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고 싶었어(1)

일어날 때는 항상 눈이 뻔쩍 뜨인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다. 그 직후엔 또 졸리기 때문이다. 뻔히 졸릴 걸 알면서도 왜 일어나게 되는 걸까.

운이 좋게 잡은 방의 창이 동쪽으로 나있기 때문에 햇살을 받아 마지못해 일어나게 되는걸지 모르겠다.
일어난 다음 가장 먼저 하는 건 일단 가만히 있기. 그 다음 목소리 한 번 내보기. 십중팔구는 목소리 같지도 않은 눅눅한 소리가 나온다. 헛기침으로 목을 한 번 풀고나면 기지개를 켠다.

그 다음은 담요를 걷어내고 일어나 앉는다. 그러면 벽 한 켠에 세워놓은 검이 보인다. 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공교롭게도 자리와 위치가 그렇다. 벌써 몇 주째 저 자리에 가만히 서있기만하니 혹시 벽과 붙어버린 건 아닌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괜히 만져보기도 귀찮은지라 방치되버리고 말았다.

...조용하다. 어쩌면 오늘은 일찍 일어났을지도.

똑 똑 똑

더 잘까 싶어 발라당 누울 준비를하다가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 걸 들으니 그리 이른 시간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 소리가 들리면 그냥 평소처럼 일어난 것이다.

누군가 노크를 했으니 그 다음은 하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발을 디딘다. 발목에서 뚜둑 하고 찌뿌둥한 소리를 낸다.
나는 엉망진창일 머리를 정리하듯 뒤통수를 긁으며 문을 연다.
문 앞에는 꽁지머리 레샤가 당연한 것처럼 책 두권을 내밀고 있다. 내가 빌려준 로망소설이다.
아침부터 로브차림에 스태프까지 준비가 아주 꼼꼼하다.

"다 봤으니까 다음 권 부탁드리겠습니다."

얼마전까지는 관심없는 체 하더니 요새는 푹빠져 산다. 안 그래도 음영짙던 눈가가 더 시커매진 것 같다.

"넌 인사도 할 줄 모르냐?"

이 즈음엔 말과 하품이 뒤섞인다.

"예에? '잘 잤어요?' 같은 소리를 굳이 듣고 싶은겁니까?"

아 그러시겠다?
내가 도로 문을 닫으려고 하자 레샤가 엘렐렐렐레! 하는 괴성을 내며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간밤에 별고는 없으셨는지요오...!"

그렇게 굳이 인사를 받고나면 나는 따로 골라두었던 다음 권을 그 애에게 주었다.
이맘때 쯤이면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이게 그렇게 힘들고 귀찮은 일은 아니더라도 항상 이러는 건 약간 문제가 아닌가 싶었다.

"다음부턴 네가 직접 가서 빌려라. 나한테 와봐야 빌린 걸 또 빌려주는 것밖에 안된다고."
"엑, 아... 저... 그건 쪼끔..."

이 대화도 꽤나 자주하는 것 같다.

"자주 들른다고 점원이 너한테 짜증내진 않아. 정 뭣하면 도서관으로 가던지."

정곡을 찌린 것인지 레샤가 태도를 확 고치곤 성을 내었다.

"레, 레이크가 보는 게 재미있으니까 레이크한테 빌리는 거죠...! 소설 판독기로서의 기능을 빼면 레이크한테 뭐가 남습니까...?!"
"뭐어?"

내가 손을 뻗자 레샤는 잽싸게 책을 뒤로 빼 뺏지 못하게 만들었다.
딱 거기까지. 아직은 잠이 덜 깰 때라 이것저것 더 따지고들 기운이 없었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먹고 살래?"
"뭔가요...! 그거 레이크한테 들을 말은 아닌 거 같습니다만...!"

애초에 자기는 정기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뭐다, 쏼라쏼라... 하는 거 같지만 나는 적당히 대꾸하고 얼버무려 레샤를 돌려보냈다. 돌아가던지 가던 길 가던지 하겠지.
그 다음엔 문을 닫고 옷을 갈아 입는다. 특별할 것없이 활동하기에 편한 복장. 옷도 얼마 없어서 남들이 보면 거의 제복이나 다름없었다.
마지막으로 결리는 부분을 짧은 체조로 풀어주고 난 다음에는 수도가로 나가 간단히 씼었다.

하늘그림의 옆에는 수로와 수조를 이용한 수도가가 있었다.
그곳애선 아주 높은 확률로 헤세를 만날 수 있었다. 흔히들 그냥 낚시꾼이라고 부르는 녀석, 나한텐 그냥 옆 방 동료이자 친구였다.
머리에 흰 두건을 쓰고서 느긋하게 움직이는 헤세의 꼴을 보면 낚시는 언제하나 싶지만 사실 낚시대 가지고 다니는 걸 한 번도 못봤다.
별명은 그저 별명인가.

"너 늦은 거 아니냐?"

그래도 매일 아침 어딘가 가긴 하여 그렇게 물었더니.

"늦었지, 많이 늦었지."

헤세는 연거푸 얼굴에 물칠을 하며 말했다.

"그런 거 치곤 꽤 여유롭다?"
"이미 늦은거다. 그렇다면 얼마를 늦든, 늦은 건 똑같지 않나?"

이미 모든 걸 달관한 얼굴로, 헤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넌 언제봐도 천재적인 인생관을 가진 거 같아."
"그래도 조금 불안하니까 먼저 간다!"
"어어, 그래."

물기도 제대로 닦지 않고 달려나가는 헤세.
뭘하는진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라, 하고 속으로 응원해주고나면 나는 다시 하늘그림 안으로 돌아갔다.

현재 내가 몸을 맡기고, 저당 잡히고, 생활하는 이 하숙집 하늘그림은 일층이 작은 레스토랑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대 여섯개의 테이블과 바, 작은 단상에 피아노까지. 작은듯 하다가도 의외로 넓고 넓은가 싶으면 작고 적당히 아늑한 기분이 드는 좋은 곳이었다.
거기에 값도 싸고.

아무튼 왜 그렇게 느껴지는가 하니 여기가 원래 여행자들의 여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디 미크로셀이 소위 말하는 모험가, 혹은 사냥꾼들이 많이 모여드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사람들을 위한 하루 숙박용 여관으로 만들어졌지만 후에는 수도와 가깝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여 평민기사를 준비하는 이들이나 필요한 물건을 쉽게 구할 수 있고 또 오래 틀어박힐 곳을 찾아다니던 가난한 마법사들이 찾는 일이 잦아 전략을 그쪽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금씩 확장되고 변화했어도 작은 여관이었던 흔적이 아직 남아있는 거다.

그 테이블 중 적당히 하나 골라 잡아 앉아있으면 엄청 못마땅해 보이는 클로에가 다가와 한 마디 쏘아붙인다.

"넌 낯 뜨겁지도 않냐? 되게 자연스럽게 앉아있네."

하늘그림에서는 하숙생들에게 아침을 준다. 공짜라기보다는 월세에 포함되어있다고 보는 편이 더 알맞은, 그런 서비스.
바꿔말하면 월세 한 달치 밀려있는 인간은 줄 필요가 없는 것.

"에이, 나 노는 거 아니라는 거 알잖아."

하여 능청을 부려봐도.

"허이고 뭐 얼마나 대단한 거 하신다고?"

클로에는 핀잔으로 맞받아쳤다.

"이게 무슨 소리셔. 내가 어제만해도 삽질에 대한 숙련도를 35정도 올렸다고. 너가 몰라서 그렇지 이거 대단한거야."
"삼십오? 그거 어디서 만든 기준인데?"

그리 구체적으로 물으신다면...

"...내 마음이 그렇다는거지."
"잘나셨어."

그래도 웃는 얼굴로 뻗대고 있으면 클로에는 마지못해 나에게도 빵과 수프를 가져다 주었다.
푸념은 당연히 딸려온다.

"그래... 돈도 먹어야 갚을 수 있으니까."
"오래 사실겁니다."

일단 빵 한 귀퉁이를 찢어 스프접시에 담갔던 나는 빵조각을 집은 손을 멈추고 잠깐 생각했다.
클로에는 아침 준비를 혼자 하지 않는다. 하숙생 중에 몇 명 당번을 신청받아 함께한다. 그러면 대신 당번들의 세는 어느정도 깎아주는 것이다.
갑자기 엄청 궁금한 점이 생긴 나는 클로에를 불렀다.

"있잖아."
"응?"

또 뭔 소릴하나 싶은 클로에가 고개를 돌렸다.

"아침 당번은 월세 얼마나 깎아줘?"
"일단 넌 일찍 못 일어나서 안 돼."

단칼.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 그렇게 거절해버리니 괜히 오기가 생겼다.

"안할거야아... 내가 언제 하고 싶다고 말했어어? 그런 거 하러 여기 온 게 아니라고, 나느은...!"
"그래그래, 하지마. 누가 뭐래니?"

가볍게 웃어넘기는 클로에에게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홧김에 제 무덤을 파버린 덕에 이제 당번과의 인연을 물건너가게 되었다.
뭐 어때 애초에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수프 범벅의 빵조각을 입에 넣었다.
어차피 안 하고 싶었다고...

"그러고보니 에반젤린은? 요샌 좀 늦게 오네? 마침 줄 게 생겼는데."

주변을 한 번 돌아본 클로에가 물었다.
여기 일이 여간 많은 게 아니다보니 클로에는 에반젤린이 오는 걸 아주 좋아했다. 딱히 일을 도와줘서라기보단 인간적으로도 좋아하는 거 같지만, 안타깝게도.

"그 애도 그 애의 할 일이 있지요."

어느샌가 내가 항상 에반젤린과 같이 다니는 것처럼 취급 되어졌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았다. 에반젤린은 시내에 있는 교회에서 지내고 있었고 거기 일을 돕다가 시간이 날 때면 이쪽으로 오는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특별한 날이 아니면 대체로 교회가 한가한 모양인지 자주 왔으니 결국은 그게 그거인가.

"하긴, 너 같은 놈이랑 같이 다니는 것보단 그게 백 배낫지."

확실히 사제님이란 의료라던가 기타 여러부분에서 뛰어난 인재이긴 하다. 그렇데도.

"아니 잠깐만. 내가 잘났다는 건 아니지만 내가 뭐 어때서? 그리고 내가 뭐 에반젤린을 맘대로 끌고다니고 그러는 건 아니잖아?"

변명, 아니 변명이 아니라 반론을 해도 의심스럽게만 쳐다보던 클로에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듯 박수를 쳤다.

"아 맞아, 너 이렇게 늑장부려도 돼?"

하이고 별 걱정을 다 하신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안되지!

그리하여-
내가 새삼 깨닫게 된 사실은 뭐 먹고 뛰면 배가 아프다는 것과 아침형 인간이든 새벽형 인간이든 점심이든 저녁이든 뭐든간에 그냥 일찍 일어나는 게 마음 편하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난 둘 다 아니지만.

내가 죽어라고 뛰어온 이곳은 트리마켓을 중심으로 둥글게 형성된 마을, 미크로셀의 외곽 어디 한 군데, 특별히 정해진 이름이 없다. 구분지을 방법이라면 남쪽의 숲이라는 것 정도.
정확히 말하면 이 근방이 거진 산간지형이다보니 마을과, 농지로 쓰는 북쪽의 평원을 뺀 주변은 모조리 숲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나는 무릎을 집고 서서 숨을 헐떡였다.
다행히 늦진 않았지만 이미 다른 사람들은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오! 레이크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구나!"

턱수염을 짧게 기른 보르넬 씨가 어께동무하듯 팔로 내 목을 조였다.
보르넬 씨는 마을 한 켠에서 목공소가 아닌 개인적으로 목수 일을 하는 분으로 작년에 하늘그림의 비가 새는 천장의 수리를 의뢰받은 적이 있는 분이다. 그 외에도 힘 좀 쓸 것 같은 근육질 아저씨들이 가득했지만 이미 면식이 있는 건 보르넬 씨가 유일했다.

"오늘은 무슨 일을 하는 건가요?"

나는 요령 좋게 보르넬 씨의 조이기를 풀어내고 말했다.

"아 오늘은 나무를 하러 간데. 아무래도 목책을 만드는거니까"
"그닥 즐거운 일은 아니네요."

농담삼아 한 얘기에 보르넬 씨가 멀뚱히 내려다보더니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또 내 목에 조이기 같은 어께동무를 걸었다.

"뭐, 그렇지! 하! 하! 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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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8 06:56 | 조회 : 533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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