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갑작스럽게(2)

구나아... 라는 목소리를 들은 것이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눈을 뜬 곳은 복도의 끝자락. 에반젤린의 무릎을 배고 누워있는 상태였다.
뭔 구경거리가 났는지 클로에도 허리춤에 손을 얹고 날 내려다보고 있다.

"어이 지망생, 내가 누구야?"
"누구긴... 악덕업주지."

참 이상한 질문을 한다 싶었다.

"오케이 정상이네. 다시 보내."
"자, 잠깐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안나는데 그런 처사는 부당한 거 같아요!"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나는 벌떡 일어나 클로에의 바짓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에에이 별 거 아니었어. 그냥 방에서 갑자기 불길이 확 솟는 바람에 네가 나가떨어진 거뿐이야."
"그게 별 일이 아니면 대체 뭐가 별 일이야. 하숙생이 무슨 드래곤이야? 왜 다짜고짜 불을 뿜어. 그런 게 어디있어."
"아 무슨 남자가 이렇게 겁이 많아. 어차피 에반젤린이 힐로 치료해주니까 문제 없잖아."

힐로 치유된다고 그게 없었던 일이 되는 게 아니잖아! 어떻게 생각하면 그게 더 잔인해!
나는 반대로 에반젤린에게 시선을 돌려 '살려줘.'의 눈빛을 보냈다.

"레이크님을 위해서라면 힐 정도는 얼마든지..."

돌아온 건 수줍은 표정으로 힐은 백이든 천이든 써주겠다는 에반젤린의 확답뿐이었다.
맞아 이 녀석도 한패였지.
이건 틀렸다.
보다못한 클로에가 한 숨을 쉬었다.

"알았어. 대신 한 달치 면제해주면 되잖아. 그럼 됐지? 이 이상은 안 돼."

한 달치. 그러면... 나는 이번 달의 남은 시간을 벌게 되는 셈이었다.
방에서 불이 튀어나오긴 해도 옷째로 타버리지 않은 걸 보면 드래곤이라도 매우 약한 드래곤일지도 모르고... 근데 애초에 약한 드래곤이란 게 존재하는 건가?
아 모르겠다. 아무래도 그 날 이후로 머리속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한 달치... 약속한거다? 나중에 딴 얘기하면 안 돼. 나 깽판칠 수도 있어? 요새는 무직이 더 무섭다?"
"그래그래. 어여 가봐."

굳게 약속받은 나는 에반젤린과 함께 다시 문제의 하숙생 방 앞에 섰다.
마른침을 삼키고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역시 조금 망설여져서 에반젤린을 찾아보니 어느샌가 멀찍이 떨어져있는 수녀가 보였다.
야! 언제는 내 곁을 지킬거라며!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일단 들켜선 안되니 그 마음 꾹 참고 문을 두들겼다.

"레스트레이드씨... 택배가 왔는데요..."
"그건 아까 했잖아요. 레이크님!"

그럼 이거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어떻게 해?

"정말인가요...?"

생각치도 못하게 문은 열렸다. 설마 그럴거라곤 전혀 생각치 않았던 나는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쏘쏘쏘지마!"

일단 소리쳤다.

"또, 또 속였어?!"

온다. 불이 온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그러나 내게 온 건 얼굴을 강타하는 바람이었다. 그다지 강하지 않은 바람 덕에 이번엔 나가떨어지지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주한 방의 주인은.

"써, 썩 물렀거라... 이 사악한 위선자..!"

몸보다 큰 로브를 뒤집어쓴 꽁지머리 소녀였다.
그와중에 어디서 나온지 모를 물줄기가 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하여-
우리는 꼬마녀석의 방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탁한 나무색이 섞인 가죽로브엔 불규착한 모양으로 그려진 빨강, 초록, 파랑, 노랑색의 문양 조각들이 모여 큰 고리를 일종의 모자이크 양식처럼 이루고 있었다.
공부한 걸 벌써 까먹지 않았다면 그건 분명...

"정령술사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요."

뭔가 내가 해야하고 싶었던 말을 에반젤린에게 뺏긴 기분이었다.
그렇다. 방에서 불을 뿜는 하숙집 드래곤의 정체는 이 정령술사 소녀, 아니 꼬맹이였다.

"혹시... 너 어디 아프냐?"

나한테 불을 쏴서 그런 게 아니라 어쩐지 그 애 얼굴이 정말 헬쓱해 보여서 물은 거였다. 어쩌면 그냥 인상이 무뚝뚝해보여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라고 그랬어요...."

기껏 걱정해줬건만 정령술사는 로브의 후드를 쓰며 그렇게 말했다.
어우 목소리는 작은 주제에 자기 주장이 아주 뚜렷하다.
하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어서 나는 간단히 대답해주었다.

"내 이름은 레이크 아이힐데른이야. 그리고 네 옆에 있는 애는..."
"에반젤린이에요."

우리는 방 끝과 끝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다.
그것보다 에반젤린은 어째서 저 애 옆에 있는걸까. 그걸 또 받아주는 건 뭐고. 나는 선 그어놓고 넘어오지 말라고 했으면서...

"그리고 너는?"
"모르는 사람한테 이름 함부로 가르쳐주는거 아니라 그랬어요."
"나도 여기서 지내는 사람이잖아 한 번도 본 적없어?"
"뭔가요, 신종 사기수법인가요...?"
"아니이... 지금은 내가 먼저 이름을 븕흤즎으..."
"왜 이렇게 제 이름에 집착하시는 겁니까? 혹시...!"
"뭔 소리야 또!"
"화내는 걸 보니 역시...!"
"'역시...!'는 뭐가 '역시...!'야! 어? 무슨 혹시하고 무슨 역시를 말하는거냐 지금? 이 막대기, 그냥 확 넘어가버린다?"
"거기에 제 스태프까지 노리고 있다니...!"
"그런 귀한 물건이면 이렇게 하찮게 쓰지말란 말이야!"

나는 덥썩 잡았던 막대기 같이 생긴 스태프를 도로 얌전히 내려놓았다. 이제보니 끈도 달려있고 잘 다듬어진 나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까지 보고만 있던 에반젤린이 살며시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좀 알려주시겠어요, 자매님? 레이크님은 그리 위험한 분은 아니랍니다. 아직 직업이 없으니 완전 무해한 백수에요. 가끔씩 저를 보는 눈이 위험하기는 하지만..."
"내가 언제 그랬어! 네가 이상한 얘기하니까 쟤 표정이 더 찝찝해졌잖아!"

...알겠습니다 사제님, 하고 찝찝하고 어두운 표정의 소녀가 말했다.

"제 이름은 레샤 레스트레이드... 정령술사입니다..."

야무지게 자기 직업까지 밝힌 레샤는 처음으로 제대로 고개를 들고 얼굴을 보였다. 로브에 가려져 있던 소녀의 검은 머리와 회색 눈동자가 미묘하게 부족한 빛을 띠었다. 에반젤린을 반쯤 방패 삼는 건 덤이었다.
소녀는 금방 다시 고개를 떨구고 혼자 중얼거렸다.

"여긴 왜 온 걸까 대체... 그건가... 역시 그건가...?"

어... 시작하기도 전에 부정적인 분위기가 쫙쫙 퍼져나오는데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야할까. 이도저도 모르겠으니 우선은 퀘스트의 내용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저, 혹시나 묻는 건데 진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제 몸 상태는 왜 자꾸 묻는 건가요. 미리 말해두지만 안 살 겁니다."

이게 누굴 잡상인으로 알아.

"그런 거 때문에 온 게 아니야. 클로에가 네 걱정을 엄청 했거든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하니 무슨 문제가 생긴건 아닐까 하고 말야. 또... 음... 뭐 일단은 그렇다고..."

민감할 수도 있는 돈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했다.
그런데 레샤는 그것만으로도 생각보다 훨씬 더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왜왜왜...과가가과관리인이... 저저저저한테... 과과가가과관심을..."

와 사람이 저렇게 벌벌 떨 수 있구나.

"아니, 관리인으로서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닌가 싶은데."
"위, 위험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세상에 당연한 관심이란건 없다고요... 분명 뭔가 있는 거라고요..."
"아니, 내 생각엔 그냥 순수한 걱정인 거 같은데."
"사람 속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너랑은 친구 안 해, 하고 돌변하는게 사람이라고요...!"

그래 널 보니까 그 돌변한다는게 뭔지 알 것 같다.
나는 갑자기 눈동자의 초점까지 잃은 체 목청까지 높이는 레샤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꼭 어딘가 다른 곳을 보는 것 같았다.
안돼겠다, 싶었다. 뭔가 평소에 엄청 피곤하게 사는 모양인가본데 이 이상 대화를 더 오래 끌었다가는 나까지 걱정투성이 인간이 될 것 같았다.

"저기 그 레샤... 라고 불러도 되지? 그러니까 사실 내가 온 이유는..."
"그래요, 이 패턴! 실은... 하고 시작하는 이 약속된 패턴...!"
"네가 돈을 똑바로 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 아냐!"

순간 클로에에 빙의했던 나는 버럭 소리쳤다.
어?! 내가 댓바람부터 구박받고 이불 뺏겨가면서...

"돈... 입니까?"
"그래 돈. 월세 내기로 한 날이 지났다며. 혹시 돈이 부족하면 사정 잘 말해서 빌면 좀 미뤄주기도 하니까... 뭣하면 나도 같이 빌어줄까?"
"돈은 있습니다."

허심탄회하고 쉽게 말해버리는 레샤의 태도에 나는 잠시 스태프에 한 번 더 손이 갈 뻔했다.

"있으면 내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그게 문제인지 몰랐으니까 그렇죠. 이 침략자!"
"아침부터 땅물불바람 마음모아 사람한테 쏘는 녀석이 누구보고 지금!"
"그건 정령들이 한겁니다. 그리고 흙은 아직 안 뿌렸고요...! 지금이라도 뿌려드릴까요...?"
"지금 내가 널 때려도 내가 아니라 오른손이 한거니까 괜찮은거냐, 엉?"
"여자애를 때리겠다니 이 무슨 파렴치한..."
"그래요, 레이크님. 그건 저도 용납할 수 없네요."

에반젤린까지 나서 뭔가 상황이 내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먼저 흥분을 가라앉히고 앉은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러자 레샤도 마찬가지로 전과 비슷한 태도로 돌아와 얌전히 에반젤린 뒤에 숨었다.
후... 일단 심호흡 한 번 더.

"그럼 방에서 왜 안 나왔던 건데."
"왜 갑자기 제 사생활에 관심을... 역시..."

아 이 자식이 진짜...

"알았어 알았어... 더 이상 안 물어볼테니까 그럼 월세만 줘. 내가 클로에한테 전달해줄게."
"뭔가요, 신종 사기수법인가요. 돈 거래는 직접 얼굴 보고 하는 거랬어요."

아! 아아아! 으아아아아아! 악! 악!
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바닥에 누워서 소리 지르며 난리 피우고 싶었다.

"도대체 너한테 그런 소릴하는 사람이 누구냐."
"사람이 아니에요. 정령들이죠. 비록 초급이긴해도 엄연히 정령술사라고요?"

그럼 걔네 말 믿듯이 사람 말도 좀 믿어봐라.
진정해라 진정해야한다. 예로부터 화낸 사람이 진 거라는 말도 있지 않나.

"그럼 직접 갖다줘."
"엑, 그건 좀..."
"또 뭐가 문제인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살짝 움찔한 레샤는 방바닥에 원을 그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지 말고 좀 알려주시겠어요. 레샤 자매님?"
"으..."

에반젤린이 묻자 괴로운 소리를 내던 레샤는 도리가 없는듯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장에서 손바닥만한 접시를 꺼냈다.

"접시?"

전혀 예상치 못한 물건의 등장에 나는 맥빠진 소리를 흘렸다.

"그래요. 이 접시가 모든 일의 원흉인 겁니다..."

그렇게 레샤는 자신이 방에서 나오지 않게된 이유를 접시에 담아 풀어냈다.
그러니까 대충 이해하자면 입주 날에 클로에에게 파이를 대접받았는데 너무 맛있어서 아무 생각없이 접시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고 그대로 까먹고 며칠 째 방치하던 와중에 클로에가 접시를 찾는 걸 보고 기억해내서 방에 틀어박히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결론은 입주 때 먹은 파이가 맛있었다는 부분 빼고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레샤 자매님은 왜 접시를 안 돌려 드린건가요?"

에반젤린이 레샤에게 다정히 물었다.

"아니... 그게 그러려고 했는데... 막상 하려니까... 그..."
"그럼 내가 해줄게 그러면 되지?"

나는 레샤의 스태프를 훌쩍 넘어 그 애가 들고 있던 접시를 뺏어 들었다. 염려했던 것보다 일이 쉽게 해결될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앗! 잠깐만요, 잠깐만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아...!"
"접시 가져다 주는데 무슨 마음의 준비씩이나 필요해."

레샤가 내 손에서 다시 접시를 뺏으려고 했지만 팔을 들어올리면 아직 키가 한참 모자랐다.
하핫! 뺏어보시지. 하하핳하!

"그치만...! 관리인 그 사람 엄청 무서워 보였다고요...! 도둑을 갈아 마실거라고 했다고요...! 제가 감옥에 간다고요...! 레이크씨는 제가 차디찬 돌바닥에서 얼어 죽어도 좋은건가요...? 아니, 아이힐데른씨...!"
"누가 접시가지고 그렇게까지 하냐!"

사소한 몸싸움과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내, 내놔 이 백수자식아...!"
"너 방금 뭐라 그랬어!"

그리고 그 어지러운 시국을 가르는 한 마디 외침...

"조용히 해결보라고 보내놨더니 왜 이렇게 시끄러워!"

...에 손가락 끝에 걸려있던 접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와장창.

"어?"
"익."
"어머."

나, 레샤, 에반젤린이 동시에 낸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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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6 21:53 | 조회 : 756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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