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두 개인 이유(4)

"반나절이라고 해봐야, 이제 정오다."

반 랜드레이는 물통을 살짝 흔들어보더니 뚜껑을 열어 한 번 더 확인했다.
반응이 영 시원치 않은 걸 보면 텅텅 빈 모양이었다.

그 녀석의 말대로 반나절이라는 표현은 조금 과장된 걸지도 모른다. 특별한 일 없이 평범하게 시작한 하루라면 정오를 훌쩍 지났을 것 같은데 그림자는 길어지긴 커녕 한껏 짧아져 있었다.

이렇게 해가 높이 떠있을 때 야외 활동을 하는 건 그다지 권장할 바가 되지 못했다. 특히나 산을 오르는 건 더더욱.
게다가 팔라슈는 중턱에 들어서면서부터 조금씩 나무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여기는 해 피할 곳은 있으니 그나마 나은 것이다.

"시각이 중요하냐, 시간이 중요한 거지."

나는 말에게 매달려있던 작은 물통을 챙겨 어디론가 움직이는 반 랜드레이를 따라갔다.

"왜 따라오는 거냐."

녀석이 물었다.

"물 가지러 가는 거 아니야?"

나는 물통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딱 맞춘 것인지 반 랜드레이는 별 말없이 앞을 보고 걸었다.
흙보다 바위가 많을 뿐이지 팔라슈는 메마른 곳이 아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우리는 샘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닥. 아니, 큰 바위인가? 바위가 갈라진 흔적 같기 도하고 아님 큰 바위가 여러 개 모인 것 같기도 한 웅덩이에 맑은 물이 고여 있었다.
악취가 나거나 의심스러운 이물이 떠다니지도 않고... 딱 봐도 먹어도 될 거 같이 생겼다.

"안 뜨고 뭐하냐."

반 랜드레이는 벌써 그 앞에 앉아 물통을 샘에 담구고 있었다.
사람 물 뜨는 것까지 재촉을 해대나. 내가 의도적으로 굼뜨게 행동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먹고 탈나면 안 되니까, 확인은 좀 해야지."
"척보면 알잖아. 밑에서 올라오는 물이다, 빗물 같은 게 고인 게 아니야."

아유, 너 잘났다 그래.
그래도 스칸달른 용사님께서 그러시니 나는 쪼그리고 앉아 냉큼 물을 담았다.

"이제 얼마나 왔어?"

나는 물통을 잠그는 김에 또 한 번 말을 걸었다. 내가 길을 찾을 땐 왜 물어보나 싶었는데 남을 따라가니 물어보게 된다는 게 새삼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조용히 있는 게 조금 어색했다. 그건 이상한 일이다. 나는 이 녀석과 딱히 나눌 말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면 그렇게 조용히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우스운 건 그렇다고 반 랜드레이와 했던 대화의 내용이 기억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정신없이 싸우기만 했던가.

"팔라슈는 말편자 모양이다. 우리가 동쪽부터 오르기 시작했으니 이 능선을 넘어가면 안으로 감싼 부분이 나와. 표시는 그 쪽에 새겨져 있다."

아... 그렇다는 얘기는 결국.

"산을 넘어서 가야 한다는 거구나."
"싫으면 돌아가던지."

"돌아가면, 비셔스 경은 네가 막아줄래?"
"그럼 군말하지 말고 따라 오던지."

"내가 언제 군말을 했냐."
"산타기 싫은 거 같은데?"

그 이야기엔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넘어가야 되는 거구나아, 한 거지 싫기는 무슨."

거기다, 넘어서 가지 않는다면 다른 선택지로는 아예 팔라슈의 능선을 돌아 지나 안쪽으로 가는 것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 여정이 가로질러 넘는 것보다 더 끔찍할 거 같았다. 심지어 그것도 들어가서 산을 올라야하는 건 똑같지 않은가.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덜 힘든 게 낫겠지.

나랑 반 랜드레이가 다시 애들이 있는 곳에 합류했을 때, 다른 애들은 저 마다 바위 위에 모여 앉아 빵조각을 찢어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상태 안 좋던 레샤만 흰 바위 위에 가지런히 뉘여 있었다.

전부터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왜 얘들은 항상 저런 위치를 선정하는 걸까.
딱히 잘못되었다고는 집어 말 할 수는 없겠는데 왜 미묘한 느낌이 드는 저런 자리를...

"어디 갔다 오셨어요?"

에반젤린이 먼저 물었다.

"응? 물 가지러."

내가 말을 안 했던가?

"아, 레이크! 그 물, 나도 줘."

에반젤린의 옆에 있던 야우라가 두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물통 던져달라는 거다.
나는 원하는 대로 물통을 던져주었다.
야우라는 조금 높게 던져진 물통을 어떻게 떨어뜨리지 않고 끈을 잡아 잘 받아냈다.

그 자리에서 입 안에 물을 퍼부어 먹어보던 그 애는 입을 슥 닦아내더니 그걸 가지고 누워있는 레샤에게 갔다.

"레샤, 이제 좀 일어나 봐."

야우라가 몇 번 불러봤지만 레샤는 일어나는 대신 이상한 중얼거림만 흘렸다.
대충 알아듣자면 '조금만 더...' 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아직도 상태가 그렇게 안 좋은건가.
뭐 잘못 주워 먹었나?

"음... 상태가 좋지 않군."

사뭇 진지하게 판단을 내린 야우라는 갑자기 물통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는 쪼르르 물을 얼굴에 흘렸다.

난데없이 물벼락을 맞은 레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것도 한 번 뿌리고 마는 게 아니라 조금씩 흘려대는 통에 얼굴을 흔들며 질색을 해댔다.

"야, 왜 애를 괴롭혀?"
"이러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서."

"낫긴 뭘 나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왜에? 그러는 레이크 넌 식물이 시들면 뭘 해주는데?"
"얘가 무슨 식물이냐?"

"레샤 정도면 충분히 초식이지."
"초식을 풀을 먹는 거고."

"나도 알아. 그만큼 비슷하다는 얘기지."
"뭐가 비슷하다는 거야."

"잡아먹힌다는 거? 히히힣."

야우라는 성글성글하게 웃으며 계속 물을 뿌렸다.
결국 참다못한 레샤가 소리쳤다.

"뭔가요, 대체...! 뿌릴 거면 한 번에 뿌리던가...!"

그 다음엔 벌떡 일어나다가 물통을 쥔 야우라의 손과 박치기했다.
비명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에떼...! 뭣...!"
"아야야야!"

머리를 부딪친 앤 그렇다 쳐도 손 부딪힌 애는 왜 아파하는지 모르겠다.

"뭘 잘했다고 아파해."
"아아... 새끼 손가락 부딪혔단 말이야아...! 사제니임...!"

야우라는 하늘에 대고 목 놓아 에반젤린을 불렀다.
엄살도 그런 엄살이 없건만 결국은 에반젤린이 와서 둘 모두의 상태를 봐주었다.
뭐, 당연한 얘기겠지만 둘 다 큰 상처는 없었고 '괜찮아요, 괜찮아. 다 괜찮아요.' 한 번씩 듣고선 안정을 취하라는 얘기만 듣게 되었다.
그래도 물을 준 덕분일까 레샤는 기력을 회복하고 얌전하게 야우라랑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모습 보고 있기도 참 뭣해서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우연찮게 반 랜드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에 같잖은 걸 보고 있다는 기색이 잔뜩 들어있다.

이럴 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여러모로 좋았다.
왜냐하면.

"그냥 다 집에 가라. 아, 플라나 사제는 빼고."

굳이 뭘 하지 않아도 그 쪽에서 뭐라 해올 테니까 말이다.
사람은 참 이상했다. 가끔은 자기가 한 게 아닌 일에도 창피해질 때가 있다. 지금의 내가 그랬다.
그렇다하더라도 들을 말과 못 들을 말 구분 못하는 건 아니었다.

"거기 내가 왜 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리고 에반젤린은 왜 괜찮은 건데. 너... 진실을 알고 나면 깜짝 놀랄 걸?"

플라나 사제님의 진실을 말이다.

"니들이 플라나 사제하고 똑같아? 아니. 사제가 훨씬 낫지. 회복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어디서든 환영 받는다."

그 말을 들은 야우라가 에반젤린을 껴안았다.

"아니! 우리랑 에반젤린은 한 세트야!"
"맞습니다...! 그렇다고요...?"

뒤에 숨어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만 들리는 레샤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그렇죠...? 사제님은 우릴 버리지 않을 거죠...?"

그것도 잠시 선회해 덧붙였다.
어떤 마음인지 이해는 하겠는데 약간 궁금한 부분도 있었다.

"근데 그렇게 한 세트면 너무 한 명한테 집중되어 있지 않냐?"

문득 그런 생각이 든 나는 솔직하게 물었다.

"뭔가요...? 나중에 레이크는 끼워달라고 해도 안 끼워줄 겁니다...? 안 끼워줄 거라고요...!"
"넌 일단 나와서 말해!"

"네에? 그럼 레이크님이 너무 외롭잖아요..."

에반젤린이 당황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른 애들을 얼렀다. 얼렀다고 할까.
근원적인 얘길 하자면 그런 배려 필요 없는데.

"안 묶여! 난 거기 안 묶일 거라고!"
"아... 그러시구나... 레이크님은 이제 절 버리고 가시려고..."

"왜 버리고 간다고 표현을 해?! 우리 서로 제 갈 길 걷자는 거잖아!"
"레이크님이 걷는 길이 곧 제 길인걸요."

"그게 뭐야, 너무 부담스러워서 걷다가 땅에 뿌리박히겠다!"
"그럼 거기에 정착하시더라도 저는 함께..."

농담의 무게가 천근만근이다.

"사제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냥 제가 그 쪽에 묶일게요."
"묶인 김에 그냥 다 같이 집에 가라."

한 숨 섞인 반 랜드레이의 말이 그렇게 아니꼬울 수가 없었다.

"네가 내 편 들어줄 거라고 난 전생에도 현세에도 심지어 내세에서 조차 상상도 안 해봤어!"

받아칠 말은 준비되어있던 것처럼 튀어나왔다.
어쩐지 이런 식의 공격엔 익숙해진 느낌이다.

"흥, 이제 다 팔팔해진 거 같은데, 출발할까? 챠라!"

반 랜드레이는 멀찍이 앉아서 말을 지키고 있던 챠라를 불렀다.

"왜요? 재미있는데 좀 더 보다가지."

챠라는 턱을 괸 자세 그대로 꿈쩍도 않고 실실 웃었다.
그 때 말문이 막힌 반 랜드레이의 얼굴이 참 볼만했다.


어쨌거나-

플라나 사제 세트와 스칸달른 용사 세트는 다 함께 팔라슈를 넘을 수밖에 없었다. 사이가 좋지는 못해도... 아니 솔직히 반 랜드레이와 나만 사이가 좀 안 좋은 거지만, 아무튼 함께 가야했다.

산의 정상이 끝이 아니라 거기서 또 건너편으로 넘어가야한다는 소리에 레샤는 벌써 의욕을 잃었고 에반젤린은 웃기는 하는데... 웃기만 했다. 야우라조차 기세 꺾인 것인지 말을 나한테 맡기고 레샤랑 놀고 있었다.

후미에서 보니 소풍가는 애들이 따로 없다.

좋겠다, 좋겠어.

사실 나도 그냥 노는 기분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원인과 과정이야 어떻든 이건 비셔스 경이, 내가 월세를 낼 수 있는 원동력을 주는 사람, 이 시킨 일이었고 마냥 서있기만 한다고 해결되는 일도 아니었다.
이번 일은 반 랜드레이가 케이드린을 찾아야 끝난다.

가능하면 빨리 찾아서 얼른 얼굴 안 보는 게 서로 좋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속앓이를 씹는 사이 챠라가 말을 걸어왔다.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걱정이 되나봐?"
"걱정이요? 아, 걱정이라기 보단..."

특별히 속 시원하게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말을 돌려보기로 했다.

"그런데 챠라는 뭘 그렇게 보는 거예요?"

딱 봐도 챠라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건 알고 있었지만 뭐랄까, 주변을 계속 둘러보는 것이 뭔가 찾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직업병이라던가.
왜 그런 거 말도 있지 않나,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예? 아... 아무것도..."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는 새 챠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능글맞게 미소 지었다.
뭔가 약간 숨어서 보거나 몰래 봐야할 거 같은 그런 낯간지러운 기분이 드는 표정이다.

"길을 찾고 있는 거예요. 내가 맡은 일은 그거니까. 돈 벌어야죠."
"길은 앞에 저 녀석이 찾고 있잖아요."

지도는 반 랜드레이가 가지고 있지 않느냐, 나는 그렇게 말했다.

"어머, 내가 찾는 건 그런 길이 아니라... 그래, 저런 거."

챠라는 저 먼 곳을 가리켰다.
그곳엔 약간의 수풀과 나무, 그리고 그 사이로 아주 작은 부분만 보이는 흰 절벽이 보였다. 어쩌면 그냥 바위일 수도 있었다.

내 눈이 잘못된 건가.

"저게... 길이라고요?"
"그게 쉽게 보이면 내가 돈 벌겠어요? 반! 찾았어요!"

귀엣 가에 속삭여지는 영문 모를 소리에 벙찐 사이에 챠라는 내 어께를 쓰다듬으며 지나쳐 앞으로 갔다.
뭔가 얼떨떨하다. 사람 넋을 들었다 놨다 하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또 싫지는 않은 게... 어!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품 안에 지갑을 확인해봤다.
다행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뭐하세요?"

그 순간에 목소리가 들릴 게 뭐람.

"아니! 내가 의심을 왜 해요!"

일단 소리치고 봤던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에반젤린이라는 걸 알고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어후..."
"왜 그렇게 놀라세요?"

에반젤린은 뭔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내 이모저모를 뜯어봤다.

"아니, 그냥. 갑자기 말을 걸어서..."
"으으음...?"

그 눈길은 한 동안 거두어지지 않아서 나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선두 쪽에 합류했다.
챠라가 발견한 건 제법 큼지막한 동굴이었다.
나는 안 보였는데 찾아가니까 정말로 있다.
각도와 높이의 차이일까.
챠라는 다리가 긴 만큼 키가 컸다. 나보다 머리 반개 정도? 어쩌면 그게 풍경에 굉장히 큰 차이를 주는 걸지 모르지.

"근데 이 동굴이 왜?"

나는 유심히 지도를 살펴보고 있는 반 랜드레이에게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케이드린이 저기 있어?"

광물이라니까 동굴이나 지하 같은 곳에서 나오는 게 자연스럽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야. 안 들리는 건 좀 너무하지 않냐?"

한 번 성을 내자, 반 랜드레이는 드디어 내리뜬 눈으로 이쪽을 보았다.
그리고는 짓이겨 말했다.

"뭐가 궁금한데?"
"저 동굴이 뭐냐고."

"말하면 네가 알아?"
"모르니까 듣는다, 왜."

"지도에는 산 정상을 오르지 않아도 통과할 수 있는 길이 하나 나와 있는데 그게 저건가 확인해보는 거다."

아 뭐야, 그런 거였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아아, 미안미안. 계속 노력해줘."

편하게 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데 방해하는 건 죄악이었다.

잠시 그렇게 더 지물과 지도를 비교해 가면서 보던 반 랜드레이는 불현듯 지도를 꽉 움켜쥐어 꾸겼다.
아니라서 화났나?

"좋아, 저기로 들어간다."

아닌 모양이었다.
참 반응 한 번 헷갈리게 한다.

갑자기 진로가 바뀌어 동굴로 들어간다고 하니 바로 레샤부터 반응이 나왔다.

"왜... 왜... 멀쩡한 길을 놔두고 저런 데로 가는 겁니까...? 우리에겐 태양이 있잖아요...! 왜 어둠의 자식들 마냥 동굴을 찾아 들어가는거냐고요... 예...? 왜...!"

싫은 건 알겠다. 그건 잘 알겠는데.

"말 좀 해봐요, 레이크으...!"

왜 나한테 그러는 거냐고.

"좀 참아, 저기로 가면 거리가 반으로 줄어든다잖아. 네 말마따나 저울에 재는 거지."

어두운 데로 갈래, 아니면 더 오래 걸을래?
어느 쪽도 선택하기 쉽지 않을 때는 남의 결정따라 가는 게 마음 편했다.

그 사이 반 랜드레이가 나한테까지 왔다.
무슨 할 말이 있어보였다.

"왜?"
"앞장서라, 레이크 아이힐데른."

왜?
그 생각은 더 격하게 밖으로 튀어나왔다.

"왜에? 왜 나한테 그래!"
"넌 마법을 쓸 줄 알잖아. 섬광마법, 기억 안 나?"

반 랜드레이는 자기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에 결투 했을 때를 생각해보라는 거 같았다.
복수냐? 복수냐고.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반 랜드레이는 그런 녀석은 아니었다.

"왜? 왜에 그러는 거야? 우리 랜턴 있잖아아! 있는 걸 놔두고 왜 사람한테 그래? 내 이름이 무슨 랜턴 아이힐데른인 줄 알아?"

나는 레샤마냥 항변했다.
맨 앞에 서는 게 싫다는 게 아니다. 랜턴 대용으로 쓰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쯤 되면 하소연할 자격이 있다.

"기름은 소모되면 돌아오지 않지만 네 마력은 돌아오잖아."

간단하고 합리적인 이유에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근데 있잖아. 우리 중에 정령술...! 아! 아! 아아!"

정령술사도 있는 거 기억하냐고 말하려다가 옆구리가 두들겨지는 고통에 비명이 먼저 나왔다.

그 손을 어떻게든 붙잡아 떼어낸 다음, 나는 레샤에게 말했다.

"아잇 진짜! 알았어! 알았다고! 너 앞에 안 세우면 되잖아. 내가 맨 앞에 서줄게. 그럼 됐지?"
"엑, 저, 정말입니까...?"

이미 저질러놓고선 레샤는 미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 서 줄 테니까... 대신에 셀라임만 불러줘..."

그리하여 내가 맨 앞, 그 다음이 레샤, 그 다음이 레샤의 뒤를 노리는 야우라, 가운데에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는 사제, 에반젤린이 서고 챠라 반 랜드레이가 후미를 지키게 되었다.

언뜻 용사님께서 뒤로 내뺀 것처럼도 보이지만, 이런 곳에선 사실 앞보다 뒤가 더 위험했다. 빛도 멀고 상황을 빨리 알 수 있는 앞에 비해 정보도 느리다.

그렇대도 설마 자연동굴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을라고.
게다가 셀라임의 빛이란 색은 구분이 되지 않아도 비추는 범위 자체는 내 마법보다 더 넓었다.
저번처럼 앞뒤 없이 달려 나가지만 않으면 밑으로 꺼질 일도 없다.

"레이크...! 너무 빨리 가지 마요...!"

레샤가 내 옷자락을 뒤로 잡아당겼다.

"야, 이게 내 평범한 걸음걸이야."

정말 그랬던지라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이런 데선 좀 천천히 가야지. 발밑을 조심해야 하잖아."

야우라가 야우라답지 않게 제대로 된 말을 했다.

"그래요, 안전이 제일 중요하죠."

에반젤린도 덧붙이고.

"앗잇! 야우라아...! 뒤꿈치좀 그만 밟아요...!"
"레이크가 발이 빨라서 그래."

"그게 왜 내 탓이야!"

그냥 말을 말지.

동굴은 특별한 것 없이 한 길이 쭉 계속되었다. 챠라마저 별 말 하지 않는 것 보면 내가 놓친 것도 아니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아주 평탄하고 물기도 많지 않은 동굴이었다. 막힌 공간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조금 나긴 하지만 뾰족뾰족한 돌들도 없고 먹을 만한 버섯도 많이 보인다.

이야, 쿤투아마 아저씨가 여기 있으면 아주 풍족하고 편하게 먹고 살겠는데.

"킁킁..."

그런 실없는 생각이나 하는 동안 아까부터 귀에 거슬렸던 소리는 꽤나 커져있었다.

"킁킁... 크응..."

이게 무슨 소리야 도대체.

"야, 레샤. 코 좀 그만 먹어라. 내가 맨 앞에도 서줬잖아."

그 정도가 점점 심해져서 나는 뒤편의 레샤에게 핀잔을 주었다.

"뭔가요, 갑자기...? 그걸 왜 저한테 그러는 겁니까...!"

목소릴 들어보니 레샤는 아닌 거 같았다.

"너 아니야?"
"저 아니란 말입니다. 왜 저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역정을 내던 레샤는 아차 싶은 건지 다시 뒤쪽에 성을 내었다.

"야우라...! 장난치지 마요...!"
"왜에에, 왜 무슨 일만 있으면 나한테 그래? 너 그거 레이크한테 옮은 거지? 그치?!"

쟤도 아니란다.

"혹시 에반젤린이 흙먼지에 약한 거 아니야? 왜 그런 사람들도 있잖아. 꽃가루 맞으면 우는 사람들."
"어... 저는 그런 건 없는데요?"

야우라의 말에 에반젤린은 난색을 표했다.
우리 사제님도 아니고.

"챠라 자매님은 어떠세요?"

그 질문 직후 챠라는 평범하게 실토했다.

"미안해요, 반. 앞에서 하는 얘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방심하고 있었네?"

글쎄, 그 말은 초점이 조금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챠라...!"

반 랜드레이가 나와 싸울 때 이상으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을 짓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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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3-04 16:29 | 조회 : 663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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