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게 됐습니다(2)

"제 이름은 토렌 소우즈라고 합니다."

깔끔하게 정리한 머리와 콧수염. 온화한 검은색 눈동자와 희게 샌 머리. 단정함 그 자체로 이루어진, 긴 검은색 제복을 입은 남자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목소리에서도 품위와 자신감이 느껴지는 것이 분명 예삿일을 하는 사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에 끼고 있는 흰 장갑이 특히 그랬다.

"짐마차하고 관련되신 분이라고요...?"

하여 그렇게 물었더니.

"예. 레이크 아이힐데른씨가 타고 내려간 짐마차는 저희 소유의..."

타고 내려갔다고 하니까 무슨 내가 훔쳐 탄 거 같잖아요, 아저씨.

"너 이 자식 잘만났다. 보여? 이거 보이냐고! 꿰메기까지 한거야! 어떻게 되먹은 얼굴이길레 웃는 낯짝으로 나타났냐!"

내가 딴지를 걸기도 전에 아저씨가 철천지 원수를 만난 것처럼 다짜고짜 토렌이란 남자의 멱살을 붙잡았다. 자기 머리에 감겨있는 붕대를 가리키고 있는 건 덤.
어... 근데 뭔가 점점 빨개지는데... 그 빨간 게 번져가는데...

"아, 아저씨! 피난다! 피! 피나!"
"상관없다! 내가 오늘 죽는 한이 있어도 이 놈하고 담판을 내고 말겠어! 사회의 정의란게 뭔지 이참에 한 번 보여주마!"

어머 멋져.
상처가 터져도 동요없는 남자라니. 나는 일이 심화되기 전에 저 토렌이라는 남자가 먼저 나타난 걸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다.
아저씨가 코앞에서 침튀겨가며 노발대발하는데도 토렌은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응대를 계속했다.

"왜 왔냐고 하시면... 뭐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토렌은 자기 멱살을 잡고 있는 아저씨의 손을 동전으로 두들겼다.
아니아니 잠깐만, 막연히 동전인줄만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오만 쳬니짜리 금화였다.
눈앞에서 실물 금화가 바로 나타나자 아저씨는 반사적으로 멱살을 놓고 상인의 목 아래에서 손을 폈다. 토렌은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그 손바닥위에 금화를 내려놓았다.
붕대 아저씨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금화를 보았다. 마치 전설속 황금향을 발견한 탐험가... 아니 것보다 진짜 금이잖아 저거. 그 와중에 붉은색은 점점 퍼져나간다.
아저씨 피 흘러요, 피! 눈까지 흘러 내린다!

"이걸로 화가 풀리신다면 다행이겠군요."

단정하게 모습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뇌물이라니.
아니 뇌물은 아닌가?
어쨌거나 이번엔 그 상대를 잘못 골랐다. 오늘은 붕대아저씨가 사회의 정의를 보여준다고 했으니까.
보여줘요 당신의 정의를!

"여부가 있겠습니까."

금화 한 방에 고고하던 붕대아저씨의 기상이 즉시 반의 반으로 접혔다.

"아저씨. 사회정의는요?"

순간, 아저씨의 눈이 비장함으로 빛난다. 흘러내리는 피는 마치 그를 전투를 치른 노장처럼 보이게 해주었지만.

"아직 어리구나 꼬마야. 사회의 정의란 시시각각 변하는 거란다."

뭔가 멋진 목소리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뱉은 후 아저씨는 상당히 급한 움직임으로 하숙집 밖으로 나갔다.
...거 자라나는 청년에게 참 좋은 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다른게 아니라 보시는 바와 같이 전 사과를 드리러 온겁니다. 정확히는 제 주인 되시는 분의 전언을 전해드리러 왔죠."
"전언이요?"

돈으로 입 다물게 하는 게 사과냐고 묻고 싶은 건 둘째치고 나는 더 중요해보이는 화두에 관심을 보였다.
저희 주인님께서는... 하고 운을 땐 토렌은 뭔가 고민되는 것이라도 있는지 턱을 매만졌다. 한동안 그렇게 고심하던 그는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난것 처럼 손가락을 튕겼다. 장갑 때문에 당연히 소리는 나지 않았다.

"직접 사과하고 싶으니 레이크 아이힐데른씨를 초대하기로 하셨습니다. 뭐 그 정도로... 그랬다고 치죠..."
"예? 뭐라고요?."
"뭐 아무튼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실건가요?"

굉장히 중요하고 이상한 말이 중간에 끼어들었던 거 같지만 토렌은 거리낌이란 한 스푼도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되물었다.
그래서 따라올거냐, 그런 의미였다.

"레이크, 조심해요..."

어느샌가 다시 내 뒤로 도망쳐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옆구리를 꽉 잡고 있는 레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왜?"

나는 어께 너머로 물었다.

"저렇게 청산유수로 자기소개 줄줄이 잘 하는 사람은 조심하라고 그랬어요..."

의미심장하게 말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걔가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이상했다.

"야, 너 저번에는 안하면 안해서 안된다고 해놓고 지금은 잘하니까 안된다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해야 되는 거냐?"
"엑..."

말문이 막혀버린 것인지 레샤는 대상을 에반젤린에게로 옮겼다.

"사제님, 사제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건 레이크 인생에 첫 다단계 위기 아닙니까?"
"글쎄요... 제가 보기에 소우즈씨가 그렇게 시커먼 분은 아닌 것 같은데요?"

에반젤린마저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자 레샤는 자기만이라도 거리를 벌리려는듯 한 걸음 뒤로 움직였다. 그런데 괜히 날 잡고 끄는 바람에 나도 한 걸음 뒤로 물러야했다.

"다들 다단계의 무서움을 몰라서 그래요...! 모르는 사이에 빠져든다고요...! 아아 만드라고라 액기스가 아직도 이만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람.
레샤의 반응이야 늘 그러니 의견으로 삼지 않는다고 해도 확실히 토렌이라는 남자의 '제안'이라고 할까 그런 전언의 진위에 대해서는 조금 의심이 갔다. 그에 더해 아예 이 남자의 신원부터도.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엄마가 그랬다고.
우리가 선뜻 답하지 않고 망설이자 토렌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제 말이 안 믿기실수도 있겠죠. 이해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특별히 절 따라오신다면 5천 쳬니 상당의..."
"이봐요, 아저씨. 저희 잡상인은 안 받아요?"

잠잠코 있던 클로에가 귀신같이 토렌의 말을 끊어쳤다.
과연 하늘그림의 관리인. 한두번 내쫓은 솜씨가 아니다.

"아하! 죄송합니다 습관적으로... 그럼 제 신원보증을 위해서라고 하기는 조금 뭣하지만 혹시 이런 거라도 괜찮으시다면."

하며 토렌은 자켓 안주머니에서 작은 패를 꺼냈다. 금장식과 특별한 문양이 그려져있는 그건 한 눈에 보기에도 고급품이었다.

"그거 러너스하이 아니에요?"

패를 본 클로에가 입이 떡 벌어져 되물었다.
뭐야 뭔데? 그게 뭐하는 건데. 대단한 거야?

"아! 아시는군요. 다행입니다."

일이 좋게 풀릴 것 같자 토렌... 씨가 미소를 지었다.

"뭔데, 그게 대체 뭐하는 건데. 나만 모르는 거야?"

나만 두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거 같아 일단 물었다.

"러너스하이를 몰라? 하긴 포션 먹을 일도 없는 애가 알겠니."

클로에가 자뭇 한심한 눈으로 말했다.
자존심이 상한 나는 레샤와 에반젤린도 한 번씩 돌아봤다. 그런데 다들 왕눈이 되서 헛숨 들이키는 걸보니 아무래도 정말 나만 몰랐던 것 같기에 일단 가만히 있기로 했다.

"러너스하이는 포션을 전문적으로 제조하는 길드야 각국의 용사지원단하고도 제휴를 맺은 곳이라 너라면 들어봤을 줄 알았는데."

클로에가 특별히 의미를 담아 말한 건 아니었겠지만 나는 괜히 빈정 상했다.

"그거 참 몰라서 미안하게 됐네요."

포션이라고?
이름은 무슨 오래달리기할 때 길에서 물이나 나눠줄 것 같아가지고 안어울리는 걸하고 앉았다.
내가 속으로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토렌은 친절히 나에게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포션, 예. 포션 사업을 하는 상단 맞습니다. 그런데 크기만 크지 생각하시는 것만큼 실속은 없어요. 용사지원도 포션 부문만 하고 있고. 원래 포션이라는 게 마진이 별로 안남는답니다."

포션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듯 그 단어가 나올 때마다 레샤가 만드라고라 액기스를 중얼거렸다. 대체 그 액기스하고는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어떠신가요. 이래도 안내키시다면 어쩔 수..."

아쉬움에 가득찬 토렌...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클로에가 내 옷자락을 잡아 끌어당겼다. 팍하고 한 방에 끌려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모가지 꺾일 뻔했다.

"따라가."

클로에가 귀엣말로 속삭였다. 덩달아 내 목소리도 작아진다.

"내가 왜? 가서 뭘 당할 줄 알고?"

가서 만드라고라 액기스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당하긴 뭘 당해. 러너스하이에서 나오신 분이라잖아."
"너도 그거냐? 사회의 정의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그거냐?"

되려 질색을 하자 클로에가 팔꿈치로 내 갈비뼈를 찔러다.
악!

"잘 들어. 너 저번 달이랑 이번 달 월세, 아직 남아있는 거 알지?"
"예... 물론 알고 있습죠..."

불리한 얘기가 튀어나오자 나는 옆구리를 문지르며 즉시 굽실거렸다. 이제 아저씨가 말했던 변화하는 사회정의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후 이어진 클로에의 말은 대강 이랬다.
러너스하이는 굉장히 큰 상단이다. 그런데 거기서 나온 사람이, 그것도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이, 주인님이 부른다며 같이 가자고 하는 건 전통적으로 보상이 기다림을 의미한다. 그러니 넌 따라가서 사과와 보상을 받아라. 그리고 월세 내라.
굉장히 상부상조한 얘기지만 결과적으로 경제의 흐름은 일방통행이었다.

"그리고 너 의외로 견고하니까 설마 거짓말이라도 빠져나올 수 있잖아."
"견고하다니. 무슨 벽돌에다 쓰는 말을 사람한테...."
"얼르은!"

가만히 있다 옆구리 한 대 더 맞기 전에 나는 토렌씨의 앞으로 잽싸게 도망쳤다.
어쨌거나 클로에의 말과는 별개로 나는 사과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나도 엄연히 피해자 중 하나였고 혼자 다 뒤집어 쓰는 이중고를 겪기도 했다.
음, 하나하나 되짚어보니 확실히 그냥 넘어가기에는 내 영혼에 너무 많은 앙금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난 월세도 내야한다.

"혹시 일행을 데려가도 괜찮을까요?"

그것이 저들을 가리키는 줄 아는 레샤가 움찔 놀라 등을 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정도론 날 막을 수 없다. 에반젤린이야 도리어 흥미를 보이는 눈치고.

"얼마든지요. 바깥에 마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네 분..."

하고서, 토렌씨는 클로에의 눈치를 살폈다. 클로에가 살짝 고개를 털어 거부 의사를 표하자 그는 적당히 단어를 정정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세 분 모두 따라 오십시오.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번쩍 거리는 마차를 타고 대저택 앞에 도착했다. 그 저택 얘기에 앞서 마차 얘기를 빠뜨릴 수 없는데, 이전까지 나에게 마차라는 건 잔뜩 폼잡고 나타나지만 딱딱 소리를 내고 비싼 주제에 불편하며 허리만 아픈 물건이었다. 요약하자면 여태까지 내가 보고 탔던 마차는 마차가 아니라 똥지게였다, 끝.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자면 그 으리으리한 저택을 본 순간 나는 으리으리라는 말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다.
으리으리... 뭔가 압도적인 위용을 보이는 그런...
아니. 내가 본 건 그런 시시한 느낌이 아니었다. 좀 더 퐈아안타스틱하고 엘레가앙스한, 뭐랄까 좀 더 맨드라고라틱한...

분수대 있는 정원이 포함된 삼층 타운하우스라는 게 말로하면 몇 초되지 않지만 그리 간단히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건 그 때 처음 알았다.

"우리 동네에 왜 이런 게 있어?"

라고 화려한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으며 말하긴 했지만 확실히 트리마켓 건너편을 넘어가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모르는 게 당연했다.

"뭔가 악의가 느껴지지 않나요, 이 집...? 이거 분명 방문객을 주눅들게 하려는 거 아니냐고요...!"

레샤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스태프에 의지 하며 걷고 있었다.
그 애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벽 가생이의 마감장식도 그렇고 카펫에 있는 요 무늬, 요게 그 프랙탈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아무튼 허름한 하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있어선 위화감을 좀처럼 지울 수 없는 비싼 곳이었다.
한 사람 빼고.

"와! 이 그림, 구엔테님의 '회상하는 자화상' 아닌가요?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오, 알아보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이건 초기 인상파 화가 구엔테의 그림입니다. 여기 짙은 눈썹 보이시나요? 참 못되게 생기지 않았나요? 그리고 이 항아리를 또 말씀드리자면..."

비교적 위축된 우리들과 달리 에반젤린은 뭔가 평범하게 안내를 받고 있었다.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꼭 무슨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놀러온 아이 같은게... 천진난만하고 해맑은 수녀님 같았다.
뭐... 이런 것도 좋네...
잠시 일상에 녹아든 사이 앞서 걷던 토렌이 멈추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다 왔습니다."

그 앞에는 문이 있었다.
커다란 문. 무거운 느낌을 주는 색의 나무위에 양각된 나무는 거꾸로 서있다.

"주인님, 토렌입니다."

노크를 한 토렌이 안에 고했다.
문 너머의 대답은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금방 돌아왔다.
거꾸로 서있는 올리브 나무, 그 가장 아래에는 열매가 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올리브이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보통 테라리아에서 거꾸로 선 나무가 의미하는 건.

"토렌이라고? 어어, 들어와."

연금술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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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7 06:57 | 조회 : 692 목록
작가의 말
죄수번호53425854

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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