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전화기 너머로 왁자지껄한 사람들 소리. 술에 취해서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해 보이는 듯 거친 숨소리와 그럼에도 내게 대답을 듣겠다는 듯 굳게 물어보는 그 목소리.

그 모든 것들이 적응되지 않아 나는 혼란스러웠다.
승희가 내게 이렇게 화냈던 적이 있었나. 나는 순간적으로 너무 낯설고 무서워서 손만 벌벌 떨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이훈도 책방 밖으로 나와서 내 기색을 살폈다.

“무슨 일이야?”

그는 조그맣게 무슨 일이냐 걱정했다. 내 핸드폰 너머로는 계속해서 이승희가 지껄이는 소리와 소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낌 이훈은 핸드폰을 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나는 억지로 그를 떼어내고 더 깊은 골목으로 들어가서 전화를 받았다. 승희는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너 남자 좋아하냐고. 대답 해 봐.”
“…….”
“도 재현. 말해 보라고!!! 게이새끼냐고!!!”


게이새끼. 평생 들어도 아마 담담해질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내가 가장 의지하고 있던 사람에게 가장 상처 되는 말을 듣게 됐다. 감정이 메말라서 로봇 소리 듣는 내가 그 순간만큼은 어떻게 그렇게 버튼이라도 눌린 듯이 눈물이 나오던지.


“…….”
“그래. 나 게이 새끼다!”


그렇게 소리지르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개새끼, 개새끼.

그 한마디를 하는 데 얼마나 큰 용기와 얼마나 큰 충동이 필요하던지.
내가 나를 인정하는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니. 나는 새삼 현실이 무서워졌다. 한동안 들어오지 않는 나를 찾으러 온 이훈은 내가 꺼이꺼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자 많이 놀랐는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렇게 슬픈 와중에도 그가 나를 위로하러 후다닥 뛰어온 게 너무 기뻐서 어이가 없었다.

“왜그래, 무슨 일 있어?”
“…….”
“무슨 전화길래 그래.”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계속 내 안색을 살폈다. 휴지도 없어서 대충 옷 소매로 내 얼굴을 닦아주면서 계속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나는 차마 그에게 나 게이인 거 친구가 알게 돼서 이런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왠지 그 사람이라면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거 때문에 친구를 잃은 거라고 생각할까봐.


“그냥… 친구가 술 취했나봐요.”
“술 취해서 너한테 무슨 소리를 했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그냥, 그냥 놀라서 그래.”


나는 애써 괜찮다고 하며 꽉 메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책방으로 들어가서 휴지로 눈물을 닦자 부끄러움이 몰려들어왔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렇게 추하게 울다니.
그제야 이미지 관리를 한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손이훈은 나를 쉬이 보내 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물론 나도 그에게 쉽게 말해줄 생각은 없었지만.


“무슨 일인지, 말하기 곤란한 거야?”
“….죄송해요.”


내가 아무리 그에게 모든 걸 다 말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아니다. 나는 도저히 말 못하겠어서 오늘은 빨리 가야할 것 같다면서 책방을 나섰다.


애매한 시간, 애매한 위치.
밤 11시에 나는 순식간에 오갈 데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기숙사에 들어가기엔 이 몰골을 하고 하림이를 마주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승희가 저러고 있는데 하림이가 모를 것이라는 보장도 없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친구들을 피해 다녀야 한다는 게 꽤 서러웠다.

결국 나는 고민하다가 근처에 있는 피시방으로 향했다. 하루만 밤을 새고 갈 심산으로 들어갔는데, 새벽 내내 술 한잔 걸치고 온 학생들이 무리지어 들어올 때 마다 승희가 있나 없나 눈치보느라 피곤만 더 쌓인 것 같았다.


-잘 들어갔어?
-네. 갑자기 걱정 시켜서 미안해요.


잘들어가기는 무슨. 기숙사 근처에도 가지 않았지만 나는 거짓말을 했다. 손 이훈은 오늘 가게를 잘 마감 했을까? 내가 간 이후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를 좋아하는 게 정말 이렇게 잘못된 일인가? 내 친구에게 ‘게이새끼’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럼 나는 이런 소리 듣는 것을 감안하면서까지 손이훈을 포기할 수 없는 걸까?


놀랍도록 대답은 YES.
나는 순간적으로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그럴 수 있을 것 같단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아니라 손 이훈이지만…

내게 완전히 마음을 연 것도 아닌데 이런 소리 들은 거 알면 아마 날 더 밀어내려고 할 것이다. 나는 그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멀어지기 싫은데. 그냥 비밀로 하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신 하림한테 여자친구랑 일단 이야기 하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와서 이렇게 내가 먼저 비밀을 만들고 있다니.

손 이훈은 이렇게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나를 굳이 신경 쓰지 않을까, 아니면 궁금해할까.
어쩌면 화를 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에게 왜 다 말해주지 않느냐고. 나는 그가 화내는 모습을 상상하니까 어쩐지 귀여워져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현실은 피시방 속 허무하게 앉아있는 난데, 손이훈만 생각하면 어느 새 내 자체가 행복에 휩싸인다.


오늘은 우울함으로 가득한 날이지만, 내일은 조금이나마 그를 웃게 해줘야겠다.
나는 승희 일은 우선 미뤄두기로 했다. 일단 술에 너무 많이 취해있었고, 이 일을 풀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승희를 홧김에 잃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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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7-09 02:47 | 조회 : 2,066 목록
작가의 말
천재일우

죽지도 않고 또 왔네요. 종강하니까 여유가 생겼어요. 늦게 와서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여유분도 쓰고 오느라 조금 늦었어요... 봐주시는 분들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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