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갑작스럽게(3)

그리하여-

"내가 왜 이 좋은 날 접시를 사러가야 하는거야? 그것도 너랑?"
"아무 죄없이 끌려가는 제 생각도 좀 해주시죠..."
"너 생각보다 엄청 뻔뻔하다?"

그래, 뭐 결과적으로 부셔먹은건 나니까.
접시를 떨어뜨리는 순간을 현행범으로 잡혀버렸으니 더 할 말은 없었다.
하여, 하숙집의 소중한 자산 중 하나인 접시를 부신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꿇고 앉아 잔소리 폭격을 당했다. 레샤와 에반젤린까지 포함해 세 명 전부, 예외는 없었다.

다행히, 일처리는 매끄럽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월세 변제에 대한 약속은 깨지지 않았다. 대신 조건이 하나 더 붙었다.
바로 부셔먹은 것과 같은 크기의 접시를 무늬 관계없이 새로 사오는 것!

다만 에반젤린은 따로 클로에를 도울 일이 생겨 하숙집에 남고 직접적인 죄와 연결되어있는 나와 레샤만 시장거리에 나오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후드에 달린 모자를 잡아당겨 마구 흔들어주고 싶었다.

"근데 고작 시장이나 가면서 그건 왜 들고 다니는거야?"

나는 레샤의 기다란 스태프를 가리켰다.
자기 키보다도 커서 걸을 때마다 휘적휘적 대는 것이 영 거슬렸다.

"이건... 그... 뭐야... 대비 같은 겁니다. 신경쓰지 마시죠..."
"대비?"
"바깥에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아아 그러시구나.

"산적이나... 아니면 소매치기나...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시비를 걸 수도 있고... 또... 오우거가 나타날지도..."
"마을에서 오우거가 왜 나와 갑자기."
"그 말의 의미는 앞의 것들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거 아닙니까...?"

후드를 쓴 레샤의 얼굴에 왠지모를 음영이 짙게 드리워지기에 나는 반박을 그만두었다.

"세상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길을 걷다가 뒤로 넘어져서 코가 깨질 수도 있다고요...? 갑자기 소나기가 내릴 수도 있고요... 아! 그러고보니... 오늘 유난히 해가 밝네요... 소나기가 내릴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또..."

그렇게 말하며 레샤는 스태프를 양손으로 꽉 쥐었다.
예예 그러시든지 마시든지.
아무래도 그대로 놔두는 게 본인에게 더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자신의 불안감을 말로써 배출하는 그런 사람들.
레샤가 무어라고 중얼거리든 나는 그 애를 데리고 되는대로 근처에 있는 잡화점에 들어갔다.
후덕한 아저씨가 곧장 손님을 맞았다.

"어서오세요... 오 지망생, 싼 물건 많이 들어왔으니까. 한 번 쭉 둘러봐. 이 검 장식은 어때?"

나는 주인 아저씨가 내보이는 치렁거리는 금색 장식을 웃음으로 마다했다.
그 뒤 슥 둘러본 가게 전경에 접시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도기는 좀 전문적인 분야니까 그쪽으로 가봐야하는 걸까

"아저씨, 여기 접시 같은 건 없어요?"
"접시? 글쎄 그건 위로 올라가봐야 하지 않을까?"

민머리 아저씨는 손가락으로 저 위를 가리켰다.
위로 올라간다라... 그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수 없었다.
하, 차라리 내가 도기를 다룰 줄 알았다면 하나 딱 꺼내 주었을텐데. 물론 그런 건 내 개인적 소망에 불과했다.

틀혀박혀 지내는 동안 잠시 잊고 있었지만 수도도 지방도 아닌 이 애매한 위치의 도시, 미크로셀은 본디 옆에 작은 산을 끼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점차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용지가 부족해지고 개간이 필요해지면서...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이 도시의 명물은 가파른 오르막길을 따라 형성된 특이한 시장거리였다. 벽돌로 닦인 도로라 산길은 아니지만 계단과 언덕이 반복되는 이른바 트리마켓이라 불리는 죽음의 관광 코스.
활기찬 시장거리는 좋지만 사람이 많은 건 역효과를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아는 사람 만나고 싶지는 않은 이들에겐 더더욱.

"이, 이게 뭔가요..."

정상을 올려다보는 레샤의 얼굴에 더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환영한다고 적혀있는 아치형 입구 너머로 삼십도 이상의 경사진 길이 쭉 펼쳐져있었다. 거기에 상인들은 복적복적, 손님들도 왁자지껄.

"응? 너 여기 와본적 없냐?"
"저, 전 사실 여기 온지 얼마 안되서..."

중얼거리듯 말하던 레샤는 동공이 흔들리는 눈을 한 체 내 옆구리를 잡고 흔들었다.

"이, 이런 게 있을 거라는 얘기는 없었잖아요..."
"아니 당연히 아는 줄 알았지..."
"저, 저런 걸 오르다가는 도중에 쓰러질 거에요... 마른 나무가지처럼 비쩍 말라버려서 기운이 빠져버린 몸을 길 한켠에 비켜두고 홀로 외로이 다가오는 고독과 죽음을..."
"오냐, 그 땐 내가 널 거두어주마."
"흐으... 의뢰받을 때는 계약 내용을 꼭 확인하라 그랬는데..."

어쨌거나 퀘스트를 수행하려면 우리는 이 길을 거쳐야만 했으므로 나는 레샤를 잘 다독여가며 조금씩 트리마켓을 올랐다.
처음 오분은 나름대로 괜찮았다. 나에게 언덕을 오르는 건 귀찮은 일일뿐이지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었고 레샤도 조금 불안해보이지만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쁘게 굴려가며 길을 올랐다.

십분이 지나자 레샤는 조금씩 스태프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십오분이 지나자 작은 체구가 흔들릴 정도로 눈에 띄게 숨이 거칠어졌다.
이십분이 지나자 스태프가 걷고 있는건지 사람이 걷고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가 되었다.
괜찮냐고 물어보면 괜찮단다.
그리고... 마침내 스태프가 인간을 이겼다.

"야아!"

나는 바닥에 고꾸라진 레샤를 얼른 데리고 길 모퉁이에 있는 나무 상자에 앉혔다. 스태프를 들고 있기도 힘들어진 것인지 레샤는 스태프에 달린 끈을 어께에 걸어 등 뒤에 맸다.

"인간들은... 왜 이런 걸 만드는 걸까..."
"일단 너도 종분류는 인간이거든?"
"우린 결국 접시를 못 찾을거에요... 못 찾고 돌아가서... 클로에씨한테 갈아 마셔질 거라고요..."

레샤는 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들렀다 나온 가게의 수가 다섯개. 찾은 물건은 그나마 가장 비슷한 것이 애완동물을 위해 만들어진 나무 접시였다.
그거 가져갔다가는 아마 돈의 힘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겠지.
다행히 아직 돌아볼 곳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하아안참 많이.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아직 이십분밖에 안됐다."

나는 길거리에 흔히 세워져있는 작은 탑시계를 보고 말했다.
레샤가 숨을 헐떡이면서도 힘겹게 대꾸했다.

"레이크는... 백수라서 모르겠지만... 저는 지능캐라고요... 이런 건... 쥐약이에요... 후우..."
"백수랑은 상관없잖아. 싸울거면 선전포고부터 해라?"

"의외로... 체력이... 튼튼하시네요..."
"뭐... 이래저래 사정이 있어서. 너야말로 운동좀 하지 그러냐."
"사양하겠습니다..."

저 불리한 얘기가 나와서인지 레샤는 재빨리 화두를 바꾸었다.

"사람들이 레이크씨를 지망생이라고 부르던데... 그건 무슨 의미인가요?"
"선전포고 하자했지...!"

하도 자주 듣는 얘기라 평소처럼 우스갯소리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나름대로 진지한 눈빛의 레샤를 보고 하던 말을 그만두고 입맛을 다셨다. 진지하다기 보다도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투에 더 가까운 눈치였다.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사실 내가... 어... 그... 용사 후보 중 하나였거든."

이게 의외로 말하려고 하면 좀 민망하다고 할까. 괜히 유난 떠는 거 같다고 할까. 어릴적에 이거 한 마디면 동네 사탕이고 과자고 전부 싹쓸이를 해버리는 바람에 애들과 싸움이난 적이 있기도 하고 내 머리카락을 기념품으로 가지고 싶다는 누님이 찾아온적도 있고 돈을 줄테니 자기네 아카데미로 와주지 않겠냐는 일도 있었고...
기타 여러 말 못할 일들이나 기묘한 사건들의 시발점이 되곤 했으니 약간 껄끄럽다고 할까...
그건 그렇고.

"너 왜 사람을 그런 눈으로 봐?"
"아니...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허세나 과시는 인간의 기본적인..."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을 바라보는 표정.
나는 그 음침한 눈을 하고있는 레샤의 정수리를 붙자잡고 머리를 꾹꾹 눌렀다.

"아, 아! 이거 아프니까 그만해주시겠습니까? 지금 정중히 요청하는 겁니다."

정중히 요청한다고 밉상이 아니게되는 건 아니란다.
계속 꾹꾹 눌러주자 레샤가 반항적으로 소리쳤다.

"아, 아! 그러게 사기도 정도껏...!"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믿어라."

나는 레샤의 머리를 놓고 오른팔의 소매를 걷어 팔뚝 안쪽에 있는 인장을 보여주었다. 원망의 눈빛으로 노려보던 레샤는 푸른색 인장을 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내 얼굴과 인장을 번갈아 확인하였다.
대개 이런 반응들을 보였다.
소매를 내려 인장을 감추니 그제야 레샤가 입을 열렸다.

"엇... 정말... 어? 그, 그런데 이번 분기의 시험은 이미 끝났는데...? 그럼 레이크는..."
"그 이상 얘기하지 마라."
"아..."

침음을 흘리던 레샤는 입술을 말아물었다.
합줄기가 됩시다, 합.

"쉴만큼 쉬었으면 슬슬 일어나자."
"앗...! 그, 오분만 더...!"

그리하여-
우리는 레샤가 원한대로 오분 더 쉰 후 힘겨운 등정을 계속했다.
등정, 그래 등정이다. 굳이 산을 이렇게 깎아서까지 시장을 만들었어야 했던걸까. 도대체 선조들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런 걸 만든 걸까. 아니 그보다도 나는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런 동네에 남아있는 걸까.
그 비슷한 궁시거림을 레샤와 주고받다보니 어느덧 트리마켓의 중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까 물어본 바로는 이쯤 있다고 했는데."

나는 고도, 무려 고도라는 표현을 쓰는 안내 표지판을 찾아 확인했다. 높이는 맞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도기를 취급하는 상점을 찾을 수 있었다.
간절히 바라왔던 목적지에 도착하자 처음 봤을 때보다 부쩍 헬쓱해진 레샤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기라도 한 것처럼 가게의 입간판에 매달렸다.

"정 힘들면 정령들한테 도움을 받지 그러냐. 뭐 그런 거 있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이것저것 도움이 되는 애들 말이야."
"예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정령은 그런 게 아니에요... 하여튼 인간들이란..."
"아니, 방금 그 말이 그렇게 속물 같았냐?"

레샤는 스태프를 짚고 힘겹게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어나갔다.

"정령과 정령술사는 상호협력의 관계지 자기 조금 힘들다고 불러내는 하인과 주인의 관계 같은 게 아니라고요... 그리고 저는 원소의 정령을 다룹니다... 그런 거하곤 종류가 달라요. 정령술사들끼리도 계파란 게 있다고요..."
"아, 알았어 알았어. 내가 미안해."
"유념해주세요."

네이네이 알겠습니다.
나는 순순히 레샤의 말에 동의해주며 그 아이를 가게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금방 다시 나왔다.

이제! 이 순간! 바로 지금! 레샤에게는 제 손 두개를 합친 것보다 조금 큰 접시가 들려있었다.
끝났다.

"후훗... 후후후... 아하하하!"

나는 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깨먹은 것보다 쪼오끔 더 크기는 했지만 이정도면 클로에도 그걸 걸고 넘어지진 않을 것이다. 퀘스트 완료.
그래 나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이거야. 이정도는 식은죽 먹기지.
으흐흐흐...

"뭔가 레이크의 웃음소리가 기분 나쁘지만 지금은 넘어가도록 하죠."

라고 말하는 레샤 역시 답지않게 후후후하는 웃음을 흘렸다. 내가 손바닥을 내밀자 잠깐 눈치를 살피던 레샤는 힘껏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걸로 퀘스트는 사실상 완결이지만 어쩐지 집으로 돌아가기가 아쉬워진 나는 조금 더 고민했다.
그렇잖아? 오랜만에 여기까지 나왔는데 남의 심부름 하나 하고 돌아가는 건 왠지 손해보는 기분이었다. 이왕이면 한동안 나가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도록...
음,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니 나도 이미 훌륭히 글러먹었구만.

"저기 레샤. 우리 다른 데좀 들렀다 가지 않을래?"
"예에에...? 음... 그..."

퀘스트 완료의 여파로 총명히 빛나던 레샤의 눈이 순식간에 가늘게 좁혀졌다. 특별히 말하지 않아도 싫은 티 팍팍 내는 걸 보니 성격상 사람 많은 곳에 오래있고 싶어하지 않은 건 알수 있었지만 나는 그 애를 설득하기로 했다.

"잠깐이면 돼. 여기 근처에 로망소설 빌려주는데가 있거든."
"로망소설...? 기사들의 이야기 말인가요? 하여튼 남자들이란..."

왜 시간 때우기에 얼마나 좋은데.

"그런게 관심없으면 어... 음..."

무얼 미끼로 삼아야할지 잠시 고민해봤지만 특별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사탕이라도 사줄까?"
"사, 사탕...? 애 취급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그럼 쿠키 같은 건 어때?"

스태프를 휘두르기라도 할듯이 들어올렸던 레샤의 움직임이 우뚝 멈춰섰다.

"그, 그건... 조금 흥미가 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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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6 21:54 | 조회 : 809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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