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바랐던 것(2)

지난 날의 피로가 싹 가신 것처럼 기분좋게 일어났다.
당연히 아침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높은 창에서 세어 들어오는 빛이 너무 약하다.
중간에 깬 건가 싶었지만 들어오는 빛은 하얀 색을 띠고 있었다. 어두운 게 아니라 흐린거다. 동시에 공기의 눅눅함도 피부로 느껴졌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비가 오려는 걸까.

나는 앓는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간밤에 에반젤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늦게 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니 조금 더 자도 되지 않을까 싶어 도로 팔을 베개 삼아 도로 누웠다.
당연한 얘기지만 수도원은 천장도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무가 아니라서 그런 건진 몰라도 바깥보다 더 추운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언제나처럼 쉬는 날이 아니라 미크로셀로 돌아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게 이제 일 마치고 쉬는 날이라는 건가.
아니면 이제 쉬러가는 건가?

뭐든간에 늦으면 스태로 아저씨를 비롯해 다른 애들에게도 좋은 소리 못들을 게 뻔했기 때문에 얼른 나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문의 문고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응?

몇 번씩 손목을 움직여보다 달각, 달각, 작은 소리만 내며 움찔댈뿐 확 돌아가주질 않는다. 혹시 자는 동안 내 손모가지의 힘이 아이만도 못해진게 아닐까 싶어 일부러 힘을 주고 돌려봐도 문고리는 돌아가지 않았다.

"야 뭐야 이거?!"

황당함을 기합삼아 지르며 양손으로 꽉 잡아돌려도 꿈쩍하질 않는다.
이게 왜 이러나 싶어 몇 번 두들겨봐도 요지부동이다.

''잠겼다...''

잠겨버렸다.
왜인지는 몰라도 이거 분명히 잠긴 것이다.

"아니 근데 왜 안에서 여는, 그게 없냐고!"

아휴, 나무 판에 불과한 문에다가 성질 부려봐야 무슨 대답이 돌아온다고, 다 부질없는 짓이기에 나는 바깥에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다.

"얘들아아아!"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내봤지만 별다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자는 걸수도 있고 아님 벌써 일어나서 내려가 있는 걸지도 모르고.

"저기요? 아무도 안 계세요?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다 아는데?"

만약 다들 일어났으면 지금쯤 내려가서 미사실에 있으려나.

"에반젤린! 레샤아! 야우라아아! 아저씨이이이!"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봐도 조용하다.
이 사람들이 오늘따라 왜이리 부지런하게 움직였지? 하여튼간에 어떤 식으로든 사람을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들이다.

나는 흐느적흐느적 움직여 도로 침대 위에 누웠다.
이렇게된 김에 갇힌 걸 핑계 삼아 더 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뭐 갈 때쯤 되서도 나타나지 않으면 대충 알아차리고 와보겠지.

...그러겠지.

"너희들 그럴거지?!"

누운 자세 그대로 소리쳐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똑 똑 똑...

아니 대답은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헐레벌떡 문으로 다가가 소리쳤다.

"으어! 안에 사람있어요, 사람! 갇혔다고."
-"시끄러워요, 레이크... 자다가 깼잖아요..."

레샤의 목소리였다.
이 녀석! 그래 너만큼은 게을렀구나 고맙다, 고마워.

"어어...! 야아! 레샤! 네가 거기서 문 좀 열어봐."
-"뭔가요, 그건... 그 정돈 알아서 하라고요... 손이 없어요, 발이 없어요, 레이크는 돈도 없잖아요...!"

자다깬 게 심히 불편했는지 레샤는 평소보다 매섭게 아픈 곳을 찔렀다.

"아니 갇혔다니까아! 넌 사람 말을 안 듣냐?"

나는 문에 다 대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레샤는 잠이 깬 듯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그럼 먼저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사무적인 목소리는 멀어지고 있었다.
가버린다, 정말 가버리려는거다. 나는 얼른 문앞에 얼굴을 붙이고 황급히 소리쳤다.

"에예예예예! 저기요, 레샤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뭘 잘못했는데요?"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잘못했습니다!"

바깥에서는 고민하는 레샤의 침음이 들렸다. 흐으음, 하고 즐거움 한가득으로 떨리는 소리.
얘도 알고보면 성격이 은근 나쁘다.

-"좋습니다, 이번엔 제가 용서하도록 하죠."

그렇게 말한 후 바깥에서 문고리를 돌리는 건지 달각달각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흔들렸다.
열리지 않는다.
그 다음엔 문이 아주 조금씩 앞뒤로 흔들렸다. 하지만 중요한 잠금쇠는 여전히 걸려있었기 때문에 그 차이만큼만 움직일뿐 끝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거 안 열리는데요...? 안에서 잠가놓고 이러는 거 아니죠...?"
"내가 바보냐? 거 바깥에 없어, 그런 거?"

-"그게 왜 바깥에 있어요... 있으면 안에 있지."
"아니 수도원이니까 왠지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레이크는 바보에요?"
"그래에 그러니까. 그..."

결국 그 양반을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젤 선도사, 그 사람 좀 불러다 줘."

열쇠를 가진 건 그 사람이니 방법은 그것 뿐이었다. 어제 일도 있고하니 엄청 껄끄러웠지만 별 수 없다.

-"예에...? 아... 그 사람은 조금..."

그러나 이번엔 레샤의 기세가 꺾여 약한 소리를 내었다.

"또 왜에,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플라나 사제잖아. 뭐가 문제인데."
-"아, 근데... 그... 그 사람 조금 그렇잖아요....! 저한테도 꺼지라고 하면 레이크가 책임질거에요?"
"진다. 내가 질게! 어?!"
-"어떻게 진다는 겁니까...!"
"내가 너 평생 업고다닌다, 진짜로!"


그리하여-

레샤가 데리러 간 이젤 에텔리어 선도사가 열쇠를 가지고 함께 올라왔다. 다행히 문이 고장난 게 아니라 정말 잠기기만 한거라서 열쇠만으로 나는 무사히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내가 말했던가 안 했던가. 이 방, 문이 고장나서 가끔 잠긴다고."

선도사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안 했어요."

나는 끓어오른 짜증이 표나지 않도록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아... 실수. 뭐 가끔 이런 사고가 일을 수도 있지. 혼자 지내다보니 신경 써야할 게 많아서."

노랗게 빛나는 황동열쇠가 선도사의 손안에서 얄밉게 반짝인다.
가끔씩 있는 사고라고?
푸, 하고 절로 바람을 뱉게 만드는 소리였다.

어쨌든 이젤이 손가락에 건 열쇠를 빙글빙글 돌리며 내려가고 나도 이제 좀 나가보려는 찰나 레샤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뭔가하여 쳐다보니 그 애는 대뜸 자기 앞의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뭐야. 왜 뭔데?"
"앉아요."

"왜?"
"평생 업고 다닌다면서요...!"

"뭐허?"

...그래.
그런 말을 했었다. 근데 그 이야기에는 조건이 붙어있지 않았나.
그 조건...
나는 레샤를 업고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도무지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야 진짜 너한테 꺼지라고 했다고?"
"그래요... 전 마음의 상처를 입었단 말입니다..."

레샤는 눈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했다.
약간 의심이 드는 건 사실인데 그렇다고하니 약속한대로 업어다드리는 수밖에 없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설마하니 진짜 평생 시키려고 하겠어.

아래 층, 미사실에는 이미 아저씨와 야우라가 있었고 에반젤린만 어디로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뜬금없이 레샤를 업고서 나타난 나를 보는 눈은 하나같이 의아함을 품고있만 무슨 일이 있었겠거니 싶은 건지 따로 묻지는 않았다.

"에반젤린은?"

나는 자는거나 다름없는 모습의 스태로 씨는 놔두고 앉아서 하품을 하고 있던 야우라에게 물었다.

"밥하러 갔어."
"혼자서?"

"아니. 그 밥 말아먹은 놈하고."

야우라는 이젤 에텔리어 선도사를 밥 말아먹은 놈이라고 불렀다.

"어? 둘이 같이? 그걸 가게 놔뒀어?"

어젯밤에도 그렇게 극을 드러내며 언쟁을 벌였는데 또 붙여놓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머리속에서 거침없이 에반젤린의 팔을 잡아당기며 꺼지라고 말하는 선도사의 영상이 스쳐지나간다.

"응. 사제님이 꼭 그래야겠다고 하던 걸."

꼭 그래야겠다고 했다니 그건 또 무슨 바람이 불어 그런걸까.

"그런데 레샤는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이번엔 야우라가 거꾸로 물었지만 딱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이젤 선도사가 나타나 우릴 식당으로 불렀다.
그 때는 나름대로 정중하게 굴었으므로 우리는 군말없이 그를 따랐다.

식당은 수도원의 사제들이 단체 식사를 하는데 사용하던 곳으로 조금은 삭막해 보여도 큰 나무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진 제대로된 곳이었다.
사실 여긴 시설은 다 제대로 되있었다. 다만 인기척이 없고 관리자라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이걸로 수도원이 져야할 의무는 끝났네? 아이고 좋다."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는 게 문제일까.
우리가 모두 식사를 마치자 이젤 선도사가 대뜸 꺼낸 이야기는 그거였다.
수도원이 이행할 의무는 더 이상 없다.
그러니 배달자인 너희들한테 뭔가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냉큼 꺼지라는 이야기 같았다.

"선도사님은 요리를 잘하시네요, 의외로."

가만히 듣고있던 에반젤린은 어제처럼 맞서는 게 아니라 그렇게 말했다.
자기가 한 말과는 전혀 상관없는 대답이 튀어나오자 이젤은 고개를 까닥이며 정교의 사제를 쳐다보았다.
그 표정이 뭔가 좀 심하다...

"정말 맛있었어요. 함께 먹는 식사자리는 참 좋아요. 그렇죠?"

에반젤린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잠깐 봤는데 재료손질하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시던 걸요?"

이쯤되자 이젤은 대놓고 언짢음을 시사했다.

"하고싶은 말이 뭐야?"
"말한 그대로에요. 다른 의도 같은 건 전혀 없어요."

에반젤린은 꿋꿋한 미소로 말했다.

"자매님이랑 유치한 장난할 생각없는데."
"선도사님한테 수도원에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듣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말이 안 통한다 생각한 것인지 이젤 선도사는 가만히 앉아있던 스태로 씨에게 주의를 돌렸다.

"슬슬 내려가지. 갈 길이 머실텐데."
"미안하지만 힘들겠는데요."

아저씨는 아직도 잠이 덜 깬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도 마음에 안드는 대답이 나오자 이젤 선도사는 화를 내기보단 오히려 피식 웃었다.

"힘들다고?
"비가 오잖수. 왜 이렇게 못 보내 안달이야. 뭐 숨기는 거라도 있나?"

"숨기는 거? 그런 게 어딨어. 이까짓 돌맹이 모아 만든 가짜 성에."

그 순간엔 에반젤린의 미소가 살짝 어그러진 것도 같았다. 수도원 자체를 깎아내리는 말에 하마터면 넘어갈뻔한 모양이다.

아까부터 계속되는 이상한 기싸움이 제일 불편한 건 도리어 레샤인 것 같았다.

"그냥 가면 안 되는 겁니까...?"
"비가 오면 좀 그렇지, 아무래도."

나는 대강 그렇게만 이야기했다.
안카라를 내려가는 길이 안 그래도 험한데 비에 젖어서 미끄럽기까지 하면 그건 최악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리고 비 맞으면서 가라니 너무한 거 아니우?"

그런 문제도 있었다.
뒤에타는 우리야 캐노피가 있지만 아저씨한텐 아무것도 없었다. 이왕 만드는 김에 마부석에도 비막이를 달아두면 좋았겠지만 성당의 짐마차가 그렇게까지 되어있진 않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스태로 씨! 플라나는 곤경에 빠진 분들을 절대 외면하지 않아요!"

어째서인지 대답은 에반젤린이 했다.
반드시 그렇게 될거라는 듯 두 주먹까지 꽉쥐고.

"아하! 역시 우리 사제님뿐이라니까!"

스태로 씨는 징그럽게시리 윙크까지 해가며 밝은 목소리로 호응한다.

선도사를 놔두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두 사람에 대해서 이젤 선도사는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흉흉한 표정으로 "좋을대로 하쇼." 라고만 말했다.

"야 밥 말아먹은 놈!"

가만히 있던 야우라가 대뜸 이젤 선도사를 불렀다.
코 앞에서 그렇게 불러버리니 레샤가 뜨악한 얼굴로 야우라의 팔을 흔들었다.

"뭐냐 귀쟁이."

이젤의 목소리는 평범한 어조였지만 내용물은 평범하지 않았다. 엘프를 귀쟁이라고 부르는 건 상당히 차별적인 표현인지라 그 순간에도 에반젤린의 미소가 살짝 무너질뻔 했다.

"화장실은 어디야?"

그런 것엔 크게 개의치 않는 누님, 야우라는 자기 할 말 그대로 이어나갔다.

"밖에 있어."
"밖에 있겠지, 그러니까 어디냐고."

야우라에겐 귀쟁이라는 표현보다 그 두루뭉술한 설명이 더 마음에 안드는 것처럼 보였다.

"밖에 있어. 잘 찾아봐, 아이고 근데 밖에 비가 오네?"
"...밥 말아먹은 놈!"

잔뜩 날이 선 호칭에도 이젤 선도사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에반젤린이 얼른 야우라에게 갔다.

"제가 같이 찾아드릴게요, 야우라 님. 우산도 찾아놨어요."

그런 건 또 언제 찾았을까.

"수도원의 자산을 왜 자매님이 맘대로 쓰나."
"플라나는 자산이 없어요. 그렇죠 선도사님?"

나긋나긋 할 말은 다 하는 에반젤린.
하, 하고 헛웃음을 낸 이젤 선도사는 느지막히 입을 열었다.

"맘대로 하쇼."

에반젤린은 으르렁 거리는 야우라를 어르고 달래 밖으로 데리고 나갔고 레샤가 함께 따라나갔다.
이 불편함을 견디느니 비를 맞겠다는 건가.

"에휴, 그럼 비 그칠 때까지 조금만 더 잘까."

스태로 씨도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어쩌다 이렇게 된건진 모르겠는데. 그리하여 식당에는 나랑 이젤 선도사 둘밖에 남지 않게 되버린 것이다. 정말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자연스레 눈동자가 굴러 이젤 선도사를 향했지만 그는 그저 다 먹은 접시를 치우고 있었다.

접시를 치운다.
그 언행 불량한 인간이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참 아리송한 사람이다.

"저기, 선도사님."
"그 쪽은 날 선도사라고 생각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이젤 선도사는 나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체 대꾸만했다.

"왜 그렇게 우리를 싫어하세요?"
"싫어하는 것 같아?"

"보기엔 그렇죠."

그 무렵 테이블 위의 접시와 스푼들을 모두 모아 한 곳에 포개놓은 선도사는 드디어, 테이블 위에 손을 짚고 날 보았다.

"아니, 그냥 귀찮은 거야. 내가 댁들한테 무슨 원수를 졌다고."
"그럼 안내는 왜 해주신거에요."

어째서 성 세피스까지 안내하는 수고를 다 하셨냐는 물음에 말문이 막힌 선도사는 혓바닥으로 앞니를 훓었다.

"그럼 에반젤린을 싫어하시는 거겠네요. 아니, 정교를 싫어하는 건가."
"싫어하는 게 아니야. 그냥 정교 사람을 보면 놀리고 싶은 거 뿐이지.''

"그게 싫어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미크로셀로 돌아가면 나를 파계사라고 신고라도 할 건가?"

"대답에 따라서요?"
"...너도 좀 꺼져주면 안되겠니."

내가 가만히 서있기만 하자 이젤 선도사는 아이씨, 하며 분을 내뱉었다.

"난 바보 같은 놈들이 싫어. 그냥 그런거야."
"정교가, 아니 에반젤린이 바보라는거에요?"

"전부 다. 길도 못찾는 그 양반이나. 방에 혼자 갇히는 너나. 화장실이나 물어보는 귀쟁이나. 저 위 쪽의 늙은이들까지."
"피츠랑 그 애의 할머니도요?"

"그래, 안카라에서 내려가라고 몇 번을 말했는지 기억도 안 나네."
"사냥에 방해가 되서요?"

"하하하, 사냥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구나."

이번엔 상대방을 약 올리기 위해내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 웃음소리였다.

"그래서 바보라는 거야. 너희들이 가져다 준 물건들. 운반하느라 힘들었겠지만 사실 필요없어. 그게 없었어도 누가 굶어 죽을 일은 없었을테니까."
"다른 수도승들은 선도사님이 쫓아낸건가요?"

"글쎄? 흐흐하하하..."

낮은 웃음을 흘리던 선도사는 이번엔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물어보는 것밖에 안 하네? 스스로 생각해 볼 생각은 안 해?"
"지금 생각났어요. 수도원이 필요한 이유."

수도사는 뭔지 한 번 들어보자 하는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 올렸다.

"선도사님 같은 분을 짱박아 놓으려고 그런 거 같네요."
"비가 그치는대로 밤이든 낮이든 수도원에서 꺼져. 특히 그 몽유병 아저씨한테도 그렇게 제대로 전해."

"몽유병 아저씨요?"

갑자기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스태로 씨가 그런 병도 가지고 있었나. 허리도 그렇게 아파하더만 가지고 있는 지병이 한 둘이 아니었나보다.

"뭐 그게 아니면 다른 거겠지."

그 말을 끝으로 이젤 선도사는 설거지 거리들을 들고 나가버렸다.

혼자밖에 살지 않는 수도원은 그렇게 또 다시 조용해졌다.

"으아아악!"

그 적막도 왠지 짜증나서 나는 허공에 냅다 소리쳐버렸다.
저 인간 대체 뭐냐고. 뭔데 저렇게 배배꼬여가지고 사람 열불터지게 하는 거냐고.
저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도 하나하나 열불 터뜨려 죽이기라도 한건가.

나는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자리에서 일어나 수도원 모험에 나섰다. 일 평생 올 일도 없는 곳, 구경이라도 실컷 해두자. 하여 본당 전체를 돌았다.

간간히 뚫려있는 창 사이로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들이 보였다.
칙칙한 수도원의 벽이 칙칙한 날씨에 녹아들어 칙칙한 분위기가 한가득.

달빛 아래에서, 분지의 위에서 처음봤던 그 신비한 감상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이건 내가 삭막한 게 아니다. 아무튼 그랬다.

역시 나도 올라가서 자버릴까. 그런 생각이 들무렵 누군가 뛰어다니는 발소리가 빗소리 밖에 없던 조용한 공간 속에 울렸다.

"레이크 님!"

에반젤린이 걸음 반 달리기 반의 보조로 나타나 날 불렀다.
같이 나갔던 야우라와 레샤는 보이지 않고 혼자였다. 계속 뛰어다녔던 것인지 한 차례 숨을 고른 그 애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야우라 님이랑 레샤 님 못보셨어요?"
"아니 못봤는데?"

"잠깐 한 눈 판 사이에 사라지셨네요. 아직 화장실도 못 찾았는데."

아직도 못 찾았어?
그럼 혹시 실수하는 거 아니야? 방랑검사 야우라의 실수...?
어우...

"그거 큰 일이네..."

자칫하면 대형사고로 이어질수도 있는 큰 일.

"맞아요, 우산을 안 가지고 가셔서 빨리 찾아야 하는데..."

에반젤린은 성당에서 간혹 행사용으로 사용하는 흰 우산을 들어보였다.
하긴 갑자기 우산을 어디서 나나 했더니 그렇게 쓰는 방법이 있었다. 눈치 볼 사람이 없다는 건 이런 거구나.

그렇게 소소한 탄성을 흘릴 무렵.
바깥에서 날 선 비명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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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14 21:09 | 조회 : 200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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