐 것 같네요ㅎㅎ 하트주시고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그럼 저는 내일 다시 찾아올게요! 좋은 밤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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