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하루가 일찍 시작되었다. 반 랜드레이 녀석은 그냥 '일찍'이라고만 말했지 정확히 언제라고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 자식, 대외적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알고 보면 엄청 계획 없이 사는 게 아닐까.
약속 시간이 일찍이 뭐야, 일찍이.
딱히 언제 일어나야한다는 지표가 없다보니 언제 얼마나 빨리 일어나서 준비해야 하는지도 감이 안 잡혀서 늦잠을 자버렸다.
하하, 그래도 늦은 건 아니다.
우리는 시간 약속을 한 적이 없으니까. 녀석이 말한 일찍이 나에겐 지금 정도의 시간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애초에 시간을 딱 점지해줬으면 내가 자기 전에 여신님에게 그 때 일어나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겠지. 그럼 하늘도 감동해서 그 근처에라도 일어나게 해주지 않았겠느냐는 말이다.
...그래, 고해성사 하자면 에반젤린이 와서 문을 두드리지 않았으면 분명히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안 일어났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시간 약속도 에반젤린과 하기는 했지.
그래도 변명도 덧붙이자면 그건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밖에 하지 못하겠다. 누구든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추상적인 목적지를 가야한다는 생각 보다는 내일은 쉬는 날이라는 즐거움이 더 강하게 머릿속을 채워서...
"레이크님."
어렴풋이 에반젤린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응?"
나는 똑바로 대답하려고 했지만 대답은 이상하리만치 흐릿하게 나왔다.
"이제 눈은 뜨셔야죠."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걱정해주는 의미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 정도면 사람을 얕잡아보는 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아까부터 당당히 깬 정신으로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눈 뜨라니 너무하지 않나.
"어... 눈 뜨고 있어..."
"아아. 그 책, 가면서 읽으시려고요?"
음?
"나 지금 책 들고 있어...? 셔츠인줄 알았는데..."
듣고 보니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의 감촉은 천보다는 좀 더 딱딱하고 오밀조밀한 느낌이었다. 형태도 잘 유지하고 있고. 적어도 셔츠는 아니라는 거다.
상태가 안 좋은 건 간밤에 너무 설렌 나머지 도저히 잠에 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녁 잘 먹고 잘 잤던 거 같지만 일단 그랬던 걸로 해두자.
호수에 잠수라도 한 것처럼 흐리멍덩하던 머릿속도, 게슴츠레하던 눈도 조금씩 맑아지고 있었다.
나도 한다면 할 수 있다, 이거야.
요 근래에나 늦잠이 습관이 된 거지 고향에 있을 때는 제법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다. 조금만 신경 쓰면 이 정도는 별 것 아니다.
에반젤린의 도움을 받아 간단히 가방을 챙긴 나는 함께 방을 나서 복도로 갔다. 거기서 야우라와 레샤를 만났다.
아침잠엔 강한 덕에 비교적 말끔해 보이는 레샤와 달리 야우라는 레샤에게 반쯤 매달려 버티고 있었다.
자랑거리로 빠지지 않던 토파즈 빛의 머리칼도 헝클어져서 대충 빗다 만 티가 난다.
"으읏... 야우라...! 야우라가 가자고 했으면 이제 좀 일어나요...!"
레샤는 어떻게든 어께 위에 얹힌 야우라의 팔을 떼어내보려고 했지만 좀처럼 안 되는 듯, 힘겨워 보였다.
어제부터 그렇게 같이 가자고 난리를 치더니 결국 설득은 성공한 모양이었다.
본인이 상태가 좀 안 좋아서 그렇지.
완력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게 분명하다 생각한 것인지 레샤는 방법을 바꾸어 야우라의 팔을 잡고서 자기 몸을 밑으로 빼내 탈출에 성공했다.
순간적으로 지지대를 잃은 야우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쓰러질듯 말듯 발끝으로 겨우겨우 종종 뛰어 버틴 그 애는 단박에 잠이 깬 듯, 그러나 아직 정신은 못 차린 듯, 숨만 가쁘게 몰아쉬었다.
"허, 헉, 헉, 허, 허억...!"
그러다 불현듯 성을 내었다.
"레샤아! 심장 튀어나오는 줄 알았잖아...!"
"전 키가 거꾸로 자라는 줄 알았다고요...!"
그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질문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니들 뭐하냐?"
질문의 탈을 쓴 핀잔이지.
"오, 레이크. 어께 좀 빌려줘."
"싫어."
처음부터 내 의사는 관계없던 것인지 야우라는 다짜고짜 내 어께에 팔을 걸고 얼굴을 등에 기댔다.
그러고서 한다는 말이.
"가자."
"가긴 뭘 가! 네 몸 절반을 왜 내가 옮겨야하는데."
"뭐 어때. 반은 내가 제대로 옮기고 있잖아."
"내가 말했지. 너희는 몰라도 우리는 남녀가 이렇게 붙어 다니면 오해 받는다고."
"무슨 오해?"
무슨 오해냐고?
무슨 오해기는 당연히... 그... 저...
막상 말하려고 하니까 또 좀 그렇다.
"뭐겠어."
"뭔데?"
이 자식, 찬찬히 들어보니 이미 알아챘으면서 물어보는 거 같았다.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건 아주 중대한 싸움이었다.
내가 여기서, 뭐긴 뭐야 연인으로 오해받는 거지, 하고 말해 버린다면 야우라는 틀림없이 너나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며 부끄러운 거냐고 나를 놀리려고 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야우라에게 물리지 않고 떼어낼 수 있을까. 음...
"우선 가죠. 랜드레이 형제님은 이미 와 계실지도 몰라요. 야우라님도 금방 잠이 깰 거예요."
에반젤린은 방금 탈출극의 여파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레샤의 지팡이를 주워 챙겨 주며 말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출발부터 하기로 했다.
아, 시작부터 발걸음이 무겁다.
해는 이미 떠있었지만 그 높이가 낮은 이른 아침은 아직 푸른 공기가 가득했다. 너무 맑으면 가는 길에 너무 힘들지도 모르니 그 쪽을 기대한 건 안지만 이건 안개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관사 앞에서 만나기로 한 반 랜드레이는 챠라와 함께 훈련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환자는 필요 없다만."
반 랜드레이는 거의 어금니를 때지 않고 말했다.
인사말대신 고른 것치고는 적의가 다분하다.
시선이 내 등 뒤에 있는 걸로 봐선 무슨 의미인지는 뻔히 알 수 있었다. 알긴 알겠는데 나라고 해서 이러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건가.
잠깐 야우라를 깨울까 고민했던 나는 그냥 어께 위에 얹어져 있던 그 애의 팔을 휙 떼어냈다.
아무 걱정 없이 무게중심을 맡기고 있던 야우라는 갑자기 지지대를 잃자 매가리 없이 꽈당 넘어졌다.
"야!"
대번에 잠이 확 달아난 큰 소리가 튀어나온다.
"야는 무슨, 내가 여기 오면서 일어나라고 몇 번 얘기했냐!"
"이게 누님한테 하는 짓 좀 봐?"
"누님은 무스느악!"
내가 반응할 새도 없이 야우라는 제 다리로 내 다리를 걸고 그대로 몸을 일으켜 내 몸을 밀었다.
기습에 당한 내가 쓰러지자 연속으로 다리 꺾기가 들어왔다.
이상하게 꺾인 오른쪽 무릎이 뽑혀져나갈 듯이 아팠다.
"아, 아아...! 야야야야야!“
나는 괴성을 질렀다.
"하루에 세 번 놀라면 심장이 도망간다는 말 몰라?"
그래도 완력은 차이가 있는지라 버틸 수는 있었다. 버티는 것을 넘어서 잘 하면 역공할 수도 있을 거 같다.
"그럼 아직 한 번 남았네!"
나는 엉켜있는 야우라의 다리 중 왼쪽 것을 붙잡아 비슷하게 꺾어 보려고 시도했다.
"이게...!"
반격과 반격, 반격의 반격이 뒤섞여 결과적으로 서로 지친 우리는 한 바탕 끝난 것이라고 서로 느껴, 일어나서 옷가지를 털었다.
새벽녘부터 이게 뭐하는 짓인지, 더 수치스러운 사실은 반 랜드레이가 그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일단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 있기는 했는데 이쪽을 보는 시선이 영 곱지 않다.
"지도는 이미 받았다. 가지. 플라나 사제."
한참 그렇게 보던 반 랜드레이는 내가 아니라 에반젤린에게 말했다.
"야아! 그렇게 쳐다봤으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우리가 안 무안하지."
"그래에! 넌 너무 정이 없다고!"
나랑 야우라가 동시에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반 랜드레이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이제 그냥 무시하기로 한 거냐?
말없이 그렇게 가는 모습을 본 에반젤린이 녀석에 물었다.
"그냥 가시는 건가요? 지도는요?"
"벌써 받았다. 너희들이 늦은 거야."
"아하... 죄송해요. 랜드레이 형제님이 언제 오실지 몰라서 가능한 한 일찍 나온 건데..."
"변명은 됐고. 짐이나 실어. 자세히 얘기를 안 한 내 잘못도 있으니까."
반 랜드레이는 훈련장 안쪽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짐을 싣는다고?
그러고 보면 챠라는 말 두 마리의 고삐를 잡고 있었다. 그 중 한 마리의 안장엔 이미 이것저것 실려고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다른 한 마리의 것은 텅 비어있었다.
우리가 가져온 물건들은 전부 그 말의 안장에 실렸다.
갖은 식량이며 약소한 물품들을 올리다가 문득 깨달은 사실, 동시에 굉장히 창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냐?"
나는 넌지시 반 랜드레이에게 물었다.
케이드린이라는 광석이 있는 곳,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같은 말만 들었지 정확히 어디로 간다고는 들은 적이 없었다.
반 랜드레이는 대답보다도 먼저 챠라에게 눈짓을 주었다. 신호를 받은 챠라는 고삐 중 하나를 야우라에게 내밀었다.
짐을 실은 말 두 필을 혼자서 끌고 다니는 건 위험하긴 하다.
처음에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야우라는 무슨 좋은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씩 웃으며 고삐를 받았다.
뭐...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지가 좋으면 괜찮겠지.
반 랜드레이의 대꾸는 그 다음이었다.
"우선 출발부터 하지."
항상 그랬듯이 말투나 태도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누가 뭐래도 우리는 스칸달른 용사의 파티에 얹혀가는 쪽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임시로나마 용사님 파티에 끼게 된 것이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그 이야기에 따르면-
케이드린, 난 책에서도 본 적 없는 물건이다. 역리간섭을 감지해내는 신묘한 광물. 역리간섭을 감지한다는 건 마법이나, 정령술을 비롯해 모든 인위적인 현상을 간파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언뜻 듣기엔 굉장한 물건이지만 실제로 쓸모는 적을 것 같다. 그야, 마법은 같은 마법사가 알아채는 경우가 많고 예민하다면 마법사가 아니어도 알 수 있다. 애초에 마법은 한 눈에 보기에도 마법이다.
뭐, 세상 물건들이 전부 쓸모가 가득해서 존재했던가.
가끔은 희미한 것들도 있는 거지.
그 케이드린을 찾기 위해서 우리가 비셔스 경에게 받은 지도는 미크로셀의 남쪽, 그리고 남서쪽에서 서쪽 쭉 이어진 간이 지도였다.
그 지도에 따르면 케이드린은 서쪽에 있는 산, 팔란슈에 있었다.
당연히 가본 적은 없고 들은 적도 없는 곳이었다. 들은 적이 없다는 건 특별히 큰 마을 같은 게 있지는 않다는 의미다.
팔란슈는 척 보기에도 사람이 살지 않는 산지였다. 전에 성 세피스 수도원을 가면서 보았던 안카라보다는 작고 낮았지만 산지가 좁은 초승달 형태를 띠고 있는데다가 거진 바위산인지라 험준하고 폐쇄적이었다.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아는가.
"으으... 으..."
체력이 다 한 레샤가 내 뒤에 업혀 있다는 뜻이다.
아까부터 좀 쳐진다 싶더니 강한 척, 견딜 수 있다고 하다가 끝내 탈진이다.
"그러게 왜 온다 그랬어. 안 간다 그럴 줄 알았더니."
나는 정령술사라서 체력이 약하신 정령술사님에게 물었다.
"무게를 재본겁니다..."
대꾸는 조금 아리송한 얘기로 돌아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고 하니.
"여기 가는 게 더 힘들지... 아니면 야우라가 계속 치근대는 게 더 힘들지요..."
픽, 헛웃음부터 나왔다. 누가 그런 걸 그렇게 진지하게 비교한단 말인가.
그래도 레샤는 심사숙고한 끝에 후자가 더 힘들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완전히 빗나간 듯 싶지만.
"그러게 눈 딱 감고 거절했어야지."
나는 살살 웃으며 말했다.
비웃는 건 아니고 왠지 그걸 고민하는 레샤의 모습이 상상이 되어 우스웠다.
"야우라는 갔다 온 다음에도 계속 서운해 할 테니까요..."
"하긴. 걔는 그럴 수도 있겠다.“
서운해 할 뿐만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그 감정을 전부 표현하겠지.
귀찮기는 엄청 귀찮게 굴 것이다.
"그런 겁니다... 레이크는 그걸 감당할 수 있을 거 같습니까...? 야우라가 삐지면 상상 이상이란 말잇... 우읍...!"
뭔가 계속 말하려던 레샤는 갑자기 속 뒤집히는 소리를 내었다.
"으어어! 잠깐만! 알았어! 이제 아무것도 안 물어 볼 테니까, 아무 말도 하지마!"
쳐졌다곤 해도 그리 멀리 떨어지진 않아서 위쪽에 애들과 금방 합류할 수 있었다.
결국 완전히 녹초가 된 레샤는 말 위에 얹어지게 되었다.
혹시나 그 위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야우라가 잘 지켜볼 것이다.
선두에서 그 모습을 일일이 지켜보던 반 랜드레이가 한 숨을 푹 쉬었다.
"늘 부족한 게 인력이라고?"
녀석은 비셔스 경의 말을 이용해서 비꼬고 있었다.
비꼰 달까, 그냥 짜증이 난 것처럼도 보였다.
"쟨 정령술사니까 어쩔 수 없어. 그리고 딱히 늦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괜히 떠맡게 된 꼴이 되어버린 녀석의 입장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인색하게 구는 게 아닌가 싶었다.
"스칸달른에선 저렇게 뒤쳐지면 알아서 낙오한다. 그건 매정하다거나 끈기 없는 게 아니라 전략이야. 낙오자들끼리 무리를 만들어서 재정비하지 다시 합류할 수 있게 말이다."
"왕국에 와서 너희 문화를 강요하지 말아줄래?"
"흥, 1등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건 너희 왕국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그래, 심지어 반 랜드레이는 2등을 했는데도 프랭클린의 손을 놓쳤다.
한 번 더 비슷한 헛걸음 하고 싶지는 않겠지.
하지만 가끔 이 녀석의 행동력이란 조급함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아이고, 용사님. 아무리 그래도 반나절 내내 걸으면 누구나 지친다고."
반나절, 우리는 반나절 만에 지도 위의 X자 표식을 쫓아 팔라슈의 중턱에 들어온 것이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반 랜드레이는 후미를 향해 주먹을 높게 들었다.
"챠라! 잠깐 쉬었다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