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고 싶었어(2)

뜨겁다. 뜨겁고 또 뜨겁다.
봄철의 햇살은 아직 뙤약볕이라고 부를수도 없을만큼 약해빠졌을 터인데 왜 이렇게 뜨거울까.
도끼질은 좀 더 익숙한 사람들이 하고 있기에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별게 아니었다. 삽으로 땅을 파서 개 중에 쓸만한 큰 돌을 골라내 자루에 담아 따로 옮기는 것. 딱히 기술도 필요없고 덜 위험한 건 좋은데 삽 한 번 풀 때마다 기온이 1도씩 더 올라가는 것 같다.

갑작스럽지만 왜 이런 일을 하는가.
영지관에서 지역단위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지관은 영주님의 직속 사무기관이다.

그러니...
아니, 처음부터 따져보자 그러니까 사족을 엄청나게 붙이자면.

국왕폐하가 궁중 마학사와 먼저 상의하여 초안을 짠 정책이 의원들과 국무회의를 거쳐 좀 더 현실적이고 정갈한 사안이 된 뒤 궁무처장에게 전달되어 예산등을 검토하게 되고 거기서 통과하면 중앙청으로 내려가게된다.
다시 중앙청장은 그 정책에 해당되는 지역을 가려내고 각지의 영주들에게 하달하여 그걸 전달받은 영주는 그 전서를 면밀히 확인하고 해석한 후 각 지방의 형편에 맞게 수정한 뒤 영지관으로 내려보낸다. 그리고 그게 영지민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후우...
금방 다 까먹을 줄 알았는데 용케도 기억하고 있다.
이거 문제 나왔으면 무조건 맞췄을텐데.

맞추긴, 퍽이나 맞추겠다.
이제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내가 기억하냐 못하냐가 아니라 무진장 어께가 뻐근하다는 거였다.
검술과 삽질은 역시 조금 다른 걸까.

"어이, 레이크. 좀 쉬었다 하자."

함께 작업하고 있던 보르넬 씨가 내 옷깃을 잡아 끌어당겼다.
말만 권유하고 있지 사람 다루는 게 거칠다, 뭐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보르넬 씨는 벌목장 인근에 작대기 4개를 이용해 세워둔 천막의 그늘 아래로 숨었다. 나도 곧 그늘 아래로 내려가 아저씨와는 약간 떨어진 곳에 앉았다.
근육질 아저씨 옆은 덥다...

"비나 왔으면 좋겠네요."

나는 연신 손부채질을 반복하며 말했다.

"그건 안 되지."

보르넬 씨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왜요?"

역시 아저씨는 이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걸까.

"집에서 육포 말리고 있어."
"아아..."

시간은 흘러-
쉴 거 다 쉬고 땅파고 돌파고 꺼내고 담아서 옮겨서 수레에 싣고 남은 흙은 옮기거나 채워넣거나 버리거나를 끝없이 반복하다보니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샌가 벌써 점심 때가 되었다.
마을 단위 사업의 좋은 점이 무엇인가. 바로 점심이 제공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나는 삼시세끼 중 두 끼를 적당히 때울 수 있었다.
만세!

식사는 다른 곳이 아니라 시내에 있는 플라나의 성당에서 맡아주기로 했다.
성당에서 보낸 봉사단이 음식이 담긴 수레를 이끌고 벌목장까지 왔다. 그 중엔 에반젤린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아침에 클로에와 이야기했던 에반젤린의 할 일이라는 건 바로 이걸 말하는 거였다.

천막 아래에 간이 테이블을 세우고 그 위에 각종 통들을 세워 그럴듯한 배식소를 만들어낸 봉사단은 곧장 배식을 시작했다.
아저씨들에게 에반젤린의 인기는 단연 최고였다. 그 애가 배식을 맡은 수프 앞에서는 조금 더 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워낙 상냥하다보니 수녀님이라는 패널티를 끼고도 묘하게 인기가 좋다.
그런데 그 옆에서 노려보는 나이 지긋한 수녀님의 눈빛이 싸늘하다.
줄 막고 있는 게 마음에 안드시나 본데...

아무튼 나도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 줄 끄트머리에 서서 배식을 받았다. 배식소가 만들어진 천막은 이래저래 사람이 많은지라, 형태가 나빠 베지 않기로 한 나무의 아래에 자리잡았다.
오늘의 점심은 옥수수가 들어간 으깬 감자와 작은 빵.
음 어제와 완벽히 똑같군. 후식으로는 방울토마토를 받았다.
빵과 감자는 맛있게 먹었다.
문제는 방울토마토인가.

나는 커다란 나무 접시 위에서 올려진 세 개의 방울토마토를 손가락으로 굴렸다.

딱히 못 먹는건 아니다.
하지만 그냥 뭔가 조금 뭐랄까 약간 그렇달까 깨물었을 때의 식감도 그렇고 그 때 터져나오는 신맛의 즙도 그렇고...
그러니 슬며시 나무 뒤편으로 돌아가서.

"...어디가세요?"
"으아아아악!"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에반젤린의 목소리에 나는 있는 최대 출력의 비명을 질렀다.
배식이 벌써 끝난건가?

"아니야, 아니라고! 버리려고 한 거 아니야! 땅에 묻으려고 한 게 아니란 말이야! 나무 뒤로 가서 먹으려고 했어. 방울토마토를 먹는 거 다른 사람이 보면 부끄러우니까!"

내가 생각해도 참 시답잖은 변명이다 싶었다.

"아... 그러신가요? 레이크님한테 그런 소녀같은 마음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제가 좀 더 신경썼어야 했는데..."
"차라리 그냥 딴죽을 걸어!"

그게 뭐야. 요즘 여자애들은 방울토마토 먹을 때 누가 보는 걸 진짜로 신경쓰는거야?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인데.

"그럼 아무쪼록 저는 신경 쓰지말고 어서 드세요."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는 에반젤린과 접시 위의 방울토마토.
방울토마토... 그리고 지켜보는 에반젤린...
아니 지금 중요한 건 방울토마토였다.
별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당연히 먹을 수 있다. 먹어야지. 먹어야한다.
슬쩍 눈동자를 굴려보니 여전히 에반젤린이 지켜보고 있다.

"왜요? 어서 드세요."
"꼭 먹어야 하는걸까...?"

"음식을 남기면 안되잖아요."

너무 평범하게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 음식을 남기면 안 되지.
하지만 나는 선뜻 방울토마토를 집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내 깊은 자의식에게 주장하지만 나는 못 먹는 게 아니다.
안 먹는거라고. 방울토마토가 얼마나 위험한 음식인데.
어릴 때 먹기 싫어서 통째로 꿀꺽 삼키려다가 목이 막히는 바람에 죽을 뻔한 이후로는 그냥 안 먹는 거였다.
왜 사람이 일부러 죽을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해야하냔 말이다.

"어서요."

어쩐지 재촉하는 에반젤린의 기분이 좋아보인다.
아니 확실히 내가 곤란해 하는 걸 환영하는 눈치였다.

"너 나한테 왜 그래?"
"아이 참 레이크님도 이럴 땐 애 같다니까요. 자, 아아."

에반젤린이 방울토마토 하나를 집어들어 내 입으로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한 번 더 아아, 하고 입을 열기를 종용한다.

"저 팔 떨어질지도 몰라요."

아 진짜 먹기 싫다고.
그렇게 말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 그렇게 못 먹여서 안달인 건데."
"이른 아침부터 다들 열심히 준비한건데 남으면 아쉽잖아요..."

아니... 이... 그...
하아, 결국 나는 한숨을 쉬고선 입을 열었다. 저렇게 말하는데 어쩌겠는가. 먹는다고 진짜 죽는 것도 아니고 죽을 수도 있을 뿐이지. 그 땐 깜짝 놀란 동생의 복부강타가 아니었으면 죽을뻔했다. 아니 그거 때문에도 죽을뻔 했던 거 같기도 하고.
옛날 일이야 어떻든 방울토마토는 입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깨물지 않고 혀로 굴려보면 의외로 무른 사탕 같긴하다. 동글동글한거까지 많이 비슷하다, 맛없는 점만 빼면.

그냥 삼킬까?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준 사람 성의가 있지 어떻게 그러나.
그건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였다.
어쩔 수 없이 어금니 사이의 방울토마토를 깨물자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익숙해지지 않는 맛이다. 풀 껍데기 맛같기도 하고 깨작깨작 씹어서 겨우겨우 삼키자
으어어 혓바닥에서 얇은 종이가 붙은 거 같다.

"레이크님? 남은 두 개는 왜 주머니에 넣으세요?"
"있다가 먹을거야, 있다가..."

기어코 다 먹이고 마려는 의지의 에반젤린에게 난 그렇게 말했다.
나중에 나 말고 대지의 정령이 잡술 것이다.

"좋아하는 거 아껴먹는 성격이셨군요?"

거기에 좋은 건 양보하는 성정도 가지고 있지.
양심에는 좀 찔리지만 이런게 있다면 저런 것도 있는거였다.
그런 의미에서...

"너... 저기 성당 사람들한테 안가봐도 돼?"
"네."

당연한 것처럼 대답하는 에반젤린.
덕분에 나만 벙쪄 눈만 껌뻑이게 되었다. 자세한 내막이야 몰라도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야. 레이크 너 방울토마토 못먹냐?"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건지 보르넬 씨가 빵덩이를 우물거리며 다 지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닌데요."
"하! 하! 하! 하! 걱정하지마, 이 아저씨는 아직도 오이를 못 먹는다. 냄새가 싫거든!"

그거 자랑 아니거든요? 그것보다 오이가 무슨 냄새가 난다고.
게다가 계속 반복되는 사실이지만 난 방울토마토를 못 먹는 게 아니다. 안먹는거다.

"아니라니까요."
"하! 하! 하! 하! 부끄러워할 거 없다니까!"

이 아저씨 사람 말 들을 생각이 없네, 진짜.
그렇게 보르넬 씨에게 등이나 두들김 당하면서 비나 확 쏟아져버려라 생각할 무렵.
정말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먹구름은 스멀스멀 나타나 빗방울을 떨어뜨렸다.

나무며 천막의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이 멍하니 비가 떨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소나기는 아니라서 다행히 마구 쏟아지지는 않았지만 또 금방 그치지도 않아서, 이거... 작업을 계속 진행하기는 다소 무리가 있어보인다.

헤헤.

"레이크님 왜 그렇게 웃으세요?"
"흐흠. 아니 그냥. 크흠."

나는 제멋대로 올라가버리는 고약한 입꼬리를 손으로 끌어 내렸다.

"이대로면 오늘은 이걸로 땡치겠는데?"

보르넬 씨가 말했다.
아저씨는 복잡 미묘했던 눈을 감고 침음을 흘렸다.
또 뭔 소릴 하실라고 저러나, 가만히 지켜보니 아저씨가 번쩍 눈을 뜨고 말했다.

"날씨도 어두워졌고 하니 불가사의한 얘기를 하나 해주마."

뭔가 잘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할 말이 없었다.

"...뭐에요, 갑자기."
"어차피 오늘은 땡이라고 관리님이 얘기하기 전까지는 따로 할 일도 없고. 마침 비하고 관련된 얘기기도 하고."

나만 납득이 안 가는 건가 싶어서 에반젤린을 보니 흥미로운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수녀님은 듣고 싶으시구나."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에반젤린.
아 벌써부터 뭔가 불길한 기분이...

"원래 나무꾼들은 대부분 혼자서 일하다보니 이렇게 천막 쳐놓는 경우는 거의 없지. 그래서 일하다가 갑자기 비가 오면 가까이에 있는 동굴에 숨기도 해. 소나기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면 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기는 너무 춥거든. 애써 한 나무도 가능하면 젖지 않는게 좋고. 그런데 말이야..."
"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제 그만..."

이야기의 분기가 느껴진 순간 나는 사전 차단을 시도했지만.

"아니 들어봐 본편은 지금부터니까."

보르넬 씨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동굴이 말이야. 나도 이건 친구한테 들은건데... 이 밑에, 남쪽 숲을 조금 들어가다보면 작은 굴이 하나 있데 동물이 파놓은 굴인지 동굴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떤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들어갔다가 소나기를 만나는 바람에 그 동굴에 들어가게 된거야..."

에반젤린이 내게 가까이 붙어 소매자락을 꽉 쥐고 흔들었다.
무섭기라도 한 걸까, 그렇게 무서운 얘기도 아닌데... 싶어 표정을 살피니 약간 웃고 있다.
어어 아주 흥미진진해 하고 계시네?

"그렇게 잠깐 비를 피하고 있었는데 동굴의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거야. 쿠우웅... 쿠우웅... 하고 말이야."

아아 슬슬 소매를 잡힌 팔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 소리의 정체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던 나무꾼은 귀를 기울이고 안쪽으로 들어갔데. 쿠우웅... 쿠우웅... 하는 소리는 점점 커지다가. 어느 순간!"

아 팔에 피가 안 통한다!

"쿠와아아아! 하는 소리가 나고!"
"그래서요? 나무꾼은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에반젤린의 질문에 뒤통수를 긁적이던 보르넬 씨는 툭, 그 결말을 공개했다.

"깜짝 놀라서 그냥 밖으로 도망쳐버렸데."
"뭐에요, 그게."

하도 맥이 풀려서 별 관심도 없었던 내가 틱틱 거릴 정도였다.

"뭐 미스테리란 게 다 그렇지.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냈으면 이런 얘기가 돌겠니?"

듣고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것보다 지금 더 무서운 게 생각났다."
"뭔데요."
"육포."

그 한 단어를 남긴 보르넬 씨는 순식간에 빗속을 뚫고 마을을 향해 달려 나갔다. 나중에 관리님이 물어보면 보르넬 씨는 건강상의 문제로 조기 퇴근을 했다고 이야기 해야할 듯 싶었다.
병명은 감기쯤이면 되려나.

그보다는 옆에서 굉장히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게 문제였다.
조심스럽게 옆을 돌아보니 역시나 에반젤린이 뭔가 엄청나게 기대하는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왜, 왜 날 봐...

"저런 얘기는 실제로는 대부분 별 것도 아니야."

나는 말없이 보고만 있는 에반젤린에게 손사래쳤다.

"별 것도 아니라니까."

"막상 가서 확인해보면 엄청 실망할 걸?"

"진짜로!"

"...진짜 실망한다니까?"

아 글쎄 그러니까...

0
이번 화 신고 2019-02-08 06:57 | 조회 : 522 목록
작가의 말
죄수번호53425854

그렇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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