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1-1

따사로운 아침 햇살은 추운 겨울의 눈을 녹이며 천천히 지상으로 발을 내렸고, 그 밝은 빛에 이끌리듯 눈을 뜬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따스한 호텔의 침대에서 하루를 시작한 제임스에게도 오늘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있었고, 그는 눈을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굳어있던 몸을 일으켰다.

카일에게 작별을 고하고 무작정 바깥으로 나온 제임스가 오늘이라는 날을 살아있는 채로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넥타이 핀을 팔아 돈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제 전과 같은 무모한 행동으로 인해 자신을 버리는 일은 할 수 없었기에 카일이 사 준 물건을 팔았고, 예상 외의 비싼 값으로 돈을 받게 되어 청결하고 잘 정돈된 호텔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제임스는 어제 입었던 양복을 그대로 입은 채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혈색 좋은 얼굴에 벌겋게 달아오른 눈 밑의 울음이 아직까지도 남아 그는 서둘러 몸을 씻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카일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나를 찾고 있지는 않을까, 혹시 나를 완전히 마음속에서 지워버린 건 아닐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의 부유물이 되어 떠올랐다. 제임스는 어제의 매몰찼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이마를 세게 쥐어박고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를 그리워한다고 해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카일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과거와 연을 끊는 일밖에는 없었다.

어제 입었던 양복 주머니 속에는 익숙한 글자로 쓰인 전화번호와 이곳에서 멀지 않은 호텔의 주소가 적혀있었고, 제임스는 그 종이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것은 분명 에반이 남긴 것이었고, 주소를 적어놓은 이유는 그곳으로 찾아오라는 무언의 압박임이 틀림없었다.

에반은 예전부터 타인의 위에 군림하기 좋아하는, 전형적인 지배자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언가에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임스의 경우는 달랐다. 에반은 무슨 수를 써서든지 그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했고, 그것은 둘의 관계를 악화시켜갔다.

제임스가 가진 과거의 대부분은 모두 에반에 대한 안좋은 기억으로 가득했다.


출근시간의 겨울 아침은 추위도 모른 채 빠르게 지나갔다.

바쁜 걸음으로 걷는 사람들 중에 홀로 느릿느릿 걷는 제임스는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손에 쥔 그 작은 종이조각이 너무도 무겁게 느껴져, 그는 벌써 몇 번이고 걸음을 멈췄다가 걷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는 걸음은 멈출지언정 걸음을 뒤로 옮기지는 않았기에 점심 때쯤에는 종이에 적힌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왜 택시를 타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그는 분명 말 없이 눈을 흘겼을 것이다.

이곳까지 제 발로 걸어온 것만으로도 그는 칭찬받을만한 일을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호텔 내부는 그가 오늘 아침까지 묵었던 호텔과는 비교도 못할만큼 화려했고, 눈이 부셨다.

곳곳에 세공된 웅장한 조각상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지만 하나같이 매니악한 형상이었기에 제임스는 눈썹을 찌푸렸다.

카운터에 방 호수를 말하자, 호텔 직원이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에반이 묵고 있는 방으로 안내했고, 제임스는 별다른 저항없이 따랐으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거세게 뛰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생각해 놓은 것은 없었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예상조차하지 못했기에 그는 불안한 듯 손가락을 움직이며 눈동자를 굴렸다.


"여기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직원은 안내를 마치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갔다.

홀로 남은 제임스는 괜히 방 호수를 다시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심호읍을 했다.

에반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지 몇 년이나 지났건만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생생한 그 얼굴은 아마 이 이후 몇 십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것이 뻔했다.

노크를 해야 할까? 순식간에 스쳐지나간 생각에 몸이 멈춘 제임스는 더이상 다른 것은 생각하지 못한 채로 가만히 문고리를 응시했다.


''''너는 노크하지 말고 그냥 들어와.''''


가만히 멈춰 선 제임스의 머릿속에 몇 년전의 따스했던 여름 날의 기억이 스쳤다.

점심 이후의 나른한 오후, 에반은 홀로 과학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고, 점심을 먹지 않는 제임스는 누구보다 빠르게 과학실로 향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에반은 노크하지 않는 사람을 가장 싫어했고, 그 때문에 교내에는 과학실에 들어갈 때에는 꼭 노크를 해야한다는 이상한 법칙까지 생긴 이후였다.

하지만 제임스에게만은 노크를 하지 말고 들어오라며 엄포한 그는 그 시간을 즐기는 것만 같았다.

예상치 못한 방문에 깜짝 놀라며 제임스를 맞이하는 것은 에반의 단조로운 일상에서 가장 기대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똑똑똑, 일정한 음으로 울려퍼지는 노크 소리가 넓은 호텔 복도를 울렸다.

제임스는 들어올렸던 손을 내려놓고 방 안쪽에서 들려올 대답을 기다렸다.

대답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간의 기다림 끝에 다시금 손을 들어올린 제임스가 다시 노크 소리를 내었지만 그래도 역시 방 안쪽은 조용했다.

에반이 심술을 부리고 있음을 예상한 제임스도 지지않고 더욱 크게 노크소리를 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에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항상 말했잖아. 노크하지말고 들어오라고."


어딘지 나른해보이는 얼굴로 제임스를 맞이하는 에반은 조금 심술이 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 방 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 제임스는 두꺼운 커튼이 쳐져 밝은 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실내의 분위기에 혀를 찼다.


"왜 그렇게 못마땅한 얼굴이야? 오랜만에 보는데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


침묵으로 일관하는 제임스를 보고도 에반은 별다른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는 그저 와인잔에 새 와인을 채워넣고, 그릇에 놓인 치즈를 뒤적이기만 할 뿐 공격적인 언행은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 태연한 모습에 더욱 큰 두려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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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4-10 23:35 | 조회 : 1,083 목록
작가의 말
거짓말너구리

너무 많이 늦었죠ㅠ 요즘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었어요ㅠ 저번화 댓글 남겨주신 Nickel님, 만나서반가워님 감사드립니다. 하트 주시고 한 번씩 읽어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두 편 올리고 갈게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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