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이 없어도 까먹어(1)

없다. 없어! 어디로 간거지? 이게 발이 달려서 도망갈리도 없고 대뜸 수련을 떠나겠다며 출가할 일도 없는 놈인데 왜 없을까.
내가 그 동안 뭘 그렇게 못해줬다고. 춥지 말라고 잘 입혀주고 행여 누가 볼세라 꽁꽁 숨겨 아껴두고 있었는데 어디로 가버린거냐고!

그래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가 잘못한 거다. 그 동안 너무 소홀히 대해서, 그래서 이렇게 말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이토록 허망할 수가 있나. 이토록 무력할 수가 있나.
찾으러 갈수도 없고 되찾을 수도 없다.
없다, 없고, 없으며, 없는 것이다!
그 소실이 실제 체감하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인지 오늘따라 없다라는 생각을 자주, 또 많이 하고 있었다.

나는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거울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지금의 내 얼굴은 레샤만큼 음영이 짙지 않을까.
어쩐지 온 몸의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내 존재까지 사라질지도 모르겠어..."

물론 자랑은 아니다.

"...아침부터 밥먹다 말고 무슨 헛소리야?"

그 모습을 본 클로에가 서빙을 위해 다른 테이블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한심하다는 듯 내리뜬 눈으로 보르는 그 시선이 유독 아프게 느껴진다.

"날 내버려둬! 이게 오늘 내 마지막 식사니까!"
"그러길 바라면 테이블에 앉아서 궁상맞은 얘기 하지마."

무거운 시련의 무게에 한 숨이 나온다.

"저기 말이야. 나는 사람이 물만 먹고도 한 달은 살 수 있다고 알고있는데 맞지?"
"으응?"

살짝 눈썹을 비틀던 클로에는 한 숨을 쉬고는 별 말없이 쟁반을 들고 원래 가던 길을 계속 이어갔다.
그게 다였다.

하긴, 세상은 원래 혼자 살아가는 거니까 저런 무관심에 새삼 상처받을 거 없어.
초연히 받아들인다는 건 그런거였다.
나는 오늘부터 초연한 사람이 될 거다.
세상 모든 근심걱정욕심을 버린 그런 사람.

...그래도 무슨 일인진 물어봐 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렇잖아, 사람 산다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서로서로 도와가며 사는 거지.

그렇지 않냐고.
왜 안 물어봐주는 거냐고.
이대로 내 존재가 사라져도 괜찮은 거냐고.
그래 백 번 양보해서 까짓 거 내 소멸이 벽에 붙은 파리가 손바닥을 비비는 것만큼 아무 일도 아니라고 치자.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난 바퀴벌레가 아니고 엄연히 사람인데.
사람이라고 사람. 사람...
사람...!

"그래 물어봐 줄게. 무슨 일이니?"

클로에가 친절한 말투를 괴팍하게 말했다.

"그간 모았뒀던 돈이 다 떨어졌어 이제 난 어떻게 해야하지..."

야우라를 잡아온 건으로 월세를 면제받은 것이 도리어 화근이었다. 내 삶을 벼랑끝으로 몰아넣던 월세라는 적이 사라지자 걱정거리가 사라지고 걱정이 사라지자 생각없는 소비가 이어졌다.
수도원에 다녀오면서 교회에서 받은 것도 있지만 그건 현금보단 물건이 많았다. 특히 여러가지 먹을 것들이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20가지 이야기 같은 책들...
그거가지고 스태로 아저씨가 얼마나 징징거렸는지 모른다.
게다가 수도원에서 그런 일을 겪었으니 이런저런 핑계로 더 집에 박혀있었고 이는 곧 파산으로 직통하게 된 그런...

"아아. 그렇구나 그럼 이번 달을 끝으로 나간다고? 그럼 방 비었다고 또 전단을... 아 그리고 송별회 같은 건 없으니까 기대하지 말고."
"어떻게 그렇게 말하냐?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야?! 이 돈독 오른 당근...!"

그 직후 작은 나무쟁반이 날아와 날뛰는 내 뒤통수를 응징했다.

클로에의 구박대로 나는 2층으로 올라가 내 방으로 돌아갔다. 그 애의 말이 맞다. 밑에서 청승 떨고 있어봐야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올라와서 뭔가 하겠단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쟁반을 맞진 않겠지.
지금은 영혼의 파트너인 이불 속에 들어가 좀 더 현실을 멀리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이불을 들추고 몸을 들이밀었다.

"거기서 한 단계 더 움직이면 오해로는 안 끝날 거 같은데..."

이불이 말했다.
아니 내 침대 위에 헤세가 있었다. 목소리는 걔가 낸거였다.
침대에 무릎까지 올렸던 나는 황급히 뒷걸음질로 후퇴했다.

"뭐야! 너 여기서 뭐해!"

말도 없이 남의 침대에서 자고 난리야.

"내가 내 방에서 누워있겠다는데 허가도 필요하냐..."

헤세는 나른한 목소리를 내며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확실히, 다시 한 번 방을 둘러보니 여긴 내 방이 아니었다. 내 방은 이렇게 오만 잡 것들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지 않다.
책은 조금 쌓여있지만 그건 매번 손대서 그런 거고 어지간한 건 에반젤린이 청소해버렸다. 해버렸다고 하는 건 냅두라고 말해도 '당하기' 때문이다.
딱히 문제될 물건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 사적인 부분들이 샅샅히 뒤져지고 나도 모르는 곳에 옮겨지는 기분은 좀...

"아, 큰일났다... 네가 일어나 있다는 건 이미 늦었다는 얘긴데..."

잠의 후유증이 남아있는지 헤세가 이마와 눈을 누르며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내가 일찍 일어났을 수도 있는 것인데?"

나는 단호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받아쳤다.

"아... 오늘은 안 늦기로 했는데."
"대답해, 얼른! 안 그러면 이 자리에서 울거니까."

아니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잖아.

"뭔데 밑에서 쟁반이라도 맞았냐."
"난 원한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대성통곡을 할 수 있을정도로 감성적인 사람이야. 버튼 한 번만 누르면 된다고!"

어떻게 안 건지 진실을 꼭 찔러 말하기에 나는 아무 말이나 대충 했다.
하지만 사실이다. 눈 한 번만 찌르면 바로 눈물을 쏟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해보진 않았지만.

"이거 지금 제정신 아니네."

내 현상태를 그렇게 진단한 헤세는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에 놓은 작은 3층 서랍장의 가장 아래칸을 열었다. 무얼 찾는 것인지, 아니네... 라고 중얼거리던 헤세는 그 위에 것을 열고는 그 안에서 나뭇가지를 두 개 꺼냈다.

"자."

그리고는 그 중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반듯한 직선으로 깎여, 분이 발린 것처럼 하얀 알갱이들이 오돌도톨 올라와있는 나무막대기.

"아니...! 너, 너... 이거...!"

나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만큼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막대의 이름은 사탕나무.
햇빛에 바짝 말리면 속살이 말랑말랑해지고 무진장 단맛이 나는 나무였다.
사탕수수하고는 비교가 안되는 맛에 박하향도 조금 나서 간식으로 딱 좋지만...

"아껴먹는 거라고 떨어진 쪼가리도 절대 안 주던거잖아..."

아이들에게 인기가 매우 좋지만 재배가 안 되어 자연산을 채취하는 수밖에 없는 그런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런 걸 하나 통째로 주다니...!
내가 손을 벌벌떨며 선듯 받아가지 못하고 있음에도 가지를 내밀고 있는 헤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기다려주고있었다.

"그나마 제정신인 친구를 잃을 순 없지."

헤세는 침대 머리맡에 걸어두었던 두건을 머리에 싸맸다.
아아 오늘따라 그 모습리 너무 멋져보인다.

어쨌든 우리는 사이좋게 하늘그림의 밖, 수돗가에 앉아 사탕나무를 빨아먹었다. 깨물어 먹는 게 어렵지는 않지만 아깝다. 게다가 들리는 바에 의하면 사탕나무는 아무리 먹어도 이가 썩지 않는다고 한다.
신의 군것질이지.

"저 먼 동방에서는 이걸 여읏이라고 부른데."

그렇게 조용히 사탕나무의 맛을 음미하고 있던 중. 문득 헤세가 말했다.

"어... 뭔가 강렬한 이름이네."

먹다보니 진정되어 차분한 대답이 나왔다.

"그런데 너 늦었다며 안가봐도 돼?"
"내가 전에도 말하지 않았냐, 이미 늦은 거라면 얼마를 더 늦어도..."

"아 맞다 맞다 그랬지..."

헤세는 살짝 흐트러진 두건의 매무새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에반젤린 사제님이 이제 너 안 따라다닐거래?"
"아니... 왜 그런 얘기가 나오는거냐."

"아니야? 그럼 뭔데."
"별 건 아니고 이제 슬슬 일거리를 찾아봐야하지 않을까 싶어서."

아주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런 말한다고 해서 하나 더 줄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아주 큰 오산이지."
"농담하는 거 아니야."

"그럼 왜 갑자기 그런 유언을 남기고 그래."
"이게 무슨 유언이야, 누가 들어도 결심이고만!"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니까, 뻔한 얘기잖아."
"너희들 뭔가 착각하나본데 난 원래부터 직업을 가지러 여기 온 거야."

엄밀히 말하면 시험을 치기 위해 중간거점을 삼은 거지만 만약 무사히 시험을 치러서 합격했으면 난 왕국의 용사가 되는 거였다.
물론 지금은 수돗가에 앉아서 사탕나무나 무는 신세.

"너 1년은 쉴거라고 하지 않았냐?"
"아니 그 말 그대로 지켰다가는 정말 지금 죽..."

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난데없이 누군가 뒤통수를 쳐버렸다. 그 바람에 고개를 푹 수그리게 된 나는 미간으로 사탕나무를 박살내버렸다.

"야아! 레이크 살아있냐, 살아있는 거 맞지?"

야우라가 연거푸 내 등을 두들기며 불렀지만 나는 부러진 사탕나무를 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의 죽음의 공포가 아직도 온 몸을 떨리게 만들고 있다.
정말 손가락 한 마디만큼이라도 잘못됬으면 사탕나무가 눈을 찔러서 대성통곡할 뻔 했다.

"야이씨! 진짜 지금 죽을 뻔했잖아아!"

나는 벌떡 일어나 살인미수의 엘프가 자랑하는 머리칼을 위로 잡아당겼다.

"아야야야야...! 왜 걱정해줘도 난리야아...!"

야우라가 고통을 호소하며 얼른 까치발을 들었다.

"니네 동네에서는 뒤통수 때리는 것도 위로냐?"

거기에 지지않고 똑같이 내 옆머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틀어 피해냈고 그 애의 손은 본의 아니게 내 입으로 걸려 들어갔다.
그걸 의외의 호수라고 생각한 것인지 야우라는 내 턱을 아래로 잡아 끌었다.

"그런 소릴하는 게 요 주둥이냐!"
"아아아! 아힌다 아힌다 헉 아힌다! 힌챠!"

"뭐라고 웅얼 대는거야!"
"턱 빠진다고!"

나는 입 안에 걸려있던 손가락을 쳐내고 턱을 감싸쥐었다.
하마터면 남은 몸뚱이도 제 구실 못할 뻔했다.

"반갑습니다, 누님."

그 모습을 잠자코 보던 헤세가 야우라의 편에 붙었다.

"음? 오! 안녕, 헤세. 오늘의 날씨 관측은 어떤가?"
"해가 쨍쨍하고 건조하네요, 농땡이 피우기 딱 좋습니다."

"음, 그렇군. 수고했어."

이것들이 뭐라는 거야, 대체.
헤세는 야우라랑 그렇게 자주 만나는 편은 아니지만 뭔가 야우라가 하는 실없는 얘기에 장단을 잘 맞춰주곤 했다.
둘이 붙으면 항상 작은 촌극을 벌이는 것이다.

지금은 그깟 헛소리보다 바닥에 떨어진 사탕나무의 잔해를 보며 추도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잘 가라, 한 때의 낙이여.

"그래서 뭔데..."

나는 여전히 턱을 살살 문지르며 물었다.
얘가 갑자기와서 뒤통수를 때릴 리는... 떄릴 수도 있는 애였지만 보통은 그러지 않았다.

"클로에가 네가 수돗가에 코박고 죽은 건 아닌지 보고 오래서."
"그럼 보기만 하면 되잖아!"

왜 사람 뒤통수를 디립따 갈기냐고.

"얘 오늘따라 이상하네. 평소보다 더 까칠한 거 같은데. 역시 그 때 마수한테 오염된 거 아니야?"

야우라가 팔짱을 끼고 턱을 괴는, 으래 감정사들이 감정을 할 때 하곤 하는 자세를 취했다.

"마수요? 마수랑 싸우셨어요? 역시 누님... 안 그래도 레이크가 방금 전에 유언을 남기더라고요."

헤세가 조수처럼 따라붙어 다 들리는 귀엣말을 했다.

"유언? 거기 혹시 내 이름도 있었어? 얼마나 남겼어?"
"뭘 남기긴 힘들거 같아요. 돈이 없데요."

"돈 문제였단 말이야?"
"누님이 한 번 도와주시죠."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돈은 해결해줄 수가 없는데..."
"하긴, 누님은 속세를 떠난 방랑검사셨죠."

나는 헛소리 잔치를 하고 있는 두 사람한테 손에 쥐고 있었던 남은 사탕나무가지를 던졌다.

"야! 무슨 짓이야!"

이마에 제대로 맞은 야우라가 성을 냈다.

"해결은 무슨 네 빚이나 먼저 해결해라! 그리고 내가 세상의 전부를 가지고 죽는데도 넌 안 줘! "

차라리 지나가는 모르는 노숙자한테 대저택을 선물하지 쟨 안 줄 것이다.

"우와 속 좁은거 봐! 그 정도면 영지정돈 하사해도 되는 거 아니야? 나라면 그 반만 있어도 그랬어!"
"누님, 그럼 전 얼마나 주시는 겁니까?"

"헤세정도라면 두 개의 마을을 영지로 하사하고 국고의 보물 5점을 내릴 수 있지."
"오오, 역시!"

언제까지 이 있지도 않은, 그리고 오지도 않을 사실에 대한 얘기를 해야하는 건지 모르겠다.

"뻥 치지마! 넌 죽을 때 무덤에 네 재산 전부 순장해달라 그럴 거잖아."
"레이크, 삶은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가는 거야. 그러엏, 게 찌들어서 어떡할래?"

여유롭게 어께를 으쓱이는 야우라, 지금 그 애는 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너 변신하는 머리핀 내놔. 그거 내 돈이지. 내놔, 어딨어!"

내가 머리를 뒤지려고 가까이가자 야우라가 머리를 감싸쥐고 몸을 웅크려 숨었다.

"으아아! 줬다 뺐는 게 제일 나쁜 거 알아? 아냐고!"
"언제 줬어! 언제 줬냐고, 말해봐! 언제 줬냐 내가!"

나는 정말로 야우라의 머리를 헤집으며 핀을 찾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차고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미 환불 할 시기는 놓쳐다. 고작해야 되파는 것 정도나 가능할텐데, 그마저도 값 더 떨어지기 전에 얼른 되찾아야만 했다.

"아아...! 정말, 여자애의 머리가 얼마나 소중한건데!"

야우라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투덜거렸다.
그 소중한 머리를 변신 머리핀한테 맡기겠다는 심리를 모르겠다.

"그러게 왜 와서 시비야. 안 그래도 심란한데."
"에잇, 그까짓 직업 구하면 되잖아!"

"그게 말처럼 쉽냐? 요즘은 직업의 수익이나 안정성, 장래까지 생각해야되는 마당에."
"일단 해봐라, 이런 말 못들어봤어?"

"누가 했는데."
"내가."

그러고는 헤헿! 하고 조소하던 야우라는 얼른 헤세를 내 앞에 잡아끌었다.

"일단 해보자! 우선은 헤세가 일하는 곳부터 가보는 거야. 혹시 알아, 냉큼 취직 시켜줄지?"
"누님, 그건 힘들 거 같은데요."

헤세가 난처한 표정으로 완곡한 거절을 했지만 야우라는 막무가내였다.

"에이 가보자. 가서 생각하자!"

내 생각이지만 이 녀석 지금 농땡이 피우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하는 일이 저수지 관리인데..."

헤세는 야우라에게 등을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앞장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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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18 07:39 | 조회 : 235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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