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아직 안 일어났어?


일어나보니 손이훈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나는 결국 새벽 6시까지 피시방에서 혼자 있다가 견디지 못하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맞는 말이었다.

하림이는 기숙사에 없었다. 새벽에 내가 돌아왔을 때는 자고 있었는데, 일어나보니 없었다.
설마 승희에게 무슨 말을 들어서 날 피하는 건가?

통화목록을 봐도 승희와 하림이 누구에게서도 먼저 연락 온 기록이 없다.
나는 일단 진정을 하고 신하림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를 내려고 목에 힘을 주었다.


-여보세요?
“어디야?”
-아, 나 오늘 데이트 있어서 일찍 나왔어. 너는?
“난 지금 일어났는데 너 없길래…
-밤에 들어갈 거야~
“그래, 알았어.”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목소리에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나보다, 했다.
신하림은 거짓말을 워낙 못하는 성격이라서 내게 무슨 감정이 있으면 곧바로 티가 날텐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일단은 다행이었다.

“어? 데이트”


어젠 그렇게 꽁해 있더니, 그래도 결국 먼저 만나자고 했나보다. 부럽다.
나는 잘 풀렸으니가 목소리가 밝았겠지, 싶어서 일단 그냥 냅두었다. 그리고 재빨리 이훈에게 답장을 했다.


-늦잠 잤어요. 지금 책방으로 갈게요.


무턱대고 가겠다는 말에 기분이 나쁘진 않았겠지?
나는 빌렸던 책을 들고 책방으로 향했다. 책방까지 가는 길이 유독 길었다. 학교 근방을 거닐면서 혹여나 승희를 만나진 않을까 수없이 두리번 거렸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승희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지금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생각은 복잡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기 위해서 최대한 밝게 인사했다.

“저 왔어요!”
“어서 와.”


이훈은 미리 음료를 사두었다. 내가 평소에 밀크티 마시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딱 좋아하는 카페에서 사둔 밀크티를 내민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맛있는 걸 먹고 있으니 어쩐지 정말 기분이 좋아지는 듯 했다.

지금 당장만큼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훈과 이렇게 마주보고 함께 웃고 있는 게 좋았다. 그는 내 머릴 쓰다듬어 주더니 이내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마.”

물어볼 줄은 예상했지만 이렇게 바로 말하게 될 줄이야.


“말 안할래요.”
“왜.”
“그냥… 우울한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이훈이 작게 한숨 쉰다. 마음이 콕콕 찔리듯이 아팠지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살살 눈치만 보고 있자 그는 턱을 괴고 지그시 나를 쳐다보았다. 나이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데도 저렇게 날 쳐다보고 있는 걸 보면 나보다 한참 어른스러워 보였다.


어쩐지 내게 ‘나한테는 털어 놓아도 돼.’ 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내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고 그에게 기대고 싶어지게 만들어 버린다.
당장이라도 그 어깨를 부여잡고 나 이만큼 힘들다, 나 좀 위로해 달라, 고 말하고 싶어지는 눈이었지만 지금은 넘어갈 수가 없다. 나는 그가 짐이라고 느껴지게 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정말 괜찮아요.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렇게 보고싶어서 바로 달려온 거 봐.”


정말 괜찮다면서 그에게 얼굴을 바짝 갖다 대자 그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코를 튕겼다.
능청맞게 굴지 말라고 했다. 오히려 더 보기싫다고.


“너는 왜 말이랑 다르게 행동하냐.”
“뭐가?”
“어제 네 친구한테는 그렇게 말해놓고.”
“…….”
“정작 나한테는 하나도 말 안하네.”
“…….”
“나도 이제 신경 안쓰면 되는 건가?”


솔직히 조금, 아주 조금 서운했다. 아무 미련 없다는 듯이 신경 쓰지 않겠다고 어깨를 으쓱 하는데 괜히 그가 미워서 풀이 죽었다.
내가 하림이한테 충고한 거랑 다르게 행동한 것도 맞고, 걱정 시켜놓고 아무 말도 안한 것도 맞는데, 이렇게까지 대놓고 무관심하다니. 나는 병든 닭 마냥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설렁설렁 책을 읽는 둥 마는 둥 했다.

이훈은 책을 읽는 척 하더니 다시금 나를 건드렸다.
내 앞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톡톡, 치더니 내가 쳐다보자 환하게 웃어준다.


“솔직히 신경 안 쓰이진 않아.”
“…….”


내가 아무말도 안하자 그가 조금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한다.


“아무튼 너가 노..력 한다고도 말 했고. 너를 걱정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
“당연히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하고 지금도 답답해.”


정말 안아줄 수 밖에 없는 사람.
나는 당장 일어서서 테이블을 가로질러 그를 꽉 끌어안았다.
항상 그에게서 은은하게 나던 향수 냄새가 확하고 품 안에 가득 들어왔다. 한꺼번에 맡아지는 그 향기마저 그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가 나를 가볍게 밀쳐냈다.


“뭐하는 거야!”
“고마워요.”
“…….”
“정말 고마워요.”


나중엔 꼭 말해줄게요. 그 말도 조심스럽게 꺼내자 그는 흐릿하게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역시 아직 모든 게 서툰 나에 비해서 이 사람은 한 없이 어른스럽다.
내가 너무 어려보이기만 할까봐 걱정이 될 정도로 나를 안정시켜주는 이훈 덕분에 나는 오늘도 행복해졌다. 그가 없을 땐 뭐 때문에 행복했었을까 싶을 정도로 지금은 손이훈이 없는 행복이란 없다. 나는 그것에 한 번 더 감사 하면서 그를 허락없이 또 끌어안았다.
머리 위로 쪽, 하고 뽀뽀까지 했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는 빨개진 얼굴로 그만해! 라고 소리쳤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귀여웠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가 테이블 위를 정리하면서 급하게 일어났다. 좀 더 붙어있고 싶은데…


“형 집에 가면 안돼요?”
“뭐?”
“직접 만들어준 거 먹고 싶어요.”


당연히 안된다고 할 줄 알고 반쯤 도박으로 뱉은 말인데, 의외로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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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7-09 13:23 | 조회 : 1,748 목록
작가의 말
천재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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