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이 없어도 까먹어(5)

영감님이 자랑스럽게 꺼내온 수박은 곧 테이블 위에 모시듯 올려졌다.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 보게된 수박의 모습은 들었던 설명 그대로였다.
청개구리보다도 짙은 초록색 껍질위에 시커먼 줄무늬가 죽 둘러 그어져있었고 매우 단단해보였다.
저런 게 속살은 빨갛고 좁쌀같은 검은 씨가 가득한데 말도 못하게 맛있다니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생긴 것만 봐선 공성병기인데. 투석기에 넣고 쏘면 파박하고 터져서 그 검은 씨앗이 파바밧...

"할아버지 그거 내가 잘라봐도 되지? 응? 해도 되지?"

야우라가 벌써 식칼을 손에 쥐고 흥분해 소리쳤다.

"진정하거라, 진정해. 수박이 어디 도망가는 거 아니니까."

크게 당황한 영감님이 얼른 야우라의 손을 잡아 만류했다.
실례되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저 손은 일부러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야우라는 이 고사리같은 손으로 수박을 자르고 싶은 거구나."
"틀린 말은 아닌데, 손 때셔!"

야우라가 들고있던 식칼 그대로 들이밀어 위협하자 영감님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점점 다가오는 회빛 칼날에 영감님은 결국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놓고도 회복은 또 금방하여 야우라에게 제안을 해온다.

"그러면 이건 어떠니 첫번째 게임으로 이긴 사람이 수박을 써는거지."
"오오! 재밌겠다! 좋아!"

어떻게 말려볼 새도 없이 야우라는 당차게 그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나는 당장의 그 애의 뒷머리를 잡아당겨 끌어왔다.

"앗아아...! 또 왜에!"

당겨지는 머리를 맞서 잡으며 울상을 짓는 야우라.
그래 좀 과격했던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만큼 급한 사안이기도 했다.

"뭔 줄 알고 그렇게 덥썩덥썩 한다 그래...!"
"수박 자르기."

야우라는 태연하게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알고 있다. 그야 수박 자를 권리를 걸고 게임을 한다는 거 방금 들었으니까. 그렇게 다 알고는 있었지만, 일 보러 가기 전 헤세가 했던 충고도 있고 아무래도 영감님의 언행이 요상하기도 하고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었다.

"헤세가 저 영감님이랑은 내기하지 말라고 했다고."
"하여튼 너는 너어무우 겁쟁이라니까."

남은 걱정해주고 있건만 정작 야우라는 새침을 떨며 내 가슴께를 손등으로 툭툭 쳐댔다.

"그리고 내가 귀를 건 것도 아닌데 뭐. 이런 건 내기 축에도 못 낀다고."
"...그런가?"

"그래에. 그런거라구."

그렇게 자신있게 단언하니 얼핏 그런 것도 같았다.
그래 뭐, 이런 것까지 전부 내기라고 한다면 평소에 하는 가위바위보도 내기라고 할 건가.
식당에서 주인장과 손님의 관계도 내기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저 녀석이 돈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아닐 것인가, 하는 무언의 심리전이 아닌가.
바로 여기 그 싸움의 승자가 있다.

"뭐야? 왜 그렇게 봐?"
"아니. 예뻐서, 그래. 예뻐서."

나는 속으로 했던 생각을 감추기 위해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사람이 예쁘다는 말 한 마디에도 여러가지 의미를 담을 수 있었다.

"흐으응? 새삼스럽게 웬일이래, 아무리 그래도 수박은 내가 자를 거다?"
"일단 뭐든 이기고 그런 소릴해라."

나는 야우라의 등짝을 밀어 출전시켰다.

세 걸음 가량을 사이에 두고...
야우라와 영감님이 마주섰다.
웜하우스에서 영감님이 특별히 공수해왔다는 수박, 그 수박을 자르는 사람을 정하기 위한...

...뭐 자기들이 재밌으면 된거니까.

아무튼, 그 미묘한 권리를 위한 첫 번째 게임은 무엇인가 하니.

"뭐로 하고싶니? 이 할아버지는 야우라 마음대로 정해도 좋단다."

한없이 여유로운 목소리.
영감님은 밀짚모자를 고쳐쓰며 그렇게 말했다.
과연 그 명백한 도발에 야우라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럼 저쪽부터 저쪽 끝까지 헤엄치기로 할까?"

야우라는 이 섬에서부터 저 끝에 보이는 뭍을 가리켜보였다.

"야 너무 노골적으로 비겁하지 않냐?!"

노인을 상대로 그런 조건을 걸 수 있다는 것에대한 감탄이 입 밖으로 절로 터져나왔다.
양심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저 정도면 그냥 힘으로 수박을 뺏는 것과 똑같잖아.

"안 돼?"

제딴에는 진지한 이야기였던 것인지 야우라가 영감님에게 물었다.

"심판이 안 된다고하니 다른 걸로 하는 게 어떻겠니."
"뭐야, 레이크가 심판이야?"

이쪽을 돌아보는 야우라의 표정이 매우 편치 못하셨다.

"하여튼간에 도와주는 꼴을 못 봤어."
"지금 내가 왜 그런 소릴 들어야하는 거지?!"

어쨌거나-
적당한 절충안으로 결정된 종목은 제자리에서 10바퀴 돌고 한 다리로 오래 서있기였다.
이것도 그리 공정하다고 보긴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먼저 하는 쪽은 야우라였다.
그 애는 제자리에서 돌기 위해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더니 나에게.

"너 똑바로 세? 틀리면 안 돼?"
"안 자빠지게 너나 잘해!"

내 성질이 출발신호라도 되는냥 야우라는 허리를 숙여 빙글빙글 돌기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런 식으로 열 바퀴를 내리 돈 야우라는 벌떡 몸을 세워 양 팔을 펴고 한 다리를 들었다.

"오, 오오...!"

약간 비틀 거리던가 싶던 야우라는, 이런 표현 쓰기 싫었지만, 엘프답게 안정적으로 균형을 잡고 섰다.
거기에 보란 듯이 눈을 감고 오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완전 '나 좀 봐라.' 하는 자세다.
물론 그렇게 까불다 크게 휘청이는 바람에 이내 양 발을 땅에 대고 말았다.

"봤냐? 봤어? 봤냐고!"

야우라의 기록은 대충 속셈한 것으로도 35초.
이미 마음 속으론 이긴 모양이었다.

곧 그 다음 차례인 영감님이 나와서 야우라와 똑같은 자세로 섰다. 또 똑같이 열 바퀴를 도는데... 돌면서 영감님이 어디로 간다 어디로 가고 있었다.

"어아! 잠깐만요! 영감님! 어디 가세요!"

나는 천천히 물쪽으로 향하는 할어버지를 겨우 쫓아가 붙잡았다. 다행히 물에 빠지는 일은 없었지만 이건 사실상 실격패였다.

"아... 이거 생각대로 잘 안되는구만..."

아쉬운듯한 영감님의 한 마디.
그러게 공정한 게임이 아니었다는 찝찝함을 뒤로하고 승자가 된 야우라가 자랑스럽게 칼을 집어들었다.

"어떻게 하지? 무슨 모양으로 자를까? 아직 결정 못했는데."

어떻게 과일 하나로 저렇게 신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평범하게 잘라, 그냥 평범하게."

핀잔을 들은 야우라는 입을 쌜쭉 내밀며 저 손가는대로 수박을 잘라나갔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수박의 껍질의 두께는 거의 손가락 한마디였고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식칼로는 쪼개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야우라는 기를 써가며 기어코 자기 자르고 싶은대로 수박을 잘라나갔다.
초승달처럼 만들어진 수박조각이 몇 번 더 손대자 이내 호 모양의 조각들이 되었다.

"그래 이 모양이었어!"

고향에서 먹었을 때의 모양을 재현한듯 싶었다.
나는 개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향도 강하지 않고 흘러내리는 과즙의 색도 그리 짙지 않았다.
이게 그렇게 맛있단 말인가...
약간은 미심쩍은 기분으로 한 입 베어무는 순간, 알알이 치있던 물이 입안을 가득 채우고...

"야! 먹어버리면 어떡해!"

야우라의 따귀에 나는 그 과즙들을 도로 뱉을 수밖에 없었다.

"뭐가 문제야 뭐가! 먹으려고 자른 거 아니냐? 어?!"
"이제 두번째 게임 시작할 차례라고."

"너 본말이 전도되었다라는 말 아냐, 어?!"

야우라의 목을 팔로감아 붙들은 나는 그대로 수박의 뾰족한 부분을 야우라의 얼굴에 대고 좌우로 돌렸다. 연한 과육이 그대로 물처럼 갈려 아래로 흘러내린다.
무기로서의 기능은 그리 좋지 못한 듯 싶었다

"으아아 아깝게 이씨."

야우라는 제 뺨에 흘러내리는 과즙을 손가락으로 훑어 핧아 먹었다.
또 그걸 본 영감님이 말한다.

"그거... 할아버지도 같이 먹어도 되겠니?"

영감님의 시선은 분명히 야우라의 얼굴로 향해있었다. 아니 누가봐도 뺨을 향해있었다.
제정신이냐고 이거.

"되겠어요? 되겠냐고!"

그 일은 내 딴지로 일단락.

어쨌든 야우라는 영감님과 두번째 게임을 하고 싶어했다. 그 의도야 안 봐도 뻔하다.
혼자 다 먹고 싶은거다.
게임을 해서 한 번도 안 지면 혼자 다 먹을 수 있으니까. 아주 단순한 법칙이었다.

그리하여 결정된 두 번째 게임은 물수제비.
2번 튕긴 영감님에 비해 무려 9번을 튕겨낸 야우라가 수박을 따냈다.
본인의 말로는 좋은 돌이 없다나 뭐라나.

세 번째는 숨 오래참기, 물에 다 들어가지는 않고 고개만 넣어서 했다. 이것 또한 야우라의 승리.

그렇게 네 번째도 다섯 번째도 수박이 다 떨어질 때까지 영감님은 단 한 번도 승리를 따내지 못했다.
그에 반해 수박을 독차지하게 된 야우라는 나에게 한 조각씩 나눠주는 여유로움까지 선보였다.

"하하하... 하하하하... 하! 하! 하!"

왠지 듣기 짜증나는 기고만장한 웃음소리.

"봤어? 봤냐고! 특히 레이크 너. 이게 바로 방랑검사 야우라님이다, 이거야."
"영감님 이겨서 좋겠다..."

승리를 비하하는 비꼼에도 야우라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반격까지 거뜬히 해내었다.

"그래서? 이 야우라 님이 준 수박의 맛이 어떻다고?"

야우라는 승자의 전리품을 한 입 베어물며 베시시 웃었다.
큭.

"맛있었습니다..."
"하! 하! 하! 하! 그래에, 그렇게 맛있었어?"

그것도 보통 맛있는 게 아니었다. 보통의 과일처럼 신맛이 많지 않고 물이 많아 알맞게 단 것이 얼마를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맛이다.

그보다는 한 번도 못 이기고 수박도 못 얻어먹은 영감님...
영감님은 무진장 심각해진 얼굴로 선베드에 걸터 앉아 침음을 흘렸다. 0승 6패의 완패, 충격받아도 이상하지 않다.

"이야... 야우라는 대단하구나. 꼼짝없이 당해버렸어."

특별히 그랬던 건 아니었는지 영감님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제 수박은 없으니 대신 이 모자를 걸고 한 판 또 해주지 않으련?"

영감님은 내내 쓰고있던 밀짚모자를 벗어 내밀어 보였다. 결도 촘촘하고 깔끔하게 재단되어진 띠가 둘러진 걸로봐선 은근히 고급품인 것 같았다.

"모자?"
"그래, 이 할아버지가 부탁하마."

야우라가 흥미를 조금 보이자 영감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설득에 박차를 가했다.

"좋아요, 또 해."

이미 6번의 승리로 자신감 한가득이었던 야우라는 흔쾌히 수락했고 대망의 7번째 게임.
매듭 빨리 풀기.
제멋대로 꼬아놓은 밧줄을 먼저 푸는 쪽이 이기는 조건으로 시작된 제 7판은 고전하는가 싶던 야우라가 막바지의 행운으로 승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손에 넣게된 모자를 써보는 야우라.
크림색 밀짚모자와 야우라의 기묘한 금발이 제법 잘 어울렸다.
그건 그렇고 영감님은... 모자마저 뺏겨서 봄날의 땡볕을 여과없이 받고 있는 이 영감님은...
헤세가 영감님과 내기를 하지 말라고 했던 건 '그런 이유'가 아니라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걸까.

"어... 저... 영감님..."

위로라도 해볼까 말 걸어보려는 찰나, 영감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아직 안 졌다. 아직 남아있는 게 많아. 어떠니 야우라, 이번엔 할아버지가 이 셔츠를 거마!"

아니 이 할아버지 물러설 줄을 모르네.

"아니, 영감님..."
"단추달린 원색 셔츠란다! 흔한 물건은 아니지!"

아니...
야우라의 대답은 거진 정해진 거나 다름 없었다.

"좋아! 한 판 더!"

그리하여 대망의 여덟 번째.
그 동안 종목 선택을 야우라에게 양보해왔던 영감님은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종목을 골랐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의미일까.

영감님이 고른 종목은 야바위.
그게 어떻게 대결이 성사되나 했더니 영감님은 자신이 섞고 야우라가 찾는 식으로 대결하기를 원했다.
자신만만한 야우라는 흔쾌히 승낙했고 영감님은 오두막 안에서 컵 세 개와 주사위를 하나 가져나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게임의 준비를 끝마친 영감님은 비장한 눈으로 야우라에게 턱짓했다.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야우라는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영감님은 컵들을 마구 뒤집었다.

빠르다. 확실히 여태까지 영감님이 보인 행동들 중엔 가장 빨랐다. 그런데 영감님도 생각치 못한 부분이 있었으니 그건 야우라의 눈이 무진장 좋다는 점이었다.
저 만치 떨어진 산 속의 사슴을 발견하는 애다. 이정돈 일도 아니지.
과연, 야우라는 자신의 시력을 자랑하듯 별다른 고민없이 컵을 선택했다. 오른쪽 것. 나도 그렇게 봤다.

"이걸로 하겠니? 안 바꿔도 되겠어?"
"어. 이걸로 할거야."

아... 영감님.

"안 바꾼다고...? 그래... 알았다..."

드디어 정답의 공개.
영감님은 신음을 흘리며 오른쪽 컵을 들어올렸고 그 안에는 주사위가 없었다.
없었다.

"없엇?!"

나보다도 야우라가 더 놀랐다.
아마 제 눈을 믿은만큼 놀란 거 같다.

"핳하하하! 허허허허....! 하하핳...!"

여덟 번째, 무려 여덟 번째만에 승리한 영감님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라도 여덟 번만에 이겼으면 그랬을 거 같다. 그 정도의 쾌감이 있을 것이다.
그 웃음소리에 야우라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난 아무것도 안 걸었는데 어떡하지?"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단다, 야우라야."

영감님은 순진하게 묻는 야우라에게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할아버지가 셔츠를 걸었으니 너도 옷을 걸었던 걸로 치면 된단다."

영감님이 가리키고 있는 건 아무리봐도 야우라가 입고 있는 속치마 삼아입고 있는 원피스.
평범하게 미친 소릴 하고 있었다.

"아 그렇구나... 어쩔 수 없네..."

쓰라린 소릴 흘리며 결과에 승복한 야우라는 제가 벗어둔 셔츠를 내밀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인지 잠시 멈칫한 영감님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지 딴 소리없이 셔츠를 받았다.
그리고 그걸 코에...

"그런 건 혼자 있을 때나 하던가! 아니 혼자여도 하지마요!"

나는 저도 모르게 셔츠를 확 낚아챘다가 다시 영감님에게 돌려주었다.

"아니야... 내 눈이 틀렸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어두운 읊조림.
야우라였다. 그 애는 떨리는 눈동자로 슬며시 날 보았다.

"어떡하지... 저거 클로에한테 빌린 셔츠란 말이야..."

한 숨 나오는 소리였다.

"그럼 왜 그걸 갖다줘!"
"셔츠엔 셔츠니까 어쩔 수 없잖아...! 허어..."

훗날의 공포를 상상하던 야우라는 대뜸 소리쳤다.

"할아버지 똑같은 걸로 한 판 더 해!"
"야!"

"난 내 눈을 믿어... 방금 건 실수였다고. 눈에 바람이 들어가서 깜빡인 것 뿐이야..."

이어진 아홉 번째판.
야우라의 패배. 베스트를 주었다.

"한 판 더...!"
"야 그만해! 어디까지 가냐!"

야우라에게 남은 건 이제 신발과 입고있는 것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만해! 그럼 지금 나보고 이 꼴로 집에 가라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네 잘못이잖아!"

"그러니까 내가 만회할거라고! 할아버지 한 판 더!"

그렇게 야우라는 바지마저 뺏겼다.
내리 세 번을 졌다. 이정도면 흔히 하는 말로...

"흐름이 잠깐 넘어간 거뿐이야... 다시 올거라고!"

말하는 게 도시에서 패가망신해서 아이힐데른으로 귀향했던 루스 씨하고 똑 닮아있었다.

"흐흐흐... 괜찮겠니, 야우라. 이제 신발하고 슬립 하나밖에 남지 않은 거 같은데."

영감님은 전에 보이지 않던 음흉한 웃음으로 야우라를 걱정해주었다.

"괜찮아. 이건 속치마야. 안에 속옷 또 있어."

전혀 안 괜찮단 얘기였다.

"원한다면 다른 걸 걸어도 좋단다. 너희는 헤세가 왜 여기서 일하는지 아니? 흐흐흐..."

함정이었다.
앞선 7번의 패배는 모두 영감님의 함정이었던 거다. 전반부에 의도적으로 출혈을 내며 방심하게 만들고 후반부에는 상대방을 싹 벗겨먹는 악마의 함정.
헤세의 경고가 옳았다.
이 영감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뭐가 좀 이상하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거야...!

"아이고 이런 이번에도 틀렸구나!"

영감님의 목소리. 그 사이 야우라가 또 진 것이다.
나는 양손으로 얼굴에 마른 세수를 했다.
어우 저 화상, 잠깐만 놓치면 사고를 친다.

"레이크... 나 어떡하지...?"

신발마저 내주고 모든 걸 잃은 야우라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벌써 끅끅대며 속 울음까지 하고 있다.

"흑, 나 이대론 못 돌아가... 이대로 클로에한테 죽을 거야..."
"어떡하긴 뭘 어떡해. 가서 빌어! 가서, 덤벼서 죄송합니다. 젊은 날의 객기였습니다, 해!"

"이 할아버지는 내기로 딴 건 내기로 밖에 얘기하지 않는단다."

영감님의 말에 야우라는 무릎까지 꿇고 나한테 매달렸다.

"레이크으... 나 이것마저 뺏기면 시집도 못 가...!"
"이제와서 그걸 나보고 어쩌라고!"

"돈좀 빌려줘."

이 녀석은 이와중에도 어떻게 더 망할까만 고민하는 거 같았다.

"웃기지 마! 너 줄 건 없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그간 우리가 함께했던 우정과 모험은 뭐였던 거야!"

"그딴 거 없어!"

나는 야우라에게서 도망치려고 해봤지만 이 도박폐인은 끈질기게 들러붙었다.

"다시는 안 이런테니까...! 응? 다시는 안 이럴게! 다시는...!"
"아이 좀 놔봐!"

겨우 야우라를 떨쳐낸 나는 거친 숨을 가다듬으며 째려보았다.
이젠 정말 원피스 밖에 안 남은 야우라는 바닥에 누운체 있는 청승 없는 청승 다 떨고 있었다.

아 저거 진짜 저수지에 묻어버릴 수도 없고...

나는 답답한 마음에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 별 수 있나 집에 무사히 돌아가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내기를 하는 수밖에.

나는 영감님이 있는 테이블 앞에 섰다.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영감님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이번엔 청년이 하는 건가?"
"판돈은 한 번에 얼마까지 되요?"

"이 할아버지는 그런 건 정해놓지 않아요."
"그럼 야우라 자체를 걸게요."

나는 저만치서 궁상떨고 있는 야우라를 가리켰다.

"야! 네가 뭔데 나를 건다 만다야!"

저 판다는 말엔 귀신같이 반응하는 야우라는 일단 거르고.

"영감님은 쟤 옷가지 다 돌려줘요."
"그런걸로 되겠니?"

"대신 종목은 내가 정해도 되죠?"
"좋을대로 하렴."

"여기 젠가있어요?"
"...물론이란다."

뭘로 덤벼도 의미없다는 듯 영감님은 헤벌쭉 웃었다.

젠가, 교차해서 쌓은 블럭을 하나씩 빼서 위로 쌓아올라가 무너뜨린 쪽이 지게되는 놀이.

테이블 위엔 곧 54개의 블록이 온전히 탑으로 쌓였다.
이제 시작이다.

"이 할아버지는 손재주가 아주 좋단다."

그렇게 말하며 영감님은 4층에 있는 왼쪽 블록을 빼내어 위로 쌓았다. 그것도 약간 비스듬하게, 무게중심이 흐트러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아주 얄팍한 수다. 하지만 난 그럴 거란 걸 알고있었다.
젠가, 아이들이 아주 많이하는 놀이.
놀이.

나는 영감님이 블록을 뽑았던 4층의 오른쪽 블록을 뽑아 그걸 세로로 세워 잡았다.

"세로로 세우겠다고? 이 흔들리는 인공섬에서? 제 정신이니?"

글쎄 그게 얼마나 힘든건진 다른 사람이랑 안 해봐서 잘 모르겠고.
내가 확실히 알고있는 건 어린 동생들을 조용히 만드는데 가장 좋은 게 다른 게 아니라 블럭놀이였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

"레에이이크으니임, 제가 어께 주물러 드릴게요오."

뒤따라오는 야우라가 답지 않게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내 어께 위에 손을 얹어 조물조물 움직였다.

"됐어. 필요없거든?"

왠지 닭살이 올라서 나는 얼른 그 손을 치워냈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오... 제가 집까지 업어다 드릴까요오?"

그 모습이 심히 괴기스러웠던 것인지 옆의 헤세가 조용히 물었다.

"누님이 왜 저래...?"
"지가 도박한 거 내가 클로에한테 말할까봐 저러는 거지."

아아, 하고 수긍한 헤세는 모른 체하며 걸음을 계속했다.

"말씀 좀 해주세요오, 레이크니임. 아아, 용사님이라고 불러드릴까요? 네? 어떠세요오?"

말해야지, 무조건 말할거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는데 쟤는 한 마디 보태는 게 문제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오늘 거길 왜 간거야?

1
이번 화 신고 2019-02-18 07:40 | 조회 : 104 목록
작가의 말
죄수번호53425854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