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바랐던 것(5)

검은 화살촉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이젤 에텔리어의 눈도 마찬가지였다. 선도사의 눈은 사제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게 타오르고 있었다.
당장 시위를 놔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사람으로 보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골드버그에서 슈페리얼 디럭스 런치세트를 먹어보는 거였는데."

왜 그런 소릴 하게 됬는지 모르겠다.
죽이지는 않을 거란 확신 때문일지도 모르지.

"나는 디너세트."

너무너무 아쉬운 듯, 야우라도 한숨섞인 한탄을 내뱉었다.

"야, 이 순간에도 우리가 이렇게 안 맞아야겠냐?"
"그치만 런치세트랑 디너세트랑 무슨 차이인지 궁금하지 않아?"
"시간 차이지. 점심이랑 저녁."
"가격도 차이가 나던데?"
"그래?"

하긴 골드버그는 고급식당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근데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잖아...

"뭘 속닥거리고 있어."

여전히 화살을 겨누고 있는 이젤 에텔리어가 울대를 긁었다.
다행히 내용은 듣지 못한 것인지 딱 거기까지만. 만약 들었으면 아마 바로 쏴버렸겠지.

"다른 얘기는 필요없어. 스태로라고 했던가. 그 인간은 어디에 있어?"

어째서 스태로 씨를 찾는 걸까.
이유야 둘째치고 문제는 아저씨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모, 모르는데요... 넌 아냐?"

나는 보란듯이 야우라에게도 물었고 그 애 또한 얼른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흐응? 모른다고?"

순간 이젤 에텔리어의 눈에서 이채가 튀었다.
시위는 놓아졌고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 안고 비명을 질렀다.
열 걸음도 체 안 될 근거리에서 쏘아진 화살은 무언가에 저항 당하기라도 한 듯 야우라의 우측으로 살짝 빗겨날아갔다.

"뭐야..."

바짝 움츠러들었던 나는 자연스레 몸을 펴고 화살이 지나쳐가버린 곳을 보았다.
화살은 틀림없이 뒤 편, 벽과 바닥사이의 작은 틈에 박혀있었다. 못 맞췄다...
사냥꾼이 이 거리에서 화살을 못 맞춘거다!
으핳하아! 소리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사실을 믿지 못한 건 이젤 에텔리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치기등등하던 그의 눈매가 어그러진다.

"레이끄으! 야우라아!"

벽을 타고 울리는 목소리에 나하고 야우라를 포함해 이젤 에텔리어까지 모두의 시선이 계단 위쪽으로 옮겨갔다. 그 위에는 스태프를 짚고 서있는 레샤가 있었다.
화살이 빗맞은 건 실프 덕분이었던 걸까.

"사제님이, 사제님이 일어났다고요....!"

에반젤린이 깨어났다는 소식, 그제야 야우라가 내 위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진짜야?!"
"그, 그런데 좀 이상해요...!"

그러는 동안 상황의 불리함을 인지한 이젤 에텔리어가 다시 밖으로 도망치려고 하고 있었다.
이번엔 길게 한 눈 팔지 않고 똑바로 보고 있었다.

"야우라 넌 에반젤린한테 가봐!"
"레이크 너는?"

"끝을 봐야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둥 뒤에 감춰두었던 검을 들고 이젤을 쫓았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어두운데다 바람을 맞은 빗줄기 때문에 시야가 어지럽다.
도망친 선도사는 어디있는 거지?
하지만 나는 그를 눈으로 찾기 전에 통각으로 찾았다.
진흙바닥을 대차게 구른 나는 용케 놓치지 않은 검을 바닥에 대고 일어났다.

발길질을 했던 이젤 에텔리어는 선듯 달려오지 않고 조금 거리를 두었다.
알고있다. 알 수 있었다. 그는 사냥꾼이다. 도망치는 동물을 상대하는 것이 이 사람의 전문분야, 사람을 상대하는 데에는 자신이 없는 것이다.

이젤은 한 걸음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자신이 없는게... 아닌가?

"화살값 받아야하니까. 검 내놔."

그는 뻔뻔스럽게도 그런 말을 했다.

"무슨 양아치에요? 이게 얼마짜린데!"

나는 오른손으로 검 자루를 쥐고 왼손을 놓아 겁집을 떨어뜨려 꺼냈다.

"수도원에서 칼부림이냐. 세상에... 그러다 번개 맞아요?"

그건 이젤이 할 말이 아니었다.
그런 짓을 한 플라나의 선도사가 할 말이 아니라고!

"양아치 맞네!"

나는 기세좋게 치고 들어갔다.
키 차이가 조금 나도 맨 손과 검의 싸움이다, 지면 말도 안되는 거다. 다시는 야우라를 못 놀리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뒤로 물러날 줄 알았던 이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것도 가만히 서있는 게 아니라 불현듯 활의 시위를 당겼다.

"으잇...?!"

아니야, 화살은 없어.
혹시 부적이랍시고 숨겨둔 화살이 양쪽 다리에 다 있어서 하나가 남았던 건 아닐까.
아니면 땅바닥에서 줏었다던가.
웃기는 얘기라고, 분명히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전에 몸이 먼저 우뚝 멈춰서버렸다.
시위를 놓는 손은 텅텅비어있다.

속았다.

이젤은 활 미끄러져 내려잡고 그대로 휘둘렀다.
쌔엥! 얇은 나무가 빠르게 날아들 땐 그런 소리가 난다.

탁! 나는 왼팔로 머리를 감싸 활을 막아냈다. 하지만 무너진 자세는 돌아오지않아 비틀비틀 옆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회초리보다 세 배는 더 아프다. 어떻게 꾸역꾸역 넘어지진 않았지만 깜짝 놀랐다.
정말 ''깜짝'' 놀랐다.

"사제가 무슨 사람을 속여!"
"이제와 새삼스럽지 않냐. 니들이야말로 정교의 바보를 꽁꽁 숨겨놓고 여기서 뭘 하는 건데."

"왜 그렇게 정교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래?"
"여긴 이제 아무것도 없으니까. 좀 내버려 두겠니, 엉?"

"알아요! 우리도 알거든요?!"

여기 쌩 오지인 거 다 안다고!

다시 한 번 발을 차 달려들었다.
이젤의 활은 나무로 만들어진 것, 철검을 막을 순 없다. 그러니까 그런 속임수를 쓴 거다. 그만큼 내가 우위라는 뜻이다.

검술도 배우다 말고, 마법도 배우다 말고, 시험도 보러가다 말고! 아오....!
무기의 차이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어.
난 반푼이니까!

이젤은 뒤로 물러서며 허리띠에 걸쳐져있던 주머니칼을 꺼냈다.
뭔지 안다.
어... 그러니까... 그래! 사냥감을 해체할 때 쓰는 칼이다.
가죽을 벗기거나 작은 뼈를 도려낼 때는 좋을지 몰라도 검을 상대로는 형편없다.
이젤의 움직임에서도 위축이 느껴졌다.
그저 위협의 용도로 꺼내들었을 뿐, 막아낸다거나 쳐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휘두른 검에 이젤이 무기를 뒤로 무르며 뒷걸음질로 궤적을 피해낸다. 나는 그대로 따라붙으며 이번엔 검을 올려베었다. 막아보려고 들이민 주머니칼이 그대로 쳐내져 공중으로 치솟았다.

후우, 짧은 호흡. 그 다음은 어떡하지. 찔러? 아니면 베?
사람을?

나는 우에서 좌로, 횡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망설임은 분명히 존재했고, 그 때문인진 몰라도 이젤은 활을 이용하여 검을 막아냈다. 활은 부러지지 않았다. 질기고 탄성력있는 나무는 검격을 버텨냈고 칼날은 그대로 미끄러져내려 이젤의 허벅지를 베었다.

별로 움직이지 않았는데 숨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날에 붙은 혈흔은 내리는 비에 씻겨 내려졌다.
묘하게 들이쉬는 숨이 떨린다.

이젤은 허벅지의 상처를 누른 체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다시 한 번 거리를 떨어뜨리려 하고 있었다.

"피가 나버렸네."

바보취급하던 녀석에게 베인 것이 스스로도 웃긴 것인지 이젤은 코웃음 소릴냈다. 그것도 잠시 그는 남아있는 오른손으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뗐다.

"으허...! 이제 그만 좀 해요! 예에?"

조금 더 했다가는 금방이라도 토할 거 같았다.
여기까지와서 그런 추태를 보일 순 없지.

"시간이 모잘라..."

그렇게 읊조린 이젤은 무어라 중얼거리며 아예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미쳤어요?! 왜 싸우는 중에 뒤를 보여! 죽고 싶어요?"
"네가 그만하자면서."

이젤은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하자고 말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가버리는 것도 이상했다.
설마 저게 도망치는 거야?

"이봐요!"

나는 떨어진 검집을 찾아 검을 다시 맨 다음 이젤을 쫓아가 그 팔을 붙잡았지만 그 사람은 내 손을 뿌리쳤다.

"지하에, 술있어. 브랜디는 귀한... 아니, 비싼 술이야."

어, 그거 야우라가 던져버렸는데...

"카타콤도 잘 뒤져보면 아직 뭐가 나올 걸. 아마도."

나오긴 뭐가 나와. 유령이라도 나온다는거야, 뭐야.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나는 다시 한 번 이젤의 어께를 붙잡았다.

"이봐요, 선도사님!"
"꺼지라는 말 안 들려?!"

이젤은 다시 한 번 내 손을 쳐냈다.

"뭔 소리냐고 도대체!"
"아...! 이래서 바보들은 짜증나!"

버럭 성을 낸 이젤 에텔리어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점점 그 속도가 빨라진다.
이쯤되니까 나도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정교 사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무어라 말을 해줄까 하는 사이, 이젤이 먼저 물었다.

"어떡하다뇨... 일단 깨어났다니까, 좀 더 지켜봐야겠죠."
"이제와서 뭔 헛소리야 그건."

아니 이 사람이 뭐라는거야 또.

"예?"
"뭐."

"뭐가요?"
"뭘."

"무슨 뜻이냐고요."
"뭐를."

"아니이...!"

확 그냥 뒤통수를 때려버릴까 싶은 찰나에 이상한 바람소리가 들렸다.
카악... 카앙... 크흙...! 하는...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소리보단 부자연스러운 울부짖음이 들렸다.

"이 빗 속에서도 피냄새는 기가막히게 맡네. 대단하다, 증말."

이젤이 한탄인지 화인지 헷갈리는 소릴했다.

"또 무슨 소리에요, 그건."
"야, 나 좀 도와줘라."

질문을 했건만 대답은 커녕 이젤은 내 어께에 팔을 둘렀다.

"어디가는데요."
"소사관."

"소사, 오두막이요?"
"그래."

"뭐하러 가는데요."
"화살 가지러."

"오와! 이게 뭐야? 뒤통수 맞을 뻔 했네!"

적의 무기인 화살을 되찾으러 가는 길이라니, 일단 그렇게 소리치긴 했지만 나는 이젤 에텔리어를 뿌리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정말 뒤통수를 치려고 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해서였다.

"좀 빨리 가자. 왜 이렇게 느려터졌냐."

부축을 받는 처지일 때도 이젤은 당당한 사람이었다.

"느린 건 내가 아니거든요?"
"빨리 가는 게 형제님한테도 좋을거에요."

어르듯 그렇게 말한 이젤은 나름대로 속도를 더 내려고했다.

"무슨 일인데요, 도대체."
"코요태가 올거야."

"예?"

이젤은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럼 아까 그 소리는...

"지금은 간을 보는 거지. 거리를 두고 쫓아오고 있을 걸."
"아니 그걸 왜 이제 말해요!"

이젤 에텔리어는 대뜸 반짝반짝 빛나는 사제의 미소를 지었다.

"형제님 도망 못 가게 하려고요."
"당신 사제 맞아? 솔직히 아니지?"

그는 금새 미소를 지우고 신음을 흘렸다.

"맞아, 난 사냥꾼이야."

크르르르...!
최초의 소리 이후 처음으로 울음소리가 들렸다.
크고 무거운 소리, 개보다 조금 큰 짐승인 코요테치고는 꽤나 박력 넘쳤다.
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제 다 왔어요, 다 왔어!"

소사관까지는 이제 얼마남지 않았다. 이제 정말 몇 걸음되지 않는다.
그러는 중에도 짐승 특유의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착!"

나는 오두막의 문 앞에서 그렇게 소리쳤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코요태 또한 우리에게 도착했다.

검붉은 몸뚱아리, 아니 회색인가.
늑대와 같이 생긴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가 쇄도한다.
말도 안되는 크기였다. 개나 늑대따위가 아니라 그 세 배는 될 크기, 압력에 질려버렸다.
충돌, 충격에 정신이 빠져나갔다.

"끄으으윽...!"

나는 무력하게 바닥에 엎어졌지만 그 비명은 내 목에서 튀어나온 게 아니었다.
검붉은 코요태, 아니 코요태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를 그 짐승은 시뻘 건 눈으로 적을 공격했다.
모가지를 거칠게 비틀며 집요하게 이젤 에텔리어의 오른팔을 물어뜯는 그 모습은 어째서인지 짐승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개든 코요태든 뭐든 간에 제 아무리 커도 벽을 부술 순 없어. 그러니까,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면 안전하게 숨을 수 있어.

나는 어께에서 흘러떨어진 검을 들어 뽑았다.
코요테는 개의 친척이잖아.

결국은 개였다. 생긴 거 조금 다르고 이름 좀 다른 것뿐.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개.

더군다나 녀석은 이젤 에텔리어를 물어뜯느라 여념이 없었다.
간단한 일이지. 간단한 일이야.
살금살금 녀석의 뒤로 다가갔다. 녀석은 울대를 거칠게 긁어 울어대었다. 눈앞의 사냥감에 몰두해 다른 기척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녀석과 충분히 가까워지자 나는 불현듯 옆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코요테의 앞다리와 몸통 사이에 검을 찔러넣었다.

"깨게에엥!"

거 봐! 개소리 내잖아!
코요테는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어올랐따.

원래대로라면 그대로 검을 뽑아 도망치려고 했지만 공격을 당한 녀석이 검을 꽂은 체 몸을 비트는 바람에 자루는 순식간에 손아귀를 벗어나고 말았다.
몸뚱아리가 어떻게 되먹었길레 저렇게 검이 단단하게 박혀버리는걸까.
어쩔 수 없이 검은 포기해야 했다.
더 망설이면 저 ''괴물같은 괴물''이 다시 공격해올 것이다.

나는 쓰러져있는 이젤 에텔리어를 부축해서 오두막안까지 끌고갔다.
그런 다음 빌어먹을 선도사는 일단 대충 패대기치고 문을 닫고 옆에 놓여있던 오래된 궤종시계를 넘어뜨려 막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할 것 같았다.

뭘 더 갖다놔서 막을까... 뭐로 막아야 어디가서 방책 좀 쌓아봤냐고 거드럭댈 수 있을까....

"됐어... 그 정도면..."

이젤 에텔리어가 기운 빠진 목소리를 말했다.
아까까지만해도 바닥에 널부러져있었는데 어느샌가 저 혼자 의자까지 올라가 앉아있었다.

"코요테는 경계심이 많아. 섣불리 들어오려고 하진 않을 걸."

그는 오른팔에 피칠갑을 하고서도 한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저게 무슨 코요테에요...! 보니깐 거의 반달가슴늑대드만...!"
"뭐? 바보같은 소리하지마. 걔는 추운데서 살잖아."

"그러니까 하는 얘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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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14 21:10 | 조회 : 305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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