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갑작스럽게(5)

정령술사를 설득하는데 성공한 나는 우선 제물을 바치기 위해 제과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트리마켓에는 없는 것 빼고는 다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금방 제과점을 찾을 수 있었다. 갓구어내 아직 뜨거운 기운이 있는 쿠키! 그것도 초콜렛이 박혀있는 작은 동전모양으로! 마음에 드는 걸 얻은 레샤는 칙칙함과 밝음 사이의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종이봉투를 품에 넣었다.

"그런데 레이크는 금전적 문제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런 걸 사도 괜찮은건가요?"
"원래 누구든 비장의 한 수는 아껴두는거야."

비자금이란 이름으로 말이지.

"레이크는 그런 사람이었군요..."

또 다시 불신의 눈이 된 레샤가 날 지긋이 노려보든 말든 이번에는 서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인근에 자주 들르던 곳이 있었기 때문에 금방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영웅담이나 모험담이나, 처음에는 그저 만약 내가 용사가 되면 어떤 일을 하게 될까 궁금한 마음에 읽기 시작한 것이지만 지금은 시간을 죽여주는 참 좋은 친구였다.
지난 이주 동안 내가 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이럴줄 알았으면 반납할 책도 가지고 나올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서점의 책장에는 로망소설란이 따로 있어 그 한 장르만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대여가 기본인 곳이기에 모두 낡은 책들이었다.
나는 그 보물창고를 즐거운 맘으로 찬찬히 살폈다.
그랬다만.
이미 본거고, 저번에 본거고, 예전에 본거고, 두 번 본 거고, 이건 재미없고, 저건 너무 허무맹랑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거르다보니.

"어째 볼게 없냐."
"얼마나 봤으면 이 많은 것 중에 볼 게 없는 거에요? 레이크는 하루종일 이것만 봐요?"

뒤에서 심기를 긁어대는 레샤의 얼굴을 보진 않았지만 표정은 알 것 같았다.

"왜 꼭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 다른 걸수도 있잖아."
"그럼 뭔데요?"
"...그만 갈까?"

나는 깔끔하게 패배를 시인하고 서점을 나섰다.

"접시 말짱히 가지고 있지?"
"후 후 후... 절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가지고 있죠."

구입에 성공한 접시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인지 앞서 걷던 레샤는 제 로브에 그려진 것과 비슷한 무늬의 접시를 양손으로 번쩍 들어보여 주었다. 과한 움직임 탓에 안쪽에 넣어두었던 작은 종이 봉투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

레샤는 냉큼 뒤돌아 쿠키를 주웠다. 그걸 비웃어줄까 하려는 찰나.

"저, 저기! 수레가!"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레가 뭘 어쨌다는 걸까.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새파랗게 질린 레샤도 언덕 위쪽을 가리키며 똑같이 소리쳤다.

"수, 수수레! 레레레레레이크! 수레! 수레가!"

그러니까 수레가 어쨌다는거냐고.

"뒤뒤뒤뒤에...!"

뒤에?
무심결에 뒤를 돌아본 나는 와차아차?! 하고 뭔지 모를 소리를 육성으로 질렀다.
수레가, 수레가 떠내려온다.
타다다다다닥, 바퀴와 도로가 부딪히는 무지막지한 소리를 내며 수레가 쇄도하고 있었다.
아니, 떠내려온다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고. 수레처럼 생긴 짐마차가 거꾸로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주인도 말도 없다. 단지 그것뿐. 상황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는 판국에 나는 일단 앞으로 달려 레샤를 어께에 들쳐맸다.

"와요! 온다! 가까워진다! 레이끄으...!"

뒤돌아볼 여유도 없는 나와는 달리 뒤가 보이는 레샤가 하염없이 소리쳤다.
앞으로 뛰어? 말도 안 돼. 수레에 금방 따라잡힐 거다.
옆으로 뛰는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좌측으로 몸을 돌려봤지만 곁눈으로 보이는 수레는 이미 지척에 와있었다.

위기 상황에서 사람의 지각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그 짧은 시간 자기가 뛰는 속도와 수레가 내려오는 속도. 어께에 맨 짐의 무게를 전부 염두해 피할 각이 나오는지 안나오는지 정말 순식간에 계산될 정도였다.
즉 안 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나는 레샤를 들쳐맨 그대로 수레의 방향으로 뛰어 올랐다.
두 눈을 꽉 감고 1초.
눈 떠보니 다친 곳 없이 몸 성히 올라타는데 성공해 있었다. 짐칸의 문이 내려져 있지 않으면 그대로 정면충돌 행이었을텐데 운이 좋았다.
아아... 그와중에 누군가 내 어께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누구겠는가 눈물을 찔끔 흘리고 있는 레샤뿐이 더 있나.

"피해야지... 홀랑 올라타버리며어언...!"
"나도 심란하니까. 얘기하지마아!"

빈 짐마차는 점점 속도를 더해가며 언덕을 내려갔다.
옆을 슬쩍 보니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도 정확히 분간하기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아....
문득 바람이 시원하다는 걸 알았다. 트리마켓은 높고 길다. 한동안은 직선 길이 계속 될것이다.
누군지 몰라도 수레 관리 잘해놓은 덕에 편안히 내려갈 수 있어서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여죽기 싫으면 다 비켜라, 이 자식들아!"

정면을 향해 소리지르는 나를 뒤에서 레샤가 잡아끌었다.

"정신 차려요. 레이끄으...!"

덜컹!
짐마차가 턱을 한 칸 내려가 온 몸이 들썩였다.
가출했던 정신머리도 함께 돌아왔다.
이미 알고있다시피 트리마켓은 긴 줄기가 이어지는 지형이었다. 한동안은 직선이다. 다만.

"레샤."
"왜요오...!"
"혀 조심해라."

컥 흑 킄 컥 억....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고무공마냥 튀어다니는 통에 정말 입으로 내장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다시 평탄한 내리막 길. 이제는 정말 다음을 생각해야했다. 그래 내가 알기로 짐마차에는 분명히 제동을 위한 고정장치가 있었다.

"여기 뭔가 브레이크 같은 거 없어?"

짐칸 안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보이는 건 오로지 미끄러지지 말라고 깔아놓은 지푸라기 돗자리 뿐이었다.

"혹시 이거? 이거 인가요?"

레샤가 내민건 구석진 곳에 잘 모셔져 있던 고임목이었다.

"아니야!"

나는 홧김에 고임목을 수레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딴 건 일 터지기 전에나 소용이 있었다.

덜컹! 짐마차가 턱을 하나 더 넘었다.
트리마켓이 직선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전체적인 모습이 그렇다는거지 작게 보면 길게 뻗은 뱀 형상처럼 길이 약간 구불구불하게 휘어져 있었다.
직진만으로는 안된다는 뜻이다.
계단과 턱 덕에 이따금씩 속도가 줄어도 우리가 어떻게 방향을 통제할 방법은 없는데 길은 벌써 왼쪽으로 휘기 시작했다.
그 때 뭔가 반짝, 불이 들어왔다.

"레샤! 상호작용! 상호작용!"
"무슨 소립니까, 알아듣게 말해요!"

하늘도 야속하지 꼭 이럴 땐 알고있던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물! 물! 길 오른쪽에 물 좀 뿌려줘!"
"물이요?"
"얼른! 얼른!"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레샤는 불안한 얼굴로 마지못해 정령을 불러냈다. 푸른빛의 영체 같은 것이 레샤의 머리 옆에 나타났다.

"나이아스...!"

물의 하급정령인 나이아스가 계약자의 마음을 읽어 알아서 길 오른쪽에 물을 뿌렸다. 그 즉시 내가 손을 뻗었다.

"프리즈!"

마법은 제대로 작동했다.
도로의 물은 프리즈에 의해 그대로 얼어 살얼음판을 만들어냈다. 짐마차가 그 위로 지나자 바퀴에서 무시무시한 마찰음을 내며 약간 방향이 틀어졌다.
첫번째 좌회전 구간 통과!

"감사합니다! 마법의 정석 기초 1편님!"

그렇게 기뻐할 세도 없이 레샤가 소리쳤다.

"레이끄으! 앞에, 앞에!"

'트리마켓은 뱀 모양으로 구불구불하다.'

"나이아스!" "프리즈!" "나이이스!" "프리즈!" "나이아스!" "프리즈!" "나이아스...!" "프리즈...!" "나이아스....!" "프리즈으....!" "나이하스으흐..." "프르즈흐...!"

그렇게 캐스팅을 연속으로 해본적이 없었던 나는 차가운 얼음을 한 번에 삼킨 것 같이 시린 두통을 느꼈다. 갑자기 마나를 많이 써 몸에 힘이 쭉 빠지는데도 기를 쓰는 걸 보면 사람이 죽음에 가까워지면 못하는 게 없어진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코스는 이제 마지막이었다. 어느샌가 환영한다는 문구가 적힌 아치입구가 저 아래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트리마켓이 끝나가는 것이다.

"레샤, 결승선이 보여. 이번 레이스가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거야... 영혼의 고향에..."
"난 싫다고요...!"

내 포기선언에 레샤는 정면으로 부정했다.
트리마켓이 끝난다는 건 직선, 완곡한 곡선 구간이 끝남을 의미했다. 마침 아치입구 바로 앞에도 테라스가 완비된 카페가 보였다.
협소한 공간에 인테리어를 참 아기자기하게 잘해놓았다.
누군가 짐마차를 몰고와서 들이받으면 더 멋져지겠군.

덜컹! 짐마차 리모델링 견적을 보던 중에 짐마차가 마지막 턱을 넘었다.

아치 입구를 지나면 도로는 거의 직각으로 꺾인다. 그 우측 길에는 산의 샘을 모아 만든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 만약 거기까지 간다면 안전하게 멈출지 모르지만 빙판길로 조금씩 방향을 바꾸는 정도의 한심한 조작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럼 다른 방법을 써야지 뭔가 다른 방법을...

"레샤! 바퀴! 이번엔 바퀴에 물을 뿌려줘! 지금 말고 하나 둘 셋에!"

뭐 딱히 기다릴 것도 없이 짐마차는 꾸준히 가속을 하기 때문에 거의 바로 소리쳤다.

"하나둘셋!"
"나이아스으으...!"

나이아스의 물방울 덩어리가 바퀴에 닿는 순간 나는 마지막 주문을 영창했다.

"프리즈!"

짐마차의 왼쪽 바퀴축이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가 힘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버렸다. 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건 반대쪽 바퀴였다.
이전보다 더 큰 각도로 강제로 방향이 틀어지면서 오른쪽 바퀴의 축이 내구도를 다 해 아예 떨어져 튕겨 나갔다.
됐다!
나는 레샤와 짐마차를 힘껏 잡았다.
이제부터는 비는 수밖에 없었다.

'싱클레르 여신님 제발 다시는 할망구라고 부르지 않을테니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연히 신앙심과 비명은 별개다.

"으아아아아!"

바퀴가 떨어져나가면서 짐마차는 다시 한 번 크게 방향이 바뀌었고 거의 직각으로 방향을 틈과 동시에 나머지 바퀴도 부서져 바닥을 쓸며 미끄러졌다.
원래의 속도가 속도인지라 짐마차는 미친 속도로 도로를 지났다. 마찰 굉음에 놀란 사람들이 알아서 짐마차의 경로상에서 도망쳤다.
우악수럽게 저수지까지 밀고나가진 짐마차는 작은 나무 울타리를 부수고 물 속에 빠져들었다. 물수제비라도 되는냥 잠시 물 위를 미끄러지던 짐마차는 점차 그 속도가 줄어들어 작은 땟목처럼 수면 위에 떴다.
...끝났다.
죽음의 트리마켓 다운힐이 드디어 끝났다...

"히끅...!"

레샤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저...! 저...! 노력했다고요...! 열심히 했다고요...! 최선을 다했다구요....!"
"그래! 잘했어! 넌 내가 아는 최고의 정령술사야!"
"레이끄는 제가 아는 최고의 백수에요오....! 흐으아앙...!"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 안고 오열했다. 여태까지 쌓여있던 모든 감정들이 해소될 때까지, 또 짐마차에 물이 차 가라앉는 걸 알아챌 때까지.
그리하여-
우리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겨우 하숙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바빠죽겠는데 기력이 다한 레샤까지 업고 온다고 죽는줄 알았다.

"너희들 꼴이 왜 그래...?"

현관에서 우릴 맞이한 클로에가 경악을 금치 못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접시 사러가서 물에 빠진 생쥐꼴로 나타났으니 그럴만도 하지. 하지만! 그건 자랑스러운 영광의 상처였다. 상처인지는 잘모르겠지만, 아무튼 뭐든간에.

"후후후... 우린 방금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왔다고..."
"맞습니다... 흐흐..."

뒤의 레샤까지 맥아리 없는 웃음소릴 내며 맞장구치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클로에가 다시 물었다.

"어... 그래. 그런데 접시는?"

그 직후엔 비참한 현실을 감당하지 못한 레샤가 내 등에 토했다.

0
이번 화 신고 2019-02-06 21:55 | 조회 : 817 목록
작가의 말
죄수번호53425854

여긴 뭔가 신기하네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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