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게 됐습니다(4)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용인들을 밖으로 물린 트리샤는 소파 위에 올라가 앉아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볼 때야 재미있긴한데 그녀가 받았을 정신적 피곤함도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이제 사과도 했으니까 너희는 너희 집에 가."

왠지 토라져버린 트리샤가 말했다.
그리고는 뭔가 읊조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도 있지, 이런 귀찮은 걸 떠넘기기나하고... 자기는 은퇴했다고 혼자 핑핑 놀고. 이까짓 상단 처음부터 없었으면 좋았을텐데."

뭐... 트리샤의 입장에선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거랑 내 배알이 꼴리는 건 다른 문제였다.

"이 여자 뭔가 배부른 소리를 하는데요...?"

조곤조곤 들려오는 레샤의 참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보면, 처음에 아가씨말고 주인님이라 부르라고 박박 우기던 것치고는 무진장 책임감 없는 소리였다.

"이딴 금수저 엿바꿔 먹는 소리 듣고 싶지 않으니까 레이크가 어떻게 좀 해보시죠."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레샤는 처음 본 것 같았다.

"넌 저런 아가씨도 아니니까 시킬 생각말고 네가 직접 해봐."

실은 아까 내가 괜찮다고 말해버린지라 '보상'에 관한 얘기라던가, 뭔가 더 하기는 어려워지고 말았다. '나'의 경우엔 말이다. 지금이라면 여태 쭉 입 다물고 있었던 레샤가 더 적격이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 못 들어보셨습니까...?"

방금 전만해도 툴툴대던 레샤가 막상 공을 넘기자 어딘가의 현자라도 되는냥 블로킹했다.
그야 지금 목마른 사람은 내가 맞지만...

"너 그냥 말하기 무서우니까 그러는 거잖아..."
"그럼 레이크는 뭐 달라요...? 애초에 괜찮다고 말해버린 건 레이크잖아요...!"

그거야 사실이지만.

"좀 해줄수도 있지...!"
"전 저런 사람들한테는 역상성 피해를 받는단 말이에요...! 두 배라구요...?"

에잇! 인간과 자격지심은 빼놓을 수 없는 관계란 말인가.
우리는 에반젤린의 등 뒤에서 이루어졌던 비밀회담을 마치고 원래의 자세와 자리로 돌아왔다.
조용히 있던 에반젤린이 입술을 뗀 건 그 때였다.

"아까 전에 사람을 쓴다는 말씀을 하시던데 그건 무슨 이야기인가요?"

맞아, 깜빡하고 있었지만 그런 얘기도 있었다.
만약 에반젤린이 없었다면 어떡할뻔 했나. 우리 배는 틀림없이 산으로 향했을 것이다.
본인도 그제서야 생각난 것인지 트리샤가 아 맞다, 하고 맞장구를 쳤다.

"너희들에게 맡기고 싶은 일이있어. 아주 간단한 일."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아가씨의 방 문보다도 훠어어얼씬 큰 문 앞에 서있게 되었다. 이름하야 로드 투 스톤, 이제는 우리 고용주가 된 '트리샤 아가씨'가 연금술과 관련된 물건들을 쌓아두는 곳. 시약보관실이라 불렀던 그 곳인가 했더니 조금 다르단다. 거긴 만족할만큼 완성된 물건을 넣어두는 곳이고 여긴 그 외에 것들이나 기타등등이 들어가는 곳이라나.
즉, 창고다.
집 안에 이런 것도 있고 좋겠네.
나라면 이런 공간에는 도서관을 만들 것이다. 내가 선별한 로망소설로 꽉 체워서.
음, 좋군.

"그런데 이런 일이라면 토렌씨나 다른 분들이 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나는 안내역을 맡았던 토렌씨에게 물었다.
단발적인 거라곤 하나, 이미 있는 사람을 놔두고 새 사람을 고용하는 건 낭비가 아닐까 싶었다.

"주인님, 아 그러니까 아가씨의 할아버님께서는 트리샤 아가씨가 웬만하면 스스로 일을 해결하기 바라십니다."
"웬만하면이요...?"

뭐야 그 애매한 조건은.

"저희의 소속은 론데미르가입니다. 따라서 주인님의 명령에 따라 이런 일은 도와드리지 않는 것이 원칙이죠. 다만 아가씨 본인의 용돈으로 해결이 되는 선이라면 사람을 써도 관여치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제보니 바지사장정도가 아니라 완전...
아니 그것보다 용돈이라고?

"그럼 저희 일당은..."
"아! 오해치 마시길, 론데미르정도 되는 곳에서 사람을 쓰려면 채용공고부터 시작해서 꽤나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여러분은 그 과정을 생략한다는 의미에서 저렴하다는 것일뿐입니다. 한 마디로 편법인 셈이죠."

할아버지의 눈과 손을 거치지 않고 쓰는 사람이라는건가, 근데 그래도 저렴하다고는 하지 마시죠.

"거기에 실제 급여도 평균선일테니 안심하십시오. 용돈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의..."

평범하게 설명하던 토렌씨는 좀 아니다 싶었는지 말을 중간에 그만두었다.
그건가, 용돈이라고 부르고 예산이라고 쓰는 그거?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저희가 이러는 건 다 아가씨를 위해서라는 겁니다. 그럼 수고하시길."

제멋대로 훈훈하게 마무리를 지은 토렌씨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론데미르가의 속사정이야 어떻든 나로서는 우연찮게 일감을 줏어먹을 수 있으니 되려 좋은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창고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와...! 꼭 무슨 문닫은 박물관 같네요! 재밌는 게 많을 거 같지 않아요?"

싱글벙글한 에반젤린의 첫 감상대로 창고 안에서 우릴 반겨준 것은 수십개의 책장과 수십개의 서랍장 수백개의 유리그릇, 수천개의 약병들이었다. 벽돌이 훤히 보여 방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어둡고 넓은 공터에 그런 것들이 꽉 차있다고 생각해보아라. 확실히 누구 말대로 망한 박물관 같긴한데 재밌어 보이진 않는다.
벌써부터 토가 쏠리지만 꾹 참아야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해야하는가 하면...

"부자들은 손이 없는 걸까요... 발이 없는 걸까요... 왜 실험쥐 같은 걸 사람을 써서 찾는 겁니까... 흥, 거기에 용돈이라고...? 이 세상에 균형의 신이 있다면 대체 지금 뭘하고 있는거죠...?"

하염없이 투덜거리는 레샤, 이 녀석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먹었다. 그건 엄밀히 따지면 틀린 말이다.

"그 사람들은 뭐가 없는 게 아니라 그냥 돈이 있는거야."

이게 맞지.
크게 한 번 한숨을 내쉰 나는 랜턴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멀리서는 막연해 보였던 창고의 규모는 본격적인 수색을 시작하면서 몸으로 체감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쓸 정도라면 찾기 쉬운 곳에 있지는 않으리란 생각에 책장 하나하나 살피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책장의 크기는 모두 제각각에 어떤 건 사다리가 필요할 정도로 높았고 여러 서적들과 잡동사니가 분별없이 가득 차있었다. 그 물건들 죄다 들춰보면서 몽땅 뒤져아하는데, 그러다가는 며칠이 걸릴지조차 가늠이 안되었다.
지금만 해도 5m는 될 사다리에 몸을 의지하고 작은 동물이 숨어을 수 있을만한 잡동사니의 틈은 전부 들춰보고 있지만 쥐털은 커녕 먼지밖에 안 보인다.

"에반젤린! 밑엔 뭐 보여?"

나는 아래에서 바닥을 훓기로 한 에반젤린에게 물었다. 비교적 쉽고 편한 일이니 그쪽으로 부탁했다.
떳떳한 얘기는 아니지만 이 여정은 내 월세 때문에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아아니요오."

에반젤린은 말을 늘여 대꾸했다.
역시 그런건가. 하긴 찾았으면 먼저 말을 했겠지... 하고 체념하는 중에 에반젤린이 그런데, 하며 말을 이었다.
뭔가 있는 모양이다.

"바닥은 좀 청소해야할 거 같네요. 아무리 창고라도 이러면 안된다고요. 나중에 토렌씨에게 말해야겠어요."
"아... 그래."

괜히 기대했네.
선반을 살짝 밀자 레일에 고정된 사다리가 옆으로 조금 이동했다. 그나마 이게 좀 재밌어서 다행이다.
사다리에서 세단 아래로 내려오자 선반 위, 금이간 투명 유리컵 너머로 익숙한 후드가 보였다.

"너도 못 찾았지?"
"레이크... 부탁이 있어요..."

후드 아래에서 레샤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저도 아가씨 시켜주세요..."

뭔 소리야 그건.

"네가 내 월세도 낼 수 있을만큼 훌륭히 크면. 그 때 해주마."
"뭔가요...? 전 지금도 레이크보단 낫다고요...? 간신히 체우고 있지만 레이크처럼 밀리진 않았다고요...?!"
"그러니까 이러고 있는거 아니야!"
"그러니까 나도 아가씨 시켜달라고요...!"

뭔 소리냐고!
체념한 나는 다시 사다리를 밀어 다음 책장으로 넘어갔다.
이 일에 걸린 상금이 한 사람당 무려 3만 쳬니. 하늘그림의 한 달 하숙비가 3만쳬니니까... 일당이라고 볼 수는 없어도 그 양이 적지 않았다.
하여 레샤와 말씨름이나 하고 있느니 차라리 빨리 그 베리인가 뭔가하는 실험쥐를 찾아 급여를 받는 게 백배 나았다.

"레이크님!"

또 그렇게 한창 쥐새끼를 찾던 중 밑에서 에반젤린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다리를 붙잡고 쭉 미끄러져 아래로 내려가자 에반젤린이 꺼져버린 랜턴을 들고 멋쩍게 웃고 있다.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조절을 한다는 게 그만 실수로... 다시 붙여주시겠어요?"

밝기 조절을 하다가 실수로 꺼버렸다는 모양이다. 다른 일이 생긴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불을 다시 붙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바로 랜턴의 유리관을 열고 마법을 영창했다.

"...이그니션."

종이가 찢어지는 것 같은 작은 소리와 함께 랜턴의 심지의 불이 다시 붙었다.

"레이크님이 마법을 쓸 줄 아셔서 다행이에요."

그걸 본 에반젤린은 랜턴의 불꽃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마법이라고 하기도 좀..."

선행 학습삼아 기초 필독서를 보고 독학한 것이 우연찮게 발현한 것에 불과했다.
불을 붙이는 이그니션, 응결시키는 프리즈, 빛을 내는 라이트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 이상을 위해서는 가르쳐줄 선생님이 필요하다.
이제와선 아무 의미 없지만.

"저는 못하는 걸요."

에반젤린이 미소지으며 앞으로 나갔다.
그야 그렇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건가.

"역시 쥐라면 책장보다는 바닥을 좋아하겠지?"

나는 에반젤린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글쎄요, 제가 듣기로는 책장을 갉아먹길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럼 결국 다 뒤져봐야 하는건가? 이거 오늘 하루론 안 끝나겠는데."
"일을 하고 있다고하면 클로에님도 독촉하진 않으시겠죠. 그리고 이런 것도 좋지 않나요? 아가씨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일행들! 마치..."

에반젤린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대강 알 것 같았다.

"그래 퀘스트 같네..."

그것도 아주 악랄한 퀘스트.
보통 이럴 땐 동네에서 잃어버린 애완동물 같은 거 찾아달라고 하지 않나? 무슨 창고에서 실험쥐야.
에휴, 현실과 로망은 좀 다른가보다.

"베리는 어떤 쥐일까요, 물론 귀엽겠죠? 아 쥐 하니까 생각나는건데 레샤님은요?"

쥐 하니까 레샤가 생각났다고...?
뭐, 나쁜 뜻은 아니겠지만 지금 이 일은 걔한텐 비밀로 하기로 했다.

"아마 사다리 타고 있을걸?"

처음엔 불안해 하더니 은근히 좋아하는 거 같더라고, 내려다 보는 걸.

"레이끄으-! 에반젤리인-!"

때마침 레샤가 멀찍이서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쟤도 양반은 못되나 보다.

"뭐야, 왜! 찾았어?"

기쁜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가 물으니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가있는 레샤는 대답대신 저쪽 어딘가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 뭔가 보이는데요... 뭔가... 파란색 담요...? 같은게..."

레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뭔가 천막 같은 게 보이긴 했다. 정말 뭔가 발견한 거긴한데 실망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천막이 왜?"
"당연히... 저기 뭔가 있을 것 같으니까 그렇죠."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뭔데."

네가 직접 안하고?

"그야...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그렇죠... 저기서 인간의 오만이 만들어낸 괴물이 나올지 어떻게 압니까...?"
"그럼 나는 그걸 만나도 괜찮다는 거냐?!"

저놈의 불안병 고치기 전에는 내가 제명에 못죽지, 속터져서.
괴물이라고?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흔한가. 어찌되었든 나는 그 천막을 치워보기로 했다. 크기가 작은 동물인 쥐라면 저렇게 단순히 바닥에 펼쳐져 있는 천막 밑에 있어도 알 수 없을테니까. 모르는 사이 깔려죽지나 않았기를 바랄뿐이다.
옆에 랜턴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천막의 일부를 들춰보자 특별히 뭔가 보이는 거 같진 않았다. 하여 나는 에반젤린의 도움을 받아서 천막을 말아 완전히 치워버렸다.
그러자 바닥에 뚫려있던 구멍이 보였다. 바닥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한 것인지 벽돌의 이가 빠져 만들어진 구멍이었다. 너비가 큰 마차 바퀴만큼은 되는 것 같다.
천막은 이걸 가리기 위해서 깔아놓았던 건가. 그렇다면 기껏 말아놓은 걸 다시 펼쳐야했다.

"저기....? 레이크...?"

레샤가 또 멀찍이서 부른다.

"왜, 왜, 왜, 또 뭔데에?"

구석에 놓았던 천막 두루마리의 끝자락을 찾느라 바빴던 나는 대충 건성으로 대답해주며 하는 일을 계속했다.

"구멍에 이상한게... 있는데요...?"
"또 뭐가아..."

높이 계신 정령술사님한테 지시만 받는 것도 슬슬 짜증이나서 성질을 내며 구멍을 보았더니 정말 이상한게 있었다.
그렇잖아? 쥐 머리인데, 생긴 게 분명 쥐머리긴 한데 그 크기가 곰이면 보통 그게 쥐가 나타났다고 직결되진 않았다.
뭔가 장식품이 아닐까, 공연용 인형탈이 아닐까... 외면하기 마련이지.

주둥아리에 매달린 커다란 앞니, 기름기가 있는 회색털, 똑똑히 이쪽을 향하고 있는 붉은 눈과 쭉 찢어진 홍체, 뚝뚝 떨어지는 침까지야 그렇다쳐도 보통 탈이 소리까지 지원해주지는 않았다.

"크르르르...!"
"어머 이게 베리인가봐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네요. 후후, 그런데 이 아이도 좀 씻어야겠어요. 검댕이가 묻어있네?"

나는 태연하게 쓰다듬으려는 에반젤린의 손을 붙잡아 막고 반대방향으로 냅다 뛰었다. '베리'가 구멍에서 튀어나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저게 쥐야?! 저게 쥐냐고!"

내가 아는 쥐가 저런 동물이었으면 인류는 이미 멸망했어!
마왕보다 저게 더 위기잖아!

"침을 잔뜩 흘리는 게 배가 많이 고픈가봐요."
"그럼 굶어 죽으라 그래!"

아 인생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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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7 07:27 | 조회 : 581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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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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