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1-2

"왜 그렇게 못마땅한 얼굴이야? 오랜만에 보는데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


침묵으로 일관하는 제임스를 보고도 에반은 별다른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는 그저 와인잔에 새 와인을 채워넣고, 그릇에 놓인 치즈를 뒤적이기만 할 뿐 공격적인 언행은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 태연한 모습에 더욱 큰 두려움을 느꼈다.

그의 경험상 에반은 화가 나면 괜히 다른 일들을 하며 잠깐 생각을 정리하다가 갑작스럽게 언성을 높이는 등의 돌발행동을 하곤했다.


"루카스, 널 그렇게 떠나보내고 내가 몇 년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 아마 짐작도 못할거야. 넌 원래부터 감정에 둔했으니까."

"........"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들였지만 결국 널 찾아낼수는 없었어. 네가 더러운 노숙자가 되어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그래서 괜한 엘리엇 가문만 들쑤시고 다녔지."


에반의 눈썹이 꿈틀거린 것과 동시에 제임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한 때는 미국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부를 가지고 있던 엘리엇 가문이 제임스가 사라진 이후 급속도로 가세가 기울어 지금의 보잘 것 없는 위치까지 떨어진 것은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 사건의 원인이 된 에반이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 일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제임스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주먹을 꽉 쥐었다.


"루카스, 이제 길거리에서 사는 건 지긋지긋하잖아. 카일한테도 버림받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생각은 해봤어?"

"착각하지마. 당장 내일 길바닥에서 로드킬당한다고 해도 너한테는 절대 안 돌아가."

"이제야 입을 열었다고 좋아했더니 예쁜 입술로 나쁜 말만 하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기척에 황급히 몸을 뺐지만 결국 손이 붙잡힌 제임스가 저항하자 에반은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손목이 아릿하게 아파와 인상을 찌푸린 제임스의 시선에 에반의 눈동자가 강렬한 색을 품은 채 다가왔다.


"더러운 얼굴 치워."

"매몰차네. 전에는 조금 더 귀여웠는데. 반항하는 모습도 귀엽지만 나는 네가 순하게 복종하는 게 더 귀여워."


마지막 말이 귀에 들어오기도 전에 제임스의 몸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에반은 침대 위에 몸을 누인 제임스의 위로 몸을 포개 누웠고, 필사적으로 반항하는 팔을 잡아내어 머리 위로 올려 결박했다.


"몸은 복종해도 네 눈은 항상 그렇게 불만스러웠지."

"이거 놔."

"그렇게 노려봐도 어쩔 수가 없어. 이미 이렇게 돼버렸으니까."


아랫배 쪽에 느껴지는 딱딱한 무언가의 감촉에 제임스는 이성을 놓기 직전이었다.

위아래로 겹쳐진 몸을 부비며 웃음 짓고 있는 에반은 이미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고, 어둑한 조명이 깔린 방의 분위기는 더운 숨결을 내뱉는 그에게 잘 맞았다.


"비켜."

"그렇게 노려봐도 변하는 건 없어. 네가 다시는 내 곁에서 떠날 수 없게 지금 여기서 널 안을거야."


나른한 말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에 제임스의 몸이 움찔하며 반응했다.

한 손으로 제임스의 두 팔을 결박한 에반이 남은 한 손으로 셔츠의 단추를 느긋하게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곧 바깥으로 드러난 제임스의 여린 살결이 에반의 손에 닿아 미세하게 경련했다.

이런 상황이 될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못 만난만큼 조금의 대화를 하고, 대화를 하며 다시는 찾아오지 말아달라며 원하는 말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임스의 바람과는 달리 대화는 이미 단절되었고, 분위기는 이제 더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야릇해져 에반이 이대로 물러설 것을 기대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제임스는 자신의 안일함을 뒤늦게서야 자책했다.


"뭐야. 왜 이렇게 떨어? 내가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너도 좋아하잖아?"

"이상한 소리 하지마. 나는 동의 안했어. 너한테 만져지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데 내가 좋아한다고? 착각도 적당히 해."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깨물어 겨우 말을 이어낸 후에 가까이 다가와있던 에반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끈적하게 붙은 침이 볼 선을 따라 조금씩 흘러내렸다.


"대담하네. 나한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애인지 몰랐는데 알면 알수록 매력적이야."

"미친놈."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모르는지 에반은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는 제임스가 몸은 결박당하더라도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에 남모를 희열을 느꼈다.


"만약에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하면 넌 어떻게할래?"

"웃기지마. 이제 그딴 거짓말에 안 속아."

"하하, 그렇겠지. 그래야 맞는거지."


쓴웃음을 지은 그의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그 눈에 온전히 제임스의 모습을 담아내었다.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면 금세 눈물을 글썽이던 제임스가 이제는 매마른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낯설어 잠깐 망설인 그였지만 그는 곧 다시 비어있는 손을 움직여 제임스의 살갗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감기는 하얀 속살에 입을 맞춘 후에 제임스의 입술에 키스할 수 있기를 바랐던 바람과는 무색하게 그가 계속해서 고개를 돌려버리는 바람에 입술은 좀처럼 맞지 않았다.

에반은 제임스의 양 손을 구속하던 손을 놓고, 이번에는 계속해서 움직이던 턱을 잡아 자신의 얼굴과 정면으로 맞췄다.


"이제야 시선이 맞네. 사랑해 루카스."


에반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제임스의 입술에 가만히 입술을 대었다.

제임스는 일말의 표정변화도 없이 그 비틀린 키스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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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4-10 23:39 | 조회 : 1,398 목록
작가의 말
거짓말너구리

새로운 파트를 시작하게 되었네요. 제임스의 과거 이야기로 이루어진 세 번째 파트도 중도포기 없이 잘 따라와주시리라 믿습니다ㅎㅎ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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