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게 됐습니다(1)

체스. 그것은 고도의 두뇌싸움! 열여섯개의 말을 부려 기사단과 군대를 이끄는 로망의 게임! 우리 흑기사와 백기사의 모두 지휘관이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보자!
...라고 백날 포장해봐야 체스가 그리 재밌는 놀이가 되주지는 못했다. 게다가 적당히 상대해주는 듯한데도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는 에반젤린의 실력. 저 표정은 승리를 내다본 책사의 미소란 말인가.
그런 시시껄렁한 생각을 하는 사이 이번엔 퀸이 잡히고 말았다.
앗 이런, 하아...

"레이크님 좀 더 집중하세요."
"아니 실력차이가 정도껏 나야 뭐 할 마음이..."

어떻게 하면 폰으로 퀸을 잡을 수 있는거지? 이거 혹시...

"레이크에게 문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벽에 기대앉아 내가 빌려준 로망 소설을 읽고 있던 레샤가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 짐짓 당황을 넘어서 걱정스러운 표정은 덤이다.

"내가 그 정도야? 네가 보기엔 어떤데."
"글쎄요... 전 지금 레이크의 체스 실력보다는 프로두와 샘슨의 결투 결과가 더 궁금해서... 설마, 프로두가 죽지는 않겠죠? 그래도 주인공인데..."

왠지 성의없게 말하는 레샤의 태도가 아니꼬웠던 나는 또렷하고 빠르게 그에 대해 읊어주었다.

"그거 둘 다 죽어. 사실은 정무관이 흑막이라 걔네들 검에 독을 발라놓거든. 그리고 그 공주님 말이야, 사실은..."
"아 아 아 아아...! 아앗...!"

상황을 눈치챈 레샤가 귀를 막고 아무 소리나 마구 질렀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미 들었을테니까.
하하.

"지금 선전포고 하는겁니까...? 어떻게 그런 인간으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그런 짓을 하고서도 천국에 가길 바라는 건 아니겠죠...?"
"하! 이미 천국에 가긴 틀렸어!"

일평생 거기서 사는 분을 욕하고 살았거든.

"레이크는 지옥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지옥으로 가게 될거에요... 히익...! 너무너무 뜨겁고 고통스러워서...!"

스스로 말하면서도 뭔가 상상되는 것인지 레샤의 음영이 더 짙어졌다.

"상관 안 해. 힘든 건 죽은 나지 지금 살아있는 내가 아니니까."
"그 얘기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레이크님?"

이번엔 에반젤린이 대꾸했다.

"아니 전혀! 나는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달라지고 있다고. 방금 전에 그 얘기를 한 것도 이미 내가 아니야."
"그렇군요! 그렇게 전진하시려는 모습 아주 멋져요."

솔직히 스스로 뱉으면서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건만 에반젤린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칭찬해주고 있었다.
이래서 애들 오냐오냐 키우면 버릇이 나빠진다는 거구나.
묘한 깨달음을 얻은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체스에 집중했다. 오랜시간 세밀하게 판을 읽어본 결과, 일단 이 수세에 몰린 상황을 타개할 답은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퀸과 비숍하나 나이트 둘, 룩까지 하나 잃었는데 에반젤린은 고작 폰 세 개를 잃었을 뿐이다.
불리해도 너무 불리하다.

"너 근데 왜 여기서 읽고 있는거야. 네 방 가서 읽어. 가져가도 된다고 했잖아."

그래서 레샤에게 시비 걸기로 했다.

"음... 물론 제 방이 더 안심이 되는 건 맞지만... 왔다갔다하기 귀찮잖아요."

어느새 누설당한 책을 읽는 건 그만두고 다른 걸 집어 읽고 있던 레샤는 방 한 구석에 잔뜩 쌓여있는 책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 방콕 인생들이 다 그렇지 뭐.
나도 고향에 있을 때는 쉰답시고 도서관에 눌러앉아 몇시간이고 죽치고 있던 적도 있으니까. 근데 남의 집에서 이러는 건 좀 아니지!

"그럼 이용료 내!"

버럭 소리치자 나름대로 발끈한 레샤도 목소리를 높였다.

"뭔가요, 갑질입니까? 과연... 백수폐인이나 생각할 치사한 수법이군요...! 이래서 뭔가 해준다고 할 때는 덥썩 물지말고 신중하게..."
"네가 접시만 제대로 간수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냐, 앙?"

접시야 다시 사오긴 했지만 접시값은 또 나가야했고 부셔먹은 울타리 값까지 클로에에게 빌렸기 때문에 나에겐 아직 저번 달 월세라는 족쇄가 체워져 있었다. 사실 지금 이렇게 빈둥거리는 것도 클로에가 알면 한바탕 작살이 날 것이다. 하지만 어떡해 그래도 노는 게 좋은 걸.

"그게 왜 제 잘못인가요, 수레에 올라탄 레이크 잘못이지...! 뒤통수인가요? 저 지금 당한건가요?! 경비대 찾아가도 되는겁니까...!"
"야 너 과자도 얻어먹은 주제에..."

레샤는 눈을 찡그리며 슬며시 에반젤린의 뒤로 숨었다.
저게... 비겁하게...!

"저기 두 분 대화 중에 죄송하지만..."

그 때 에반젤린이 말했다.

"이 방도 저 책도, 원래 레이크님 게 아니지 않나요?"

윽, 갑자기 비집고 들어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나는 말문이 턱막혔다.

"레샤님도 그래요. 레이크님은 레샤님을 구해보려고 그렇게 하신거라고요? 어른이 되려면 말투뿐만 아니라 언행이 깊어야 한답니다."

엑, 하고 레샤 역시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자 두 분 다. 악수하고 화해하세요. 얼른!"

그렇게 말하면서 에반젤린은 나와 레샤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여지없이 강한 악력이다.
아! 아! 조금만 살살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아! 사제님...! 손목이...!"

레샤는 거의 울고 있었다. 이건 무력에 의한 화평인가.
힘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둘 중 어느 쪽이든 우리는 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흔들도록 조종당했다. 저항하면 손해라는 건 피차 모두 알고 있었다.

"너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라는 말 아냐?"

나는 웃는 얼굴로 부들부들 말했다.

"그건 또 뭡니까...? 어디서 줏어들은 건 많으신가 봅니다...?"

레샤 녀석도 지지않고 맞섰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라는 것은 아직 오늘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내일 시점의 어제의 적이 아직 오늘의 친구가 되지 못했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내일은, 내일이 오면 그 날이 바로 오늘이 되므로 어제의 적은 절대 오늘의 친구라는 목적지 도달할 수 없다는 그런...!

옆방에서 사는 낚시꾼 헤세가 내 방에 들어온 건 내가 슬슬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를 그 때였다.

"야, 레이크. 클로에가 너 찾더으... 라... 니들 뭐하세요?"

부자연스러운 광경을 목격한 헤세는 멍하게 문장의 목적을 통보에서 질문으로 선회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이건 정말이지...

"아, 내가 이러고 산다, 증말."

그 외에 달리 설명할 수 없었다.
영문을 알리 없는 청년은 대답을 들어도 그저 눈을 찡그렸을뿐이다.

"...뭐?"

그리하여-
우리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에반젤린이야 가능하면 따라오려고 하니 신경쓰지 않더라도 나는 죽어도 가기 싫다는 레샤까지 끌고 내려가 강제로 동참시켰다.

"클로에씨가 찾은 건 레이크잖아요오... 레샤라는 이름은 없었다구요오...!"

레샤는 어떻게든 내게 붙잡힌 팔을 빼내려고 안간힘 썼지만 본인이 말했듯 지능캐이기 때문인지 전혀 진전은 없었다.

"생사를 함께 해놓고서 이제 와서 발뺌하는 거야?"

절대 그럴 수 없지.
내가 왜 이렇게하는가. 그것은 혼자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트리마켓에서의 사건이 있고 며칠이 지나자 몇몇 사람들이 하숙집에 찾아와 날 찾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빙판 때문에 미끄러져 넘어졌다던가 저수지의 부서진 울타리에 대해서라던가 등등.

뭔가 등에 식은땀 나게 하는 이야기들을 잔뜩 짊어지고 와서 하소연하는 것이다. 그 때마다 어떻게 사과하고 변명하고 꾸역꾸역 넘기고는 있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도 참 억울한 일이다.
장난치려고 그렇게 한게 아닌데. 나도 살고 싶어서 그렇게 한 건데. 뭐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미친놈이 장난치는 걸로 밖에 안보였겠지만...

근데 만약 장난이었더라도 그 정도 목숨 걸고 장난쳤으면 그 기지를 높이 인정해줄 법도 하지않냔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 안다.
어쨌든 이번에도 분명 비슷한 일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혼자 변명하기는 억울하니 구태여 레샤를 대동하는 거고.

"찾았, 흠, 찾았다면서."

어쩐지 목이 매인 나는 헛기침을 했다.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해진듯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서있는 남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응, 여기 이 분이 널 찾으셔."

키는 나와 비슷하고 얼굴은 평범한 아저씨가 굉장히 증오에 찬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다는 것이다.
역시...
나는 일단 항상 하던대로 영혼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빙판길 얘기를 하시는 거라면 그건 저 역시 불가항력이었다라고 밖에는..."
"빙판길? 아니 난 이거 때문에 온건데."

아저씨는 손에 들고 있던 벽돌을 보여주었다. 다시 보니 벽돌이 아니었다. 한쪽이 삐죽하게 잘려나간 긴 직사각형의 나무 조각.
저거... 고임목인데, 내가 던졌던.
헉! 그걸 안 순간 여태와는 차원이 다른 식은 땀이 등 뒤로 흘렀다. 빙판길은 내가 어떻게 살아보겠다고 만든 불가항력이 맞지만 저건 조금 다르다. 분명히 짜증나서 홧김에 던진거였다.
그게 어디로 갔을까하고 궁금해 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지만... 아아 그게 거기로 간거였구나, 하는 순간이었다.

"어... 그건... 저는 처음 보는 거 같네요..."

나는 차마 아저씨의 눈을 보지 못하고 어딘가 하늘 저 멀리를 보았다.
안 돼, 천장 때문에 먼 산이 안보여.

"거짓말 하지마! 그 날 일을 본 게 한 둘인줄 알아? 나도 다 확인하고 온거야."

거참 쓸데없이 신중하시고 그래요, 왜.
아저씨의 치밀한 준비성 덕에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져버렸다. 어떻게 하면 잘 넘어갈 수 있을까. 그런 나를 하늘이 도운건지 띠링! 하고 뭔가 뇌리를 스쳤다.
'아 도망가고 싶다.'
그다지 도움은 안되는 생각이었다.
아무튼 난 슬쩍 내 뒤에 숨어있던 레샤의 뒤로 돌아가 그 애의 어께를 꽉 붙잡았다.

"그 고임목을 찾은 거 얩니다."
"으엑?! 던진 건 레이크잖아요...!"

당연히 레샤는 당황한다.
그렇지. 하지만 찾은 건 너다. 나는 단지 그걸 알려줄 뿐이야.
졸지에 방패막이가 된 레샤는 허겁지겁 중얼거렸다.

"뭔가요, 저 당한겁니까... 정말로 당한겁니까...? 저 경비대 찾아갑니다. 찾아갈거라고요...? 찾아가서 경비대에 정중히 수사를 요청할거라고요...?"

그 말을 자신에게 한 걸로 오해한 아저씨가 금방이라도 달려들듯이 더 언성을 높였다.

"뭐? 경비대?! 그래 한 번 가보자. 이것들이 점잖게 끝내려고 하니까..."
"자, 잠깐만요. 아저씨! 이게 지금 그게 아니라아!"

내가 말려봤지만 아저씨는 막무가내였다.
일이 시끄러워지자 클로에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고 좀 도와줘라...
아무리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해도 돌아오는 건 냉담한 시선뿐이다.
아 인생.
그렇게 세상이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찰나.

"여기 혹시 레이크 아이힐데른씨라고 계십니까?"

그 어둠을 뚫고 한 줄기 목소리가 하늘에서 내려졌다.

"저요!"

나는 어린시절 학교에서 발표할 때보다도 더 우렁차게 손을 들고 외쳤다. 저것뿐이다. 이 순간을 모면하려면 저 사람밖에 없었다. 저 사람이 누구든, 무슨 이유로 나를 찾든, 그런 것보다는 지금의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이 먼저였다.

"저요, 저! 제가 레이크 아이힐데른입니다! 수레 탄 그 놈이 바로 접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어떤 이야기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이 레이크 아이힐데른이이!"

이름을 특별히 강조하여 소리치자 방금 들어온 깡마른 초로의 사내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드디어 만났군요, 레이크 아이힐데른씨. 계속 찾고 있었답니다."

누군가 새치기를 하려는 낌새를 느끼자 먼저 와있던 붕대아저씨가 윽박질렀다.

"당신은 또 뭐야. 지금은 내가 먼저 왔다고."
"아, 저 말입니까?"

음... 하고 말을 고르던 남자는 간단히 말을 이었다.

"그 짐마차와 실질적으로 관련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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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7 06:56 | 조회 : 890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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