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문자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손에 안 잡히고, 잠도 잘 안 오고 그랬는데 오히려 문자를 받고나니까 차분해졌다. 솔직히 엄청 떨릴 줄 알았다.
오히려 문자를 받은 이후에는 긴장보다는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이 더 컸다. 나는 지금 그만큼이나 이훈에게 빠져있었다.

입맛이 하나도 없었는데, 갑자기 배가 고팠다.
나는 배고픔으로 현실로 돌아옴을 느꼈다.

얘기를 마친 뒤, 이훈이랑 같이 저녁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오셨어요.”


분위기가 묘했다. 난 거의 일 년 안본 것처럼 그 사람이 그리웠는데, 그 사람은 딱히 그렇게 힘들어보이지도 않았다. 살이 많이 빠져서 벨트 없이는 바지를 못 입게 된 나와는 달리 그 사람은 오히려 조금 더 건강해진 것 같기도 했다.


“형이 부르는데 와야죠.”


그래서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약이 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굴면 굴수록 그가 더 언짢을 것을 알아서 못되게 굴었다.


“그래.”
“.......”
“재현아.”


갑자기 돌변한 그의 태도에 도리어 내가 놀라버렸다.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불렀다.
저렇게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데도 나는 정신을 못차렸다. 너무 좋아서.
그런데 그 사람의 눈빛이 나를 현실로 데려왔다. 너무 차갑고 삭막한.


“장난 그만해.”
“........”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진심인 걸 모르겠어.”


아무리 노력해도 전해지지가 않는다.

이미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은 생각보다 굳게 닫혀 있어서, 조금 잘해준다고 오히려 착각하기가 쉽다. 저 사람이 나한테 만큼은 마음을 열었구나.


“장난...아닌데.”
“내가 보기엔 너도 똑같아.”


나는 저 사람이 온 우주에서 가장 특별한데, 저 사람한테 나는 우주 티클 만큼이나 사소하다.
그렇게 우주가 부숴졌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대답도 못하고 손이훈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 사람은 더 볼 일 없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 아직 제대로 말도 못했는데 벌써 일어나면 어떡해.


“왜 사람 진심을 그렇게 막 무시해요?”
“...뭐?‘
“솔직히 말해 봐요. 내가 장난치는 거 같아서 그런 게 아니라, 당신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잖아.”


질러버렸다. 화가 나서.

내 진심을 짓밟는게 꼴에 자존심이 상했던 건지, 아니면 저렇게까지 무서워하면서 사람들과 멀어지려고 하는 사람이 안쓰러워서 그랬던 건지.
저 사람은 알까. 내가 자기 연락을 받고 나서 씻은 듯이 몸이 개운해졌다는 것을. 자신을 본다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벅차오르던 가슴을. 아마 알려고 하지도, 믿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게 너무 안쓰러웠다.

저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사랑받는 사람인지 계속해서 부정할 것만 같았다.


“왜그렇게 무례하지?”


단단히 화가 난 듯 했다. 하지만 손이훈이 그렇게 나온다고 해서 내 마음이 가라앉은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어느 새 냉랭했던 분위기를 벗어나 서로 무섭도록 노려보고 있었다.


“남의 마음을 맘대로 판단해버리는 건요?”
“내 얘기를 듣고 바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믿으라는 거야?”
“물론 내 행동이 섣부르긴 했어요. 그래도 지켜봐 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내가 마음대로 키스를 한 건 물론 잘못이다. 하지만 그 주체할 수 없음을 그 사람이 알까. 그리고 모면할 기회라도 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서럽다. 진짜 너무 서러워서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너 울어?”
“흐윽...! 헝... 내, 내가... 오늘...”


꺽꺽 거리면서 할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울어제끼니까 손이훈도 어지간히 당황한 듯 했다.


“아...저기.”
“끄읍...흑....!! 내가 잘 할게요...내가...”
“......”
“그러니까, 끅, 한 번만...”


한 번만 나좀 믿어줘.


숨을 고르는 동안 손 이훈은 한숨을 후, 쉬었다.


“도 재현.”
“......”


눈물이 멎질 않아서 어깨를 들썩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일어서서 나를 내려다 보더니 머리를 쓸어넘기며 대답했다.


“한번만 지켜볼거야.”
“.......”
“실수 하는 순간 바로 아웃이야.”
“끅....흐어엉....!!!”


진정하려고 숨도 참아보고 했는데, 그 말을 들으니까 안심이 되면서 더 눈물이 나왔다.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 차면서, 지금까지 흘리지 못했던 것까지 다 털어버리고 싶어서 그렇게 맘 놓고 울어버렸다.
내가 하도 서럽게 울어대니까 손이훈은 체념하고 휴지를 갖다 줬다.

울음을 그친 뒤 우리가 얼마나 민망했는지는 비밀.

그래도 내 부은 눈을 보며 손이훈이 웃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한다.


8
이번 화 신고 2019-05-05 17:06 | 조회 : 1,396 목록
작가의 말
천재일우

제 현생이 혐생이네요... 정말 죄송합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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