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좋았다

나는 용사다.
아니 정확히는 용사 지망생이다.
아니 이젠 그마저도 지망생'이었다.'라고 하는 편이 좋을지 모르겠다.
아니 이젠 뭐... 아니, 이젠 그만하고 싶다...

이곳 테라리아에서는 매분기, 그 분기라는 것이 정확히 얼만큼의 사이를 두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 분기 마다 세계를 구할 용사가 태어난다.
용사가 될 아이는 대략 일곱에서 여덟살 정도의 나이가 되면 여신의 계시라는 이름의 꿈을 통해 자신이 장차 용사가 될 수도 있는 재목이라고 지목 받는다.

험난한 난세를 밝힐 구원의 빛.
길 잃은 사람들을 위한 여신의 메시아.
난폭한 마왕으로부터 세상을 지켜낼 선구자.

그 모든 소망을 두 음절에 담아 우리는 용사라고 불렀다.

나도 그런 꿈을 꾸었었다. 여신. 천상에서 내려온 아름다운 그... 아줌마가 나한테도 온 것이다. 계시를 받은 아이의 집에서는 본디 자신의 아이가 용사가 될 재목임을 소문내지 않고 가정에서 평범하게 키우는 것이 원칙이다. 성당에 가면 지금도 그렇게 적혀있다.
다른 집은 그렇게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고아원 출신이었던 나는 그다지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검에 대한 수련을 받고, 마법에 대한 교육을 받았으며, 생존을 위한 기초지식을 습득하고 실습했다.
돌이켜보면 여덟살 때부터 꽤나 바쁘게 살았다.

그게 썩 나쁜 일은 아니었다. 고아원에 용사의 재목이 나타났다는 게 은연 중에 퍼져나가면서 고아원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늘었고 힘들었던 살림살이가 조금씩 나아졌다.
내적으로는 고아원에서 개인방을 가지는 특권을 누리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만 17세가 되는 날. 시골에서 벗어나 근방의 도시로 올라가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 마므루 왕국에서는 18세가 되면 큰 성당에서 성흔을 확인하고 용사의 인장을 받아 여신의 계시를 받았던 아이라는 걸 증명받고나서 수도로 올라가 시험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 시험을 봐야했다.
빌어처먹을 세상.
이 곳은 테라리아, 매 분기마다 용사가 될 아이들이 태어나는 검과 마법의 세계.
아이들이 태어나는 세계.
아.이.들.이.

하아... 뭐... 내가 수능을 치려고 했을 때는 경쟁률이 162:1 정도 되었다. 저번 분기에 비하면 계시를 받은 아이들의 수도 적었고 나 스스로도 자신이 있는 편이어서 숫자에는 크게 괘념치 않았다.
십 년이다. 계시를 받은 여덟 살때부터 시험을 보는 열 여덟살이 될 때까지 자그만치 십 년이었다. 나는 용사가 되기 위해,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 그 긴 세월을 달려온 것이다.

아 잠깐만 이 대목에 다다르면 항상 코 끝이 찡해진다.
이는 내가 쿨하지 못한 남자라는 뜻이 아니다. 그만큼 슬픈 일이라는 뜻이다.

나는 그 마지막 문턱에서 실패한 것이다.
큭... 나는 눈물이 흘러내릴 것을 대신해 양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이제 기운 좀 내세요, 레이크님..."

위로 같은 거 필요없어! 다 나가! 혼자 있고 싶으니까!
하아... 마음 같아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마냥 그렇게 투정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 앞에 양손을 모아 쥐고 앉아있는 소녀의 이름은 에반젤린.
그 아줌마, 아니 할망구를 모시는 플라나 정교의 프리스트였다.
허리에서 찰랑이는 별무리의 빛같은 은발과 푸른눈이 연보라빛 사제복과 잘 어울리는 소녀였지만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

"혹시라도 레이크님의 상심이 가시지 않는다면 제가 이 한 목숨 공양해서라도..."
"아니아니아니! 그거 살리려고 이렇게 된거니까 그러지는... 말자고..."

나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음에도 왠지 모르게 점점 힘이 빠졌다.
에반젤린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 수녀님이었지만 그 뭐랄까, 감수성이 너무 풍부하다고 할까...

"아아, 그랬지요...! 레이크님이 살려주신 이 귀한 생명, 레이크님을 위해 알뜰하게 사용하겠어요...!"

곧잘 저런 소리를 하곤했다.

"아니, 그래, 어, 음, 어, 음... 그래, 차라리 그쪽으로 힘 써줘..."

차라리 말이야.
일단은 에반젤린이 진정한듯 보이자 나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에반젤린과 내 사이에 있었던 일은... 뭐 별 일 아니었으니까 넘어가자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려왔다.
어쨌거나 내가 멍청했던 거니까. 나의 아둔함으로 시험장에 지각했던 것을 에반젤린 탓으로 돌릴수도 없었다.
그래도 이따금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갈걸 하는 생각이 들곤했다.
하지만 이제와 그런 생각이 무슨 소용인가.
왠지 또 힘이 빠진다.

"아하! 아하하하 하 하 하 하 하! 하아..."
"엇! 드디어 기운이 나신건가요 형제님!"

내 얼빠진 웃음 소리에 에반젤린의 표정이 밝아졌다.

"기운이 난 사람은 이렇게 웃지 않아요, 자매님."
"그, 그럼..."

그리고 다시 어두워졌다.

"이제부터 뭘 할까 생각 중이에요."

저한테는 이제 아무것도 없거든요. 꿈도 희망도 미래도.
고아원에서 가져온 돈은 이제 바닥을 보였다. 그렇다고 고아원 사람들의 큰 기대를 한 몸 가득 받아 대차게 떠났는데 쪽박차고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응시조차 못했다고 어떻게 말을 한단 말인가.
그치만 당장 하숙집의 집세도 못내게 될 판이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어... 그... 레이크님은 뭐든지 잘 하실 수 있을거에요."

에반젤린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 그렇잖아요? 용사가 될 아이 중 하나였고."

그렇지. 될 수도 있었지.
결과는 실패지만.

"저를 업고도 끄덕없을 정도로 체력도 튼튼하고."

그야 매일 고아원 운동장에서 수련했으니까.
결과는 실패지만.

"마법에 대한 지식도 출중하고."

그야 매일 책상에 붙어 앉아서 공부했으니까.
결과는 실패지만.

"무, 무엇보다 정의로운 분이시니까요."

그야 미래의 용사를 위한 백가지 메뉴얼을 달달이 외웠으니까.
그 때 있었던 일은 그저 책에서 본 내용을 우연찮게 따라한 것뿐이다.
어쨌거나 결과는 실패지만.

"에반젤린."
"네?"

기다렸다는듯 에반젤린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꾸를 주지는 못했다.

"눈앞이 캄캄해."
"누, 눈이요? 어떡해! 힐, 힐이라도 지금!"

"그런 게 아니야!"

나는 기대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테이블을 치고 소리쳤다.

"아... 다행이에요. 저는 또..."

에반젤린은 놀라거나 하기보다는 오히려 내 눈이 보인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걱정하지마세요."

수녀는 내 손을 붙잡았다. 서슴없는 접촉에 놀란 건 도리어 내쪽이지만 그 손이 따뜻한 건 둘째치고 어쩐지 강한 힘이 실려 빼지는 못했다.
저기, 조금 아픈데.

"잘 할 수 있을거에요."

아니 아프다고.

"그렇잖아요? 용사가 되실 분이었다고요."

아프다니까.

"예로부터 용사는 자유를 상징했다고 해요. '마왕의 위협으로부터 이 세상을 해방!' 시킨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레이크님은 그 용사를 지망하셨던 분이니까 뭐든지 하실 수 있을거에요. 굉장한거라구요? 왕국에 딱 162명밖에 없는 인재 중 하나라구요."

나는 에반젤린의 이야기를 속으로 곱씹어봤다.
그렇게 치켜세워주니 또 그런 것도 같았다.

"그, 그렇게 되는건가?"
"당연하죠. 물론이에요! 말밥이죠."

그래, 에반젤린의 말이 맞았다. 내가 꿀릴 게 뭐가 있다고.
이 곳은 테라리아 검과 마법의 세계. 나는 그곳에서 검과 마법을 포함해 기타 잡것 등등까지 모두 배운 용사 지망생이었다.
이제 와 뭘 못하겠나!

"거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레이크님의 곁을 꼭 지킬거니까..."
"아니. 넌 너희 집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예? 저, 저희 집이요? 아직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레이크님이 원하신다면 함께 사는 것정도는..."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것보다 너 수녀 아니었냐.

"에반젤린 넌 이제 그만 너희 성당으로 돌아가봐야 하지 않냐고."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 손을 쥐고 있던 에반젤린의 손이 갑자기 주먹을 콱 쥐었다.
절로 비명이 나온다.

"아! 아! 아! 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맑기만 하던 에반젤린의 눈에서 갑자기 위험한 이채가 흘러나왔다.

"왜... 저를... 따로 때어놓으시려는 거죠...? 왜? 어디 함께 할 다른 누가 있기라도 한걸까? 갑자기 왜 그러시는걸까?"
"아니... 큭...! 아니..."

아니... 말 좀하자...

"네가... 괜찮다면... 나야 뭐... 헉..."

나는 새된 목소리를 겨우 짜내었다.

"그렇죠? 그런거죠?"

에반젤린이 손을 놓자마자 나는 다시는 못 만날뻔 했던 내 오른손과 급히 상봉했다.
그 천사 같은 미소가 어쩐지 무섭게 보였다.

물론 나도 에반젤린과 함께 있는 것이 싫다거나 하는 의미가 아니었다. 다만 목숨값이라는 빌미로 너무 휘두르게 되는 걸까봐 그게 걱정인 것이다. 지금 상황을 보니 또, 딱히 그럴 것 같지도 않지만.

뭐 아무튼.

"네 덕분에 뭔가 의욕이 생긴 거 같아. 고마워 에반젤린."

말 그대로 갑자기 의욕이 마구 샘솟기 시작했다.
뭔들 못하겠나. 내가 체력이 없나, 머리가 없나.
심지어 이젠 용사 지망생도 아니어서 윤리의원회 걱정할 필요도 없는데!
그래 뭐든지 할 수 있다. 우선 밖으로 나가자. 그것부터 시작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네!"

활기찬 대답과 함께 에반젤린이 곧장 따라나섰다. 이렇게 함께할 동료도 있는데 거칠게 뭐가 있단 말인가.
지금은 카페에 눌러 앉아있을 때가 아니었다.
용사를 위한 100가지 메뉴얼에 따르면 옛 용사중엔 이렇게 말한 이도 있지 않은가.

우리들의 모험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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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6 21:52 | 조회 : 876 목록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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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길 가입한적이 있었나 기억이 안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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