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기숙사로 돌아와보니 하림이가 도착해있었다. 오늘 안 들어올 줄 알았는데 왜 벌써 왔지?


“왜 벌써 왔어?”
“나 싸웠다.”
“엥?”


어쩐지 풀이죽어있더라. 여자친구랑 놀다오면 항상 뭘 했고, 뭘 먹었고 그런 걸 나불대던 녀석이었는데 오늘은 왠지 조용했었다.


“어쩌다가 싸웠는데?”
“넌 기분 좀 괜찮아?”


자기 얘기 들어줄 기분도 안 될까봐 나한테부터 물어본다. 쓸데 없긴.
나는 이런 애 앞에서 이러쿵 저러쿵 떠들 건 아닌 것 같아서 괜찮다고만 했다. 말해보라고.


“내가 변한 것 같대.”


흔한 싸움 주제였다. 물론 그 다툼이 본인들에게는 흔하지 않았겠지만.
가벼운 사랑싸움이라기보다는, 내가 보니까 하림이 여자친구가 참아 왔던 게 터진 것 같았다. 하루종일 기분이 안좋아 보여서 최대한 심기 안거슬리게 가만히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신하림 여자친구는 자기가 기분이 안좋으면 오히려 기분을 풀어주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해주길 바랐던 모양이다. 근데 정작 아무것도 안하니까 안그래도 마음에 안들었는데 얼마나 꼴보기 싫었을까.


“기분 좀 맞춰주지 그랬어.”
“괜히 앞에서 깝죽거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널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게 느끼겠냐.”
“그래도 불안하긴 하잖아.”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루어지면, 무조건 행복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보다.
신하림은 한참동안 주절주절 자기 변호를 했는데, 내가 볼 땐 그냥 변명거리였다.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거야. 이미 여자친구 기분은 상했고, 바란 건 그런 게 아닌데.

자기 생각대로 상대방이 따라와주길 바라는 건 혼자 하는 사람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내친구지만 내가 여자친구였어도 정 떨어질 것 같아서 한 마디 했다.


“니가 그런 의도였어도 네 여자친구가 서운해 하면 맞춰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나도 노력을 한건데...”
“너가 노력한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사실 중요하지 않은 것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따끔하게 말해야 될 것 같아서 더 쎄게 밀어붙였다.


“막말로 너 태도가 변한 게 있으니까 니 여친이 그렇게 대했겠지. 괜히 그러겠냐. 근데 화나게 한 사람이 정작 자기 일 아닌 것처럼 가만히 있으니까 더 열받는 거고. 거기서 너가 좀만 서글서글하게 대했으면 여친도 기분 풀렸을 텐데, 네가 더 화나게 기름을 부었네.”


신하림은 꿀 먹은 것처럼 아무말도 안하고 있다가, 기분이 좀 토라졌는지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서 등을 돌린다.


“몰라.”
“괜히 지랄은.”
“내일 풀면 되겠지.”


저런 안일한 새끼를 봤나.
솔직히 남의 연애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 싫어하지만, 문득 내 친구의 여자친구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다 미안한 기분.


“그래. 비위도 좀 잘 맞춰주고.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곳 데려가고.”
“야 근데 그런 걸로 풀릴 거면 애초에 기분이 풀려야 되는 거 아니야? 단단히 화났으니까 저러는 거 아니겠냐고. 답장도 안와.”
“해보고나 말해. 내일 보자고 다시 연락해 봐.”


이제 나도 몰라!
더 이상 끼어들면 안될 것 같아서 나도 잠자리에 들었다. 신하림뿐만 아니라 나도 내일 이훈 씨를 봐야겠다. 오늘 그렇게 끝이 났으니, 내일은 정말 진지하게 다가가야지.




*



“...그래서 제가 그냥 좀 쏘아붙이니까 오히려 친구가 삐진거 있죠.”


나는 커피를 마시며 조잘조잘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얘기했다.
우리는 생각보다 별 다를 게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이 나는 책방으로 출근했고, 그는 커피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이훈은 나를 대하는 게 눈에 띄게 어색하긴 했지만 나는 여의치 않고 그에게 이런 저런 말들을 했다.


“그건 너가 잘 했네.”
“그치그치?”
“응. 여자친구 섭섭했겠다.”
“그러니까! 제말이요!”
“...강아지 같다.”


노트북을 열심히 두드리던 그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의 시선이 노트북에만 꽂혀 있어서 부담 없이 그를 쳐다볼 수 있었는데, 저렇게 막상 빤히 쳐다보니까 괜히 쑥쓰러워서 눈을 피했다.

손이훈은 한 손으로는 턱을 괸 채, 다른 한 손을 쭉 뻗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처음으로 날 어색하지 않게 대해준 순간이었다. 부드러운 그 손길에 나는 덥썩 그 손을 잡았다. 머리 위에 가져다 댔던 손을 잡힌 이훈은 잠시 당황했지만 그가 놀랄 틈도 없이 입을 맞췄다.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추자 몸을 확 뒤로 뺀다.


“너...!”
“몰라요. 형이 그렇게 무방비하게 있었잖아요.”


괜히 본인탓으로 돌리니까 기가차다는 듯이 웃는다.
조금 편하게 다가가도 될까. 그가 웃으니까 책방 안이 순식간에 밝아지는데. 나는 이 사람이 웃었으면 좋겠다.
남말 할 처지가 아니구나. 신하림에게 그렇게 상대방한테 맞추라고 했으면서 나도 또한
그에게 장난치며 다가가고 있었다. 가볍게 보이긴 싫지만.


“응. 웃어요. 좋다.”
“못하는 소리가 없어.”
“너무 좋아서...”


마음으로만 담기엔 넘쳐나서 자꾸 말로도 새어나온다. 그는 모르겠지. 자기가 웃을 때 세상이 얼마나 밝아지고 내 마음이 얼마나 간질거리는지. 아마 깃털로 살금살금 괴롭힌다 해도 이렇게 웃음이 나오게 심장이 간지럽진 않을 거다.


“나 이거까지만 좀 하고. 집중해야 돼.”


내 얘기를 곧잘 들어주다가 진짜 마무리를 해야된다면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는 것에 집중했다. 나는 내심 섭섭하면서도 마음껏 그를 눈에 담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마를 살짝 가리는 갈색 머리카락도 좋고, 일에 집중 할 때면 찌푸려지는 미간도 좋았다. 그리고 가끔 막힐 때마다 입술에 힘을 주며 골똘히 생각하는 것도 멋있었다.

나는 진동이 오는 것도 모르는 채로 계속 그렇게 책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가 집중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봤는데, 뜬금없이 전화가 엄청 걸려와 있었다. 이승희에게.


“저 잠시만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응.”


거의 열통씩이나 와 있길래 심상치 않아 보여서 전화를 받으러 갔다.
전화기 너머로는 술에 잔뜩 취했는지 발음이 꼬이는 승희와 왁자지껄한 소음이 섞여 들렸다.


“야!!! 도 재현!!!”
“뭐야? 취했어?”


아직 밤이 늦지도 않았는데 벌써 저렇게까지 마셨나.
나는 웬만하면 취하지 않는 애가 술을 이렇게까지 마셨다는 게 의아해서 불안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너... 너....”


왜이렇게 불안하지. 그냥 말 하지 말라고, 술 다 깨고 나서 연락하라고 할까?
나는 매정하게 끊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술주정을 전부 받아줄 수도 없고 애매한 상황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너 남자 좋아하냐?”


불안한 느낌은 언제나 맞아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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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5-08 19:24 | 조회 : 1,487 목록
작가의 말
천재일우

언제나 제 작품을 기다려주시고, 봐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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