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Y 6-2

"카일, 파혼하는 건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만 뒤처리는 모두 네 몫임을 알아두거라."

"네, 각오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라는 표정으로 리처드는 카일에게서 시선을 거둬들였다. 하지만 그는 아직 이 재미있는 상황에서 벗어날 마음이 없었다.


"카일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니, 내 생에 이런 일도 다 있군. 자네는 나랑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


리처드가 눈을 휘며 제임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절대 이대로 둘을 보낼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로베르트, 이 분을 내 방으로 모셔오거라."

"아버지! 제임스는..."

"네 연인이라는데 대화 한 번은 제대로 해야지. 너는 따라오지 말고 로버트와 이야기 하거라."


유연하면서도 강압적인 말투로 순식간에 카일의 기를 눌러버린 리처드는 로베르트와 제임스를 데리고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항없이 그저 따라가는 제임스의 손목을 급히 잡아낸 카일은 그가 리처드의 뒤를 순순히 따라가고 있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다급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제임스, 왜 가려고 하는 거예요. 제임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요. 다 내가 해야 할 일이예요. 지금이라도 빠져나가면 되니까 이리와요."


애원하듯 읊조리는 카일을 바라보며 제임스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입술을 꾹 닫았지만 곧 자신의 손목을 옭아맨 카일의 손을 망설임 없이 떼어내었다.

거절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카일은 당황한 듯 잠시 행동을 멈췄지만 제임스는 멈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아니요. 저는 끝까지 제 역할을 다할거예요. 이제 이건 제 일이기도 해요. 이번에는 도와주지 않아도 돼요. 저는 잘 할 수 있어요."


자신감있게 당당히 소신을 밝히는 제임스였지만 카일은 그것마저도 불안한 듯 다시금 제임스의 손을 잡았다.

간신히 잡아낸 손끝이 다시금 손안에서 멀어질까봐 카일은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몇 번을 붙잡아도 제 결정은 바뀌지 않아요. 나를 믿고 기다려줘요."

"제임스..."


조그마한 미소를 카일에게 보여준 제임스는 그의 손을 벗어나 리처드에게로 향했다.

카일은 이제 제임스를 잡는 것은 단념한 채로 로버트, 빅토리아, 콜린과 마주했다.

그들은 각자 다른 감정을 품고 카일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 모두에게 적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리처드와 로베르트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제임스는 방금 전 카일에게 보였던 당당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속으로 결의를 다졌다.

리처드는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업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그는 화술에 능했고, 때로는 능구렁이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그에 반해 제임스는 말주변도 없고, 이런 경험이 풍부한 것도 아니었다.

제임스는 리처드에게 도전하는 자신이 바위에 부딪히려는 달걀과도 같은 위치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감만큼은 가지고 있었다.

바위를 깨뜨리지는 못하겠지만 바위를 계란물로 물들이는 것 정도는 가능하기에 도전을 걸어봐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 현 제임스의 심정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로베르트가 문을 열고 둘을 안으로 들였다.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 테이블과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그 장소는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깔끔했고, 이질감마저 느낄만큼 기묘한 구조로 되어있었다.

이제껏 자신감에 차있던 제임스도 방 안에 들어가자 기가 눌렸는지 마른침을 삼켰지만 이미 나가는 문은 닫혀있었다.

재빠르게 문을 닫은 로베르트는 리처드가 앉을 자리의 의자를 빼주고 그의 옆에 서 있었고, 제임스는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자리에 천천히 기대앉았다.

제임스는 긴장하고 있었지만 최대한 여유로운 행동을 취하며 다음 순간 들려올 말을 기다렸다.


"자네 이름이..."

"제임스 와일드입니다."

"아니, 그 이름 말고 다른 이름 있지 않나."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눈썹을 들썩이는 리처드는 방금의 언급으로 인해 순식간에 땀으로 범벅이 된 제임스를 바라보며 즐거운 듯 미소지었다.

그의 눈에 비춰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임스는 마치 무서운 것을 본 사람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입술을 떨었다.


"제임스 와일드라... 17년 동안 써 온 이름을 버릴 정도로 그 이름이 탐났던 것은 아닐텐데 말이지. 안 그런가? 루카스 엘리엇."


파들파들 떨리던 제임스의 입술이 굳게 닫히며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제임스는 이제 더이상 떨지 않았다. 죽은 듯 빛을 잃어가던 그의 눈동자가 적의를 품고 눈 앞에 있는 남자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허허, 무섭군. 이름 한 번 말했다고 죽일 듯 쳐다보다니."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엘리엇가에서 아들이 실종되었다고 몇 달 동안 시끄러웠던 적이 있지. 열일곱살 된 아들이었지만 언론은 물론이고 그 존재자체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비밀리에 키워오던 아들이었는데 한 순간에 실종이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지."

"당신이 그걸 왜 알고 있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흥분해 열이 오른 듯 눈썹을 구기는 제임스를 바라보며 리처드는 괜히 뜸을 조금 들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내게도 변변찮은 아들이 있어서 말이지. 아, 물론 카일은 아니야. 재혼한 여자가 데리고 온 아들인데 틈만 나면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으니 나도 엘리엇 부부처럼 아들의 존재를 숨겼지."


계속해서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는 리처드의 멱살을 잡고, 사실대로 말하라며 협박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제임스는 전보다 더 험악해진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게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야."

"당신의 변변찮은 아들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혈통 좋은 엘리엇 가문에 태어나 사랑받고 자라던 루카스 엘리엇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인물이니 말이야."


들이쉬는 공기가 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현기증이 나 제임스는 머리를 움켜쥐었고, 리처드는 변람없는 목소리를 유지하며 다음 말을 이었다.


"자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인물이 숨겨놓은 내 아들 에반 크리스토퍼일세."


열일곱살의 어린 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그 이름을 제임스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제임스는 점점 빨라지는 심장의 박동을 억누르고자 가슴께에 손을 얹었지만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강한 거부감을 느끼며 숨을 잘 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는 목을 옭아매던 손길이 피부 깊숙한 곳에 느껴져 제임스는 몸을 떨었다.

4
이번 화 신고 2019-03-20 19:37 | 조회 : 1,027 목록
작가의 말
거짓말너구리

벌써 수요일이네요! 과거피폐물 키워드가 드디어 쓰이게 되었습니다! 제임스의 과거가 좀 복잡해요ㅜ 저번주 댓글 주신 에붸벡님, 만나서반가워님 감사드리고 하트주시고 읽어주신 독자님들도 감사합니다!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