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이 없어도 까먹어(2)

미크로셀은 연중 물이 부족한 시기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풍족한 곳이었다. 다소 여름에 집중되긴해도 고른 강수량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트리마켓도 원랜 산이었기 때문에 어디선가 시작되는 샘이 아래로 흐른다.
여기선 물만큼 흔한게 없다.

그렇데도 세상 일은 모르는 것이라, 그 말을 누가 남겼는지는 몰라도 그 성실한 이야기 때문에 미크로셀에도 저수지가 있다. 그것도 두 개다.

하나는 저번에 내가 예전에 울타리를 부숴먹은 적 있는 '피오라'라는 이름의 인공호수가 있고 다른 하나는 북문 밖에 나가 있는 저수지였다. 이름 없이 저수지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지만... 처음와봤다.

딱히 올 일이 없었다고 해야하나 미크로셀은 북부 평야를 농경지로 사용하다보니 연이 없었다. 더 따지고보면 헤세를 알고 있었으니 연이 없다곤 못하지만, 헤세가 북부 저수지에서 일한다는 것도. 아니 애초에 저수지에서 일한다는 것 자체를 오늘 처음 알았으니 비슷한거나 마찬가지였다.

"왜 말 안했냐니. 너랑 딱히 일에 대해서 얘기할 일이 없잖아."

그 동안 저수지에 대해 한 마디 한적이 없어서 물었던 멍청한 질문에 헤세는 간단히 답했다. 너무 현명한 대답이라서 어떻게 대꾸할 건덕지도 없었다.
사람이 말을 할 때는 주변의 것들을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대화는 서로 공통사가 맞아야한다.
내가 집에서 놀고있으니까 자연스레 바깥의 일 얘기를 안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라는 게 그리 대단한게 아니라서."
"그러게 너 하는 일이 대체 뭐야?"

정말 순수한 의도를 담은 야우라의 질문. 표정을 보면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같지만.

"누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어감이 좀..."
"진짜 궁금해서 그래에. 우리 고향엔 저수지 같은 게 없단 말이야. 반 랜드레이 걔는 시간 아깝다고 내가 가자는덴 하나도 안 가고. 진짜 오늘 처음보는 거야."

저수지가 마치 수도의 커다란 조각상이라도 되는양 야우라가 눈을 반짝였다.
...왠지 모르게 반 랜드레이 자식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막 빈 땅에 물이 모이고 그래?"
"뭐... 빈 땅이라면 빈 땅이죠."

야우라의 지나친 기대가 부담스러운 것인지 헤세가 눈치를 살피며 답했다.

"물 말고 다른 것도 모을 수 있어?"
"돈만 많으면 맥주도 모으는 게 세상인데요."

아니 그게 저수지의 역할이 아닐텐데.

"헤엑...! 진짜? 저수지는 엄청 크지?"
"예에. 저 끝부터 저 끝까지 수평선이 보입죠."

대충대충 지어내는 말들을 야우라가 너무 잘 믿자 헤세는 도리어 거기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거... 얼마나 내면 돼?"
"지금 누님의 수입으로는... 한 120년정도 숨만 쉬면..."

"120년?! 잠깐만 그 땐 내가 꼬부랑 할머닌데... 그 때도 지금처럼 먹을 수 있을까?"

내 개인적인 의견으론 야우라가 120년 동안 숨만 쉬고 산다는 것에서부터 불가능했다. 설령 쟤가 로망소설 속 그들처럼 공기와 이슬만 먹고 살아도 안 된다.
그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레이크, 난 그 때도 맥주를 사랑하고 있겠지? 그렇겠지?"

얘가 나중에 술통이랑 결혼이라도 하려고 그러나,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넌 꽃다울 시기에 이름 모를 타지에서 객사하는 게 꿈이라며."

대뜸 나에게 묻는 야우라에게 난 그렇게 대꾸했다.
정확히는 객사가 아니라 뭐 다른 얘기를 했던 거 같긴한데 떠오르는 이미지는 객사였다.

"어, 그러네. 한 몸으로 두 개의 꿈을 다 이룰 순 없는데..."

맞는 말이다.
한 개도 이루기 힘든 꿈을 두 개나 이루려고하다니 야우라 주제에 건방지다.

"그리고 그냥 사 먹으면 되지 뭐하러 저수지에 체우려는 건데."
"뭐어?"

대차게 소리친 야우라는 얼른 헤세의 어께를 두드렸다.

"헤세, 너도 들었지? 얘가 이러어어어엏게 뭘 모른다니까?"
"누님이 이해하셔야죠. 레이크는 이미 꿈을 한 번..."

"야."

나는 귀엣말을 하는 헤세의 옷깃을 확 잡아체버렸다.
덕분에 셔츠에 목이 졸린 저수지 사기꾼은 으엑, 하며 헛숨을 뱉었다.

북쪽의 저수지는 의외로 미크로셀과 가깝지 않았다. 그렇다고 멀다는 건 아니지만, 당연히 트리마켓의 물줄기를 받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다. 헤세가 일하고 있다는 저수지는 옆에 있는 특별히 이름이 없을 정도로 작은 언덕에서 나는 샘을 이어받는다고 한다.

물길은 자연적이라기보단 사람의 손으로 연장한것처럼 보였다. 아마 삽으로 파낸 거겠지. 어께넓이 조금 안 될정도의 도랑이 쭉이어지고 있다.
그 물길을 확인하는 것도 일이라며 최상층의 언덕까지 확인한 강제로 동행하게된 우리는 그대로 도랑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간혹 도랑을 새로 파줘야 겠다는 말을 중얼거리던 것 말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으므로 큰 문제는 없어보였다.

그리고 언덕의 중턱에 있는 대망의 저수지.
대망은 무슨, 대망이라고 표현할 것도 없다. 저수지라는 게 뭐 얼마나 대단한거라고 그저 물이 고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인공호수다. 혹은 자연호수를 그대로 이용하기도 한다는데 글쎄, 그냥 봐서는 둘 중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무수한 수풀과 나무, 그 사이에서 고인물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났다. 나도 느낄 정도니 야우라는 진작 알았을 거다. 당연히 헤세보다도 앞서 둔덕 너머의 저수지를 보았다.
그 첫감상이.

"뭐야... 생각보다 별론데, 수평선도 없고."

비록 헤세가 사기친 것처럼 수평선은 없지만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었다. 저 멀리 건너편의 모습이 오래된 수채화처럼 보였으니 못해도 그 크기가...

"하하 아직도 믿고 있었어요?"

나른하게 웃음을 흘리는 헤세, 속았다는 걸 알아챈 야우라가 헤세의 두건을 코까지 당겨내렸다.

"아이그아그악...?!"

그리고는 그대로 쥐고 흔드는 연계기를 펼치다가 확 뒤로 밀어버렸다.
언듯 위험한 행동이어도 똑바로 나를 향해 밀친 거였다.

"뭘 기대했던 거야, 도대체."

나는 그대로 쓰러지는 헤세를 받아 바로 세워주고는 물었다.

"엄청 큰 통. 이왕이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 그런 게 바닥에 묻혀있는 거야. 그리고 원하는 걸 담아두는 거지. 돌 바닥에 결을 세겨서 물이 빠질 때는 막 소용돌이가 치는 그런 거. 멋있지 않아? 근데 여긴 대리석은 커녕 암것도 없네."
"그거 만들 돈으로 물을 사겠다야."

"세상에 물을 사는 멍청이가 어딨냐? 그거 팔겠다는 애는 바보지, 바보."
"아니야. 테라리아에는 모래 밖에 없는 곳도 있는데 거긴 물이 기름보다 비싸데. 샤... 샤타라라고 했던가. 무슨 왕국이라고 했는데."

"에엥? 그럼 목말라서 어떻게 살아."
"그래서 거긴 한 달동안 물을 안 먹어도 사는 말이 있다던데. 사람도 물을 조금 먹고도 산데 거기에 온 몸이 수 천개의 가시로 이루어진 식물도 있고. 코끼리를 한 방에 죽이는 벌레도 있데."

꽤 흥미가 동했는지 야우라가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거기가 어디라고?"
"샤타라. 왜 도서관에서 찾아보게?"

"응? 그런 게 아니라. 내 무덤이 될지도 모르는 곳이니까."

야우라는 그 이름을 외우려는 것인지 샤타라를 몇 번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참나...
의욕충만인건 좋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이름을 알아버렸으니 그렇게 되긴 힘들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여길 보니까, 레이크 네가 취직하긴 힘들거 같다."

야우라가 말했다.

"아니 그러게 처음부터 그럴거라고 했잖습니까, 누님?"

두건을 말끔히 고쳐 쓴 헤세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여기 되게 한가한 곳이라고요."
"그래서 넌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을 하는 건데?"

슬슬 헤세가 일을 하고 있는 게 맞긴 한 건지 의심하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헤세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제가 하는 일들을 나열했다.

"물관리, 수로관리, 배수관리, 잡풀정리..."

그리고, 라고 덧붙이며 헤세는 저수지 안쪽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섬관리..."
"섬?!"

그 말에 야우라가 벼락이라도 맞은듯 반응했다.

"섬을 가지고 있다니... 헤세 너... 어마어마한 부자였구나. 그런데 왜 저번에 돈 빌려달라고 했을 때 무시했어?"
"내 거 아니에요. 저기 보이는 언덕있죠?"

헤세는 다시 한 번 저수지 안 쪽을 가리켰다. 걔가 말하는 언덕이 어떤 건지는 알겠다. 어떤 건지는 알겠는데...

"저게 섬이라고?"

나는 미심쩍게 물었다. 내가 보기엔 저건 섬이 아니었다. 섬이라기보다는 커다란 땟목? 아니다 분명히 흙이 있고 풀이 있고 살아있는 나무가 있고 집까지 있는데... 거기까진 분명 섬인데... 밑에 목재가 보인다.

"원래 있던 건 아니고 만든거야."

그즈음 둔덕 아래에서 웬 밧줄을 하나 걸러 잡은 헤세가 그걸 잡아당기며 대답해주었다.

"섬을 만들었다고?! 헤세 너..."

야우라는 재차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니 내 거 아니라니까요, 누님. 이거나 좀 도와주시죠."

하며 헤세는 밧줄을 위로 내밀었고 우리는 다 같이 밧줄을 잡아당기는 영문 모를 짓을 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작은 나룻배가 밧줄에 딸려왔다.
아, 그러니까 지금 이거 타고 저 섬으로 가자는 거 같았다.
뭔가 갑자기 막 귀찮아졌다.

"어차피 하는 일도 없는 곳이라며."

저걸 탄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보나마나 다시 다른 밧줄을 당기든 노를 젓든 해서 저 섬까지 가야하지 않는가. 아니, 노가 없는 걸보니 밧줄 확정이구만.
방법이야 어떻든 요점은 별 수확없이 집에 돌아가야할 때도 똑같은 일을 해야한다는 거였다.

"레이크, 기회는 준비된 자한테 온다고 하잖아."
"집에 가서 준비해도 될까?"

"에이! 여기까지 와서 무슨 소리야! 섬에는 가봐야지. 모험의 묘미는 이런 돌발적인 상황 아니겠어?"
"아니...!"

내가 뭐라고 하든말든 야우라는 다짜고짜 내 어께를 밀어 배에 태웠다. 그런 다음엔 자기도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헤실헤실 웃는 걸 보니 나룻배타고 섬에 가는 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중에 집에가서 클로에한테 무슨 꼴을 당하나 반드시 봐야겠다.

어쨌든 우리는 다시 반대편으로 향하는 밧줄을 당겨 그 인공섬을 향해 열심히 나룻배를 움직였다.

노력하여-

나름대로 선착장까지 만들어져 있는 섬의 편의성 덕에 우리는 안전하게 섬에 상륙할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본 섬의 크기는 생각보다 더 컸다. 흙은 겉에 덮어놓은 정도라 사실상 없는거나 다름없었고 대부분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집도 그리 튼튼해보이지 않는 오두막이었다. 그런 게 큰 것이 한 체, 작은 것이 두 체 있다.

언듯보면 정원이 딸린 저택이 저수지 위에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헤세 이거 네거 아니라 그랬지?"
"야, 이런 땅이 내거였으면 내가 이러고 살겠냐? 그랬으면 얼른 팔고 떠났지."

약간 자조적으로 말했던 헤세는 잠깐만, 하고 덧붙이며 오두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우리는 얼른 그를 쫓아갔다.

헤세가 찾아간 곳은 오두막의 앞. 구조적으로 따지면 저택의 앞뜰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거길 한 바퀴 둘러본 헤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없다..."
"누가, 주인이?"

내가 묻자 얼굴에 여유가 완전히 돌아온 헤세가 슬며시 웃어보였다.

"지각한 거 안 걸렸어."
"야야야야! 헤세! 레이크! 이리와봐!"

어느샌가 남의 집...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거길 뒤지고 있던 야우라가 세차게 우릴 불렀다.

야우라는 집 옆에 딸려있는 작은 창고까지 가있었다.
그 안에는 흔히 일광욕을 할 때 쓰는 길다란 의자, 선베드가 세워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질긴 천으로 만든 캐노피도 있고 낚싯대에 테이블에 의자에...
옆에 놓인 작은 나무 궤짝에는 각종 유리컵과 착즙기까지.

휴양지를 만들 수 있는 도구들이 거의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헤세, 헤세, 이거 써도 돼?"

잔뜩 흥분한 야우가 그 모든 것들을 가리키며 발을 굴렀다.

"어... 아뇨."

고민이라도 하듯 침음을 흘리던 헤세는 그것과는 관계없이 단호하게 야우라를 말렸다.

"왜?"

야우라가 되물었다.

"누님은 왜 될거라고 생각해요?"
"있으니까."

"주인은 없잖아요."
"그게 왜? 닳는 것도 아닌데."

그 시원한 대꾸에 잠깐 침묵을 지키던 헤세는 도리어 나를 향해 물었다.
청남색 눈동자가 오갈 곳 없이 흔들리고 있다.

"레이크, 지금 내가 이상한 거 아니지? 아니지?"
"어. 진정해. 네 잘못이 아니야."

난 헤세의 양 어께를 두들기며 격려했다.

"아... 나 방금 내가 아는 세계가 붕괴한 줄 알았어."
"괜찮아, 처음엔 그럴 수도 있어. 힘내."

그리고 정신을 수습한 헤세가 다시 야우라를 말리려고 돌아섰을 땐 이미.

"너희들 이상한 소리 하지말고 좀 도와줘봐!"

선베드가 바깥으로 꺼내지고 있었다.

물과 흙의 경계선, 그 적당한 위치에 선베드를 내려놓은 야우라는 대뜸 신발을 훌렁 벗었다.
이어서 평소에 입고 다니는 베스트, 셔츠, 바지를 연달아 벗더니 순식간에 속옷차림이 되었다.
예전에 나한테도 한 번 보여줬던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얇은 원피스말이다.
그러고는 신난다고 선베드 위에 자리잡고 누웠다.

...나는 얼른 헤세의 어께를 잡았다.

"진정해. 쟤가 이상한거야, 너는 괜찮아! 너는 정상이라고!"
"아니야 레이크..."

헤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가끔은 노는 것도 괜찮은 거 같아."

쑥쓰러운듯 붉어진 얼굴로 예의 궤짝을 들고 누님을 부르며 야우라가 있는 곳으로 갔다.

저것도 제정신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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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18 07:39 | 조회 : 213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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