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갑작스럽게(1)

그리하여-
용사가 결정되었다. 갖가지 시련으로 가득한 시험, 치열한 경쟁을 이겨낸 단 한 명의 인간이 여신이 점지한 용사로 인정받게 된 날이었다.
물론 나랑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거리가 먼 기념일이다.
굳이 연관점을 찾자면 그 날로부터 30일이 지났다는 정보를 알려주는 정도.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 것이다.
아... 솜털안을 뒹굴고 있는 이 기분....

"아앗! 레이크님 또 방 안에서 누워만 계시고... 저와 함께 새 삶을 찾으신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너랑 새 삶을 찾는다고 했니.
그건 그렇고 남의 방문은 어떻게 열고 들어온걸까. 아 그 녀석이 열쇠를 준건가.

"어어 에반젤린이구나. 지금 이건 그거야. 그 뭐랄까... 있잖아 에반젤린?"
"네?"

"내가 십 년동안 준비했다고 했잖아. 그래서 여러모로 생각을 해봤는데 십 년이나 달려왔으면 이제 좀 쉬어도 되지 않겠어? 그렇잖아? 십 년이잖아? 서당개도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데 인간이 십년이면 일년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아?"
"어... 음... 그... 레이크님...?"

내 완벽한 논리에 에반젤린은 할 말을 잃고 떨었다.
분명히 얼마 전에 의욕에 불타올랐던 것은 맞다. 그런데 머리를 식히고 나니 뭔가 억울해진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에게 보상을 줄 의무가 있었다. 그래 따뜻하고 푹신한 이불에 쌓여있는 그런 적절한 보상.

"저번 주에도 비슷하게 말씀하셨던 거 같은데요... 어제랑 그제도요..."
"그래?"

그랬던가?
음... 따지고보니 에반젤린과 의기투합 했을 때, 그 때가 수능 날로부터 십 오일쯤 지났을 때니까 그 때부터 계산하면 이런 생활을 하게된지 이제 이 주가 막 넘은 차였다.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됐나? 오늘 무슨 요일이야?"
"아아... 우리 레이크님에게 벌써 백수폐인 초기증세가..."

에반젤린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난 우리 레이크님이 아니라 레이크 아이힐데른인데."

아니 그것보다 누구보고 백수폐인이라고?
발끈했던 나는 살짝 일어날뻔했다가 도로 침대 위에 엎드렸다.
뭐 어떻게 불리든 아무렴 어떤가.

"저기, 에반젤린."
"네, 말씀하세요."

내가 부르자 에반젤린이 반색하며 대답했다.

"문 좀 닫아줘. 자꾸 바람이 들어와서 춥네."

여태 말했던 부탁은 무조건 들어주었던 수녀님은 닫아달라는 문은 닫아주지않고 저벅저벅 내게 다가왔다.

"응? 아니 문좀 닫아달라니까?"

그러더니 갑자기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을 잡아당겼다.

"더 이상은 못 참아요! 원래의 레이크님으로 돌아와주세요!"

습격에 식겁한 나는 결사항쟁의 의지로 이불 속에 몸을 말아넣었다.
공기에 닿으면 죽는다! 정말로 그런 마음으로!

"원래의 레이크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레이크 아이힐데른은 이런 사람이니까 좀 놔주시겠어요?!"

이불 밖으로 드러난 몸에 찬 공기가 그대로 옆구리까지 닿자 뭔지모를 괴성이 튀어나왔다.

"으히익! 좀 놔달라고 춥다고! 바람 들어온다고!"
"이제 겨울 다 지나서 봄인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봄은 삼한사온이잖아! 오늘은 분명히 삼한이야! 내가 알아! 느껴진다고!"
"밖으로 나오신 적도 없으면서 거짓말 하지마세요 그러다 벌받아요!"

"바람 들어온다, 바람! 으아 나 죽는다! 죽어!"

생존본능은 아직 날카롭게 살아있던 것인지 나는 용케 에반젤린을 뿌리치고 침대 구석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는 의심많은 야생의 눈초리로 에반젤린을 노려봤다.

"으... 그, 그럼 협상하죠!"

에반젤린이 소리쳤다.

"제가 문을 닫으면 레이크님은 이불에서 나와주세요."

아니, 안 될 말이지.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절대 안 돼. 못 나가. 솜이불은 이제 내 영혼의 동반자라고. 옷 같은거라고. 나보고 알몸으로 나가라는 거야?"
"...영혼의 동반자?"

순간 무언가의 스위치가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뭔가 어두워진 기분이다.
에반젤린은 작은 난방팬에 남겨져있는 불씨를 집게로 들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걸어왔다.
아아 뭔가 어둠이 다가오는 기분이야.

"그러면... 그 불순한 물건은 지금 당장 태워버리고... 제가 대신..."
"아니...! 그... 요걸 태우면 저도 같이 죽는데요, 자매님?!"

"걱정하지마세요. 사제이니만큼 힐은 제대로 배운 몸이니까요..."

아니 그 문제가 아닙니다만!

"야, 지망생! 아침부터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어디선가 들려온 구원의 목소리.
동시에 에반젤린의 스위치도 다시 올라가 우뚝 멈춰섰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거침없이 내 방으로 들어왔다.

"뭐야, 에반젤린도 있었구나."
"아, 안녕하세요. 클로에 자매님."

에반젤린이 편안한 미소로 인사를 건냈다.

"어... 그래 반가워... 그런데 불씨는 왜 들고 있어?"
"네? 음... 그러게요. 제가 왜 이런 걸..."

글쎄 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난 아직도 의심이 갔다. 어쨌거나 에반젤린은 불씨를 다시 있던 곳에 놔두고 평소처럼 은은히 미소를 짓고 서있었다.

"뭐 대충은 알겠네. 어이, 지망생."

에반젤린 너머로 힐끗 이 쪽을 본 클로에가 이번엔 내게 다가왔다.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우선은 감사가 먼저였다.

"고맙습니다. 용사님."
"용사? 갑자기 뭔 소리래?"

의아해진 붉은 단발머리의 소녀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런 게 있습니다요...

"이런 누추한 곳에 어인일로 행차를 하시었는지..."

내가 저자세로 먼저 나서자 클로에는 한숨을 쉬며 혀를 찼다.

"너어... 에반젤린을 봐서라도 이제 뭔가 좀 해보지 그래? 보는 내가 다 답답하다고."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만, 제가 달려왔던 세월이 어언 십 년이옵니다. 하여 지금은 좀..."

"세를 똑바로 내면 내가 말을 안 하지!"

클로에가 불호령을 내렸다.
나는 냉큼 입을 다물고 납작 숙였다.
맞는 말이다. 그녀는 하숙집 관리인의 딸. 이 하숙집 안에서만큼은 여왕 두렵지 않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꼬우면 딴 데 가는거다. 근데 하숙비는 여기가 제일 쌌다.
더러운 시장경제.

돈만 똑바로 낸다면 클로에도 친절한 관리인이었다.
나는 그게 아니니까 이런 소리를 듣는거다.

"사정 딱하다는 거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지망생."
"걱정마세요 레이크님. 돈이라면 제가 어떻게 해서라도..."
"이것 봐, 에반젤린 같은 여자애한테 이런 말 하게 만들거야?"

나는 갈퀴손으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왜 니들은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와서 사람 비참하게 만들고 그러냐.
악! 하고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저 애들의 말이 다 옳다. 나는 돈을 마련해야한다. 그게 싫으면 다시 돌아가던가. 요점은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일을 해야한다.
십 년을 달려왔으니 조금은 쉬어도 되지 않느냐 그런 건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
아니... 반은 진심이었지만.

아무튼 클로에의 말대로 나는 뭔가 해야했다. 다만 하고 싶어도 그 장벽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밖에 나가보면 생각보다 일손을 찾는 곳은 많았다. 그런데 단순히 식당을 찾아가도 경험이 있느냐라고 물으면 자동으로 입이 다물렸다. 그야 해본적이 없으니까.

뭔가를 시작하기에 열 여덟살은 조금 많은 나이였다. 한참 어린 접시닦이가 날 보는 시선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뭐야? 이 형 뭐야? 열 여덟살이나 먹고 이런 것도 제대로 안 해봤단 말이야? 이거 완전 형도 아니고 동생이라고 불러도 되겠는데?''
물론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겠지!
하지만 그 순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몇 번 꼬맹이들에게 밀려나고나니 뭔가 의기소침해져서... 그래서 이불과 함께... 이 방에서 나무천장의 결 숫자를 세었던 것이 벌써 이만 삼천개였다.

"열 두살한테 진게 아직도 충격이야?"
"아니! 걔 엄청 잘한다니까? 너도 봤으면 그런 말 못할걸. 그 접시를 돌리면서 막... 휘황찬란한 기술이, 이야... 나는 말로도 흉내를 못내겠다."

한심하게 쳐다보는 클로에에게 항변해보려고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그 녀석, 분명히 접시닦이계의 거성이 될 재목이었다.

"...실전에 약한 낙방자라서 죄송합니다."

그렇다. 나는 실전에 약했다. 좀 더 정확히는 생활력에 대한 실전경험이 부족했다. 그것도 지난 십 년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턱없이.
접시 전문가의 혹독한 세계 앞에서 난 불모지에 핀 민들레 한 송이에 불과했다.
내뱉는 클로에의 한숨이 더 짙어졌다.

"그런 때일수록 더 밖에 나가서 이것저것 해봐야지."
"왜 갑자기 정론을 말하고 그래 빈정 상하게?"
"하여튼 입만 살아가지고...! 모르겠다! 내가 착한게 죄지!"

클로에가 상아색 앞치마를 털어 펼쳐내고 말했다.
이 여자가 하숙비 독촉하러 와서 지금 뭐라는 거야.

"이번 달 세 좀 까줄테니까..."
"감사합니다. 클로에님. 이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방금 전에 했던 불순한 생각은 지금 고할테니 부디 사해주시길..."
"아직 말 안 끝났어."
"넵."

빠르게 순응하고 경청의 자세를 취하자 클로에가 말을 이었다.

"요즘 너보다도 더 심각한 녀석이 하나 있단 말이야? 새로 들어온 애인데, 그 애랑 얘기를 좀 해줬으면 좋겠어."
"저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안에 틀어박히는 건 개인의 자유가 아니온지..."
"나도 사생활을 침해하고 싶어서 그러라는 게 아니야. 근데 다른 하숙객들이 옆방에서 이상한 말소리가 자꾸 들린다고 얘기하는 걸 어떡해. 거기에 밖으로 안 나오니 당연히 내기로 한 집세도 안 내고있고."

그 쪽이 문제였군요.

"뭐야 그 표정?"

클로에의 지적에 나는 바로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별거 아닙니다. 아무튼 걔랑 얘기만 해보면 되는거야?"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닌가 확인도 해보고 하는 김에 집세도 받아오면 더 좋고."

뒤쪽에 힘있는 미소가 실린 걸로 보아 주요 목표는 후자인 것이 분명하다.
그 쪽이 문제인 거 맞잖아.

"이웃을 돕다니 좋은 일이네요. 우리 이거 해요. 레이크님!"

소원이 이루어지기라도 한듯 양손을 맞잡은 에반젤린이 말했다.

"에반젤린도 저렇게 말하는데 하는게 어때? 접시 닦이보단 이런 게 적성에 맞을 거 같은데?"
"어차피 안 한다고 해도 강제로 시킬거잖아"
"잘 아네. 알았으면 얼른 나가."

클로에는 한없이 차가운 눈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그리하여 나는 간만에 특수목적으로 외출을 하게 된 것이다.
특수 목적이라 함은 식사를 비롯해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것 외의 목적을 의미했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그냥 약간 어색하단 뜻이었다.

"왠지 조금 두근거리네요."

아까부터 후훗, 하고 콧노래 비슷한 웃음소리를 내던 에반젤린이 말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의 부탁을 받아 돕는다니. 꼭 퀘스트 같지 않나요?"

퀘스트? 에반젤린의 말대로라면 지금 내가 수행하고 있는 퀘스트는 대략 이러했다.

[퀘스트 : 변제는 제때 제때]
의뢰인 : 클로에 뢴느
월세를 내지 않은 불순한 하숙객을 찾아가 아픈 곳이 있는지 확인하고 그 여하와 관계없이 하숙비를 (무조건) 받아와라. 제한 시간은 하루.
성공 보수 : 밀린 이번 달 하숙비의 일부 변제.

"...에반젤린, 우리 뭔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게 아닐까."
"잘못된 길이라뇨? 그 레스트레이드라는 분의 방은 바로 코 앞인 걸요. 이제 다 왔어요."

아니, 같은 하숙집이니까 길을 잘못들 만큼 먼 길은 아닌 게 당연하지만 지금은 그 얘기가 아니었는데.
어쨌거나 우리는 그 문제의 하숙생이 지내고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

"실례합니다. 레스트레이드씨 안에 계세요?"

에반젤린이 방문을 두드려봤지만 아무 소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안계신 것 같은데 다음에 다시 올까요?"
"안 나오는 게 문제라는데 뭘 천연덕스럽게 ''다시 올까요?'' 야."

평범하게 미소짓는 에반젤린을 대신해 문 앞에 귀를 대고 집중하자 뭔가 속삭이는듯 미약한 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대충 ''왔어, 어떻게 하지?'', ''결국 이렇게 되고 만건가.'' 하는 내용인거 같은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저기 죄송한데 문좀 열어주세요. 잠깐이면 되요."

문을 두들기며 한 번 더 부르자 목소리는 멎었다.
오호, 없는 척 한다 이거지?
이럴 때는 대국민적으로 통하는 방법이 있었다.
나는 한 번 더 문을 두드리고 목소리를 밝은톤으로 꾸며 말했다.

"레스트 레이드씨... 택배왔어요... 지금 으음 그러니까... 무슨무슨 이벤트 당첨되셔서 무슨무슨 경품을 받으셔야하는데... 이게 꼭 서명을 받아야되는 거라... 문을 좀 열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아 열렸다.

"잡았다!"

나는 잽싸게 열린 문틈으로 손을 비집어 열었다. 그리고 동시에.

"뭐, 뭣...! 소, 속였구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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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6 21:53 | 조회 : 878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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