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이 없어도 까먹어(4)

"다리? 이 다리?"

저가 제대로 들은것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야우라가 무릎을 들어보이며 영감님에게 되물었다.

"그래, 그 다리. 이 할아버지가 아가씨같은 미인은 처음봐서."

영감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당당하다. 너무 당당해서 오히려 거꾸로 질타할 수가 없었다. 분명 상황과 말만 들어보면 경비대 직행해도 전혀 문제 없을텐데, 그 당당함만으로 뭔가 오묘해졌다.

"다리가 궁금해요? 신기하네. 나이를 먹어도 호기심이 있구나. 뭐, 그래요."

하며 선베드 위에 다리를 펴 올려놓는 야우라.
난 손바닥으로 태연히 구는 그 애의 등짝을 후렸다.
살짝 젖은 옷이 넓게 펼쳐진 손바닥과 마주쳐 경쾌한 타음을 내었다.

"아! 왜 때려어!"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야우라는 선베드에 걸쳤던 다리를 다시 바닥에 짚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섰다.

"뭘 허락하고 앉았어!"
"왜에? 할아버지가 궁금하다잖아."

아니 궁금할게 따로 있지.

"넌 저게 궁금한 걸로 보이냐?"

나는 들리지 않게 윽박지르며 영감님의 모습을 새삼 다시 보도록 종용했다.
목 위, 얼굴만 보면 평범하게 웃고 있지만 그 아래를 보면 조금이라도 빨리 그 촉감을 느끼고 싶다는듯 스멀스멀 움직이는 손가락이 다가오고 있다.
그 손과 얼굴을 같이 놓고 다시 보면 그건 영락없는...

"그래에, 미지에 대한 열정이 보이네."

야우라는 목소리를 낮게 깔아 힘있게 말했다.
우리는 같은 걸 보고 서로 다른 열정을 느끼고 있는 거다.

"아,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네 마음대로 해."

본인이 저렇게 의지를 보이니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자, 뭐가 궁금한진 몰라도 만져봐요."

야우라가 다시 선베드에 왼쪽 다리를 걸쳐올려놓고 무릎을 두드렸다.
영감님은 다소 서두르는듯한 걸음으로 야우라의 앞에 서서는 경건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먼저 얼굴을 들이데고 뚫어져라 쳐다봤다.

"오오... 이 투명한 피부... 적당한 살집... 흘러내리는 물방울..."

어우... 뭔가 더 멀리 떨어지고 싶어지는 이야기.

차마 손을 대지 못하는 듯 거리를 두고 손을 놀리던 영감님은 이내 번쩍이는 황금을 어루만지듯 허벅지에 손을 가져다대어... 대기도 전에 야우라가 영감님의 얼굴을 걷어차버렸다. 오른쪽 다리를 축으로 삼아 몸통전체가 돌아간 제대로 된 돌려차기였다.

정강이에 얼굴를 제대로 직격당한 영감님은 그대로 뒤로 날아가 호쾌하게 나무바닥을 굴렀다.

"아야이...! 스읍...!"

차놓고도 부딪힌 데가 아픈건지 야우라는 깽깽이 발로 뛰며 정강이를 문질렀다.

"야 뭐야...!"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반응이 너무 늦게 나와버렸다.
무슨 함정수사도 아니고 지가 만지라 해놓고 막상 만지기도 전에...

"그렇게 걷어차버리면 어떡해!"
"어? 아니..."

저도 좀 과했다 싶은건지 야우라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말을 듣는 순간, 뭔가 기분이 확 나빠지는게... 나도 모르게 그만... 분명 칭찬 같았는데..."

그러시단다.
그보다는 저만치 굴러 쓰러진 영감님이 더 걱정이었다. 어디 부러지는 소리아닌가 싶을 정도로 큰 소리가 난 충돌이었는데 혹시 기절, 어쩌면 비명횡사를 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어! 괜찮아, 괜찮아, 아직 살아있어!"

야우라가 말했다.
그 애의 말대로 영감님은 조금 미동하나 싶더니 힘겹게팔을 들어올렸다.
도와달라는 건가?
영감님은 버티기 힘들어 부들부들 떨면서도 기어코 팔을 쭉 뻗었다. 그 손은 무언가... 무언가를 강하게 갈망하고 있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마ㄴ...!

그 말을 끝으로 영감님의 의지는 이내 꺾였다.


그리하여-
저수지 인공섬엔 두 명의 환자가 나란히 눕게 되었다. 한 명은 기면증, 한 명은 뇌진탕이다.
영감님은 얼굴을 제대로 맞은 탓에 코피가 터져서 우리가 대충 찾아낸 냅킨으로 양쪽 콧구멍이 모두 막아두고 벽에 바짝 기대어 머리를 세웠다. 숨 쉴 구멍이 좁은 탓에 가끔씩 숨 넘어가는 소릴 내긴하지만 가끔 그럴 뿐, 다행히 영감님의 삶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둘 중 먼저 일어난 건 헤세였다. 걔는 쓰러진 게 아니라 자고있던 거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였지만 햇빛에 누워서 일사병 걸리기 전에 스스로 일어나 다행이다.

헤세가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옆에 있는 영감님을 보며 기겁하는 거였다.
반응만 봐도 고용주라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뭐야, 이 양반 꼴이 왜 이래."

헤세는 당황하면서도 흘러 떨어지는 두건을 붙잡아 머리에 싸맸다.

"야우라가 날려버렸어."

해명해야할 야우라가 먼 산을 보기에 대답은 내가 대신했다.

"야아,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무슨 죽이려고 한 거 같잖아."
"거의 성공할 뻔 했지."

찡얼거리는 야우라와 놀리는 나는 저만치 제쳐두고, 헤세는 영감님을 깨우기 시작했다.

"어르신, 어르시인!"

어께를 두드리거나 마구 흔들어봐도 영감님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호흡에 맞추어 가슴이 부풀고 꺼지는 것, 딱 그만큼만 미동한다.

"이거 숨만 쉬지 죽은 거 아니야?"

영감님의 뺨을 두들겨보던 헤세의 말에 저만치서 지켜보던 야우라의 낯빛이 훅 어두워졌다.

"에이... 설마아..."

그러고는 아무래도 불안한 것인지 다가와서 손가락으로 영감님의 이마 한가운데를 눌렀다가 땠다. 그 다음은 코끝을 그 다음은 턱끝을 그렇게 한뼘한뼘씩 내려가며 가슴팍 한 가운데를 찔렀을 때였다.
코를 막고 있던 냅킨이 저절로 떨어졌다.
무슨 변화가 일어나나 싶어 움찔했던 우리는 다시 야우라가 영감님을 찔러보는 걸 구경했다.

"할아버지, 일어나봐요."

그 동안에도 반응이 없어서 야우라의 손가락은 배부근까지 내렸다. 그리고 배꼽으로 추정되는 부근을 찌르자 처음으로 반응이 왔다.
윽, 하는 아주 미세한 소리.

"어, 소리 났다!"

그게 재미 있는듯 신이 난 야우라는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눌렀다.

"으..."
"어..."
"음..."
"아..."

연거푸 이어지는 영감님의 소리. 영감님이 원래도 햇빛에 타 울긋불긋 까무잡잡해서 확신은 못하겠지만 묘하게 얼굴이 붉어진 것도 같다.
어쩐지 이거... 하는 의심이 들무렵 야우라가 영감님의 이마를 때렸다.

"응흐억...?!"

영감님은 별이라도 본듯 눈을 깜빡이며 번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리가 징그러."

야우라는 때린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또 다시 그리하여-

영감님은 아무 문제없이 건강하게 잘 걸어다녔다.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헤세에게 밀짚모를 가지고 오라고 한 것.
그 다음엔.

"헤세 녀석의 친구였구나. 할아버지는 이 저수지의 주인이에요."

영감님은 마치 손주를 대하듯 나긋나긋하게 말하며 야우라의 손을 잡고 말했다. 한 1초나 잡고 있었을까 그 손이 약간 더 위로 올라가자 야우라는 할아버지의 손목을 찰싹 때려 손길을 쳐냈다.

"아가씨 이름이 뭐라고?"
"야우라인데."

야우라는 그새 말을 낮췄다.
그도 그럴게 그간 빈정 상할 일이 여러번 있긴 했다.

"그래 야우라, 할아버지랑 이 저수지에서 나룻배 타지 않으련? 운치가 아주 좋단다."

영감님이 권유했고.

"싫은데."

야우라가 거절했다.

"어허허, 당차서 좋구나. 그래, 물놀이는 재미있었니? 이 할아버지랑도 같이 하지 않으련?"
"싫은데."

"어허허, 똑부러지게 말하니 좋구나. 그래, 때도 된거 같은데 할아버지랑 점심 같이 먹지 않으련?"
"......싫은데?"

망설였다, 분명히 방금 망설이는 기색이 있었다.

"어허허, 아직 배가 안 고프구나. 그럼, 쥬스는 어떠니?"
"내가 알아서 해먹을 게."

"어허허, 벌써 제 집처럼 지내니 좋구나. 그럼 다리 한 번 만져봐도 되겠니?"

할아버지가 물었고.

"저기요! 오랜만에 손주를 본 친할아버지마냥 말한다고 뭐든지 될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내가 치고 들어갔다.

"청년은 이름이 뭔가?"
"왜 안 물어보나 했네! 안녕하세요?! 레이크 아이힐데른이라고 합니다!"

"그래, 반갑구나. 헤세는 저 안쪽에 있으니까 들어가서 놀으렴."
"너무하시네 진짜!"

딱히 할아버지랑 배타고 싶지도 않고 놀고 싶지도 않고 점심먹고 싶지도 않지만 왠지 기분 나쁘네 이거.
내가 그 명확한 대우차이에 성을 낼 무렵, 밀짚모자를 찾은 헤세가 돌아왔다.

"어르신! 여기요."
"아... 그래, 고맙다."

영감님은 헤세가 건낸 밀짚모자를 살짝 덮어 썼다.
크림색 밀짚으로 한 층 더 인자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기게된 영감님은 뒷짐을 지고선 설렁설렁 선베드의 옆, 물과 만나는 경계선 지점에 섰다.

"아... 처량하다... 이 늙은이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이가 하나도 없다니..."

방금 헤세 시켜서 모자 받아놓고선 한다는 소리가 그거였다.
하늘에는 나는 새 한 마리 없는데도 영감님은 하늘의 저 먼발치를 보며 계속 한탄했다.
그 모습이 금방이라도 바스라져 사라질듯 처량해 보인다.

그러나 그 누구도 딱히 말을 걸어주거나 하진 않았다. 헤세마저 그랬다. 그도 그럴 게 저 영감님 행실이 조금 지저분...

"아! 아까 맞은 코가 너무 아프다!"

아니, 진짜 더럽네.

"못 만져도 좋으니까 보기만이라도 했으면!"

참다 못한 야우라가 영감님을 향해 헤세의 신발을 던졌다. 다행히 맞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덕에 헤세의 신발은 멀찍이 날아 물 속으로 퐁당 빠져버렸다.

"누님! 그거 제 거!"

무고한 피해자가 된 헤세는 제 발로 저수지로 뛰어들었고 얼마지나지 않아 제 신발을 가지고선 올라왔다.
수 차례 잠수와 부상을 반복하던 그의 모습은 초췌하다라는 말론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미안. 짜증나서 나도 모르게."

야우라가 멋쩍게 웃으며 사과했다.

"이해합니다..."

헤세는 두건의 물기를 짜내며 한 숨을 내뱉었다.

"헤세."

영감님은 선베드에 걸터 앉아 헤세를 불렀다.
고용주의 부름에 헤세는 잠깐 쉴 새도 없이곧장 그쪽으로 움직였다.

"너, 오늘 늦잠 잤지? 다 알고있다. 거기에 친구들 데려와서 놀기나 하고."
"저기... 원래는 놀러온 게 아니라..."

마지막 양심은 있는 것인지 헤세는 늦잠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다, 괜찮아. 젊은 날엔 그럴 수도 있지.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잘했다."
"어르신, 이번에도 경비대에 잡혀가시면 전 못 꺼내요. 그거 알아두셔야 되는데."

문득 드러나는 영감님의 속마음에 헤세가 진지하게 충고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너... 밭으로 가는 물길 한 번 봐야겠더구나. 웅덩이 파놓은데도 확인하고."
"예, 알았어요. 보고 올게요."

"그래, 수고해라."

영감님의 작업지시가 끝난 뒤, 헤세는 적당히 마른 두건으로 몸을 대충 닦아낸 후 벗어뒀던 옷가지를 입었다. 위엔 마르고 밑엔 흠뻑 젖어있는 모습이 꽤나 웃기다.
그런 모습으로 어기적어기적 걷는 헤세는 곧장 가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 가까이왔다.
그리고는 영감님의 눈치를 한 번 보곤 속삭인다.

"봐서 알겠지만, 어르신이 좀 엉뚱한 양반이야."
"어, 뭐 그래 보이긴 하는데."

나는 적당히 느낀대로 말했다.
초면에 다리 만지게 해달라는 건 용기를 넘어서서 무언가가 더 필요한 그런 행동이지 않은가.

"막 괴팍한 사람은 아니야, 좋은 사람인데. 딱 하나만 기억해."

짐짓 진지한 헤세의 태도에 나도 덩달아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절대 어르신이랑 내기하면 안 돼. 알았지?"
"내기? 왜?"

"하지마 그냥 하지마. 하면 안 돼. 누님한테도 잘 얘기해두고. 알았지?"

내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기에 나는 선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금방 올게. 간다. 누님 저 가요!"

야우라의 짧은 인사까지 받은 헤세는 그렇게 뭍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룻배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제 뭐할까?"

자잘한 사건들을 지나서 다시 심심해진 것인지 야우라가 슬며시 물어왔다.
어느샌가 몸의 물기도 모두 말라 찌뿌둥해진 것인지 이리저리 기지개를 켠다.

"너희들 목 마르지 않니? 시원한 거 먹을래."

영감님의 느긋한 제안에 그새 경계심이 사라진 야우라가 양팔 벌려 환영했다.

"좋아! 뭐 있는데?"
"수박도 있단다."

그 한 마디에 야우라가 펄쩍 뛰었다.

"수박?! 수박이 있어?!"
"그래에. 웬만한건 다 있다고 했잖니."

멋들어진 표정으로 눈을 빛내는 영감님, 그 와중에 야우라가 내 어께와 팔을 잡고 흔들며 발을 굴렀다.

"레이크! 수박이래 수박!"

나로선 조금 얼떨떨한 이야기였다.

"수박이... 뭔데?"

처음듣는 이름이었다.
내가 모른다는 말을 하자, 야우라는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 빙긋 웃으며 짜증나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수박 못 먹어봤어? 못 먹어봤구나? 이 누님은 고향에서 한 번 먹어봤는데에. 초록색 껍질에 줄무늬가 쳐져있는데 또 속살은 빨갛고 까만 씨가 엄청 많아. 그리고 엄청 맛있어."

거 지도 한 번 먹어본 거고만 드럽게 생색내고 있었다.
게다가 야우라가 설명한 생김새를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할아버지, 진짜야? 진짜 있는거야? 그거 여름 과일이잖아!"
"말도 마라, 웜하우스에서 공수해온 귀한 물건이다."

비로소 위신이 섰다 생각한 것인지 영감님의 콧대와 어께가 한 결 높아져 있었다.
기분좋게 너털웃음을 흘리던 그는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귀한 물건을 그냥 먹으면 재미없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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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18 07:40 | 조회 : 260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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