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친하다면 친하고, 아니라면 아닌 그런 사이.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밖에서 만난 적도 한번도 없고, 내가 계절학기 신청을 안했으면
몇 개월간 얼굴도 못보고 지낼 사람들이다. 나는 그게 싫었다.
좀 더 우리가 개인적이었으면 해.


“아... 죄송해요. 갑자기 이래서. 제가 지금 좀 취했는지... 아니 기숙사 통금이 곧 끝나서...”


말을 뱉어놓고나니까 너무 무례한 것 같기도 하고, 당황했을 것 같아서
횡설수설하면서 말을 주워담았다.
나는 손이훈의 얼굴을 볼 용기도 나지 않아서 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있는 지도 몰랐다.
나같아도 어이없겠다. 그가 나를 이 책방에서 자라고 하고 두고가도 나는 할말이 없었다.


“우리집 좁은데...”
“...네?”
“괜찮아요?”


그는 생각보다 흔쾌히 나를 받아들여줬고, 나는 취기라고만 생각했던 가슴 떨리는 감정이
술보다 더 센 저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좀 좁죠? 혼자살아서.”
“아니요! 엄청 깨끗한데요...”


집은 그 사람을 보여준다던데, 그 말이 맞는 말이었나보다.
따뜻한 브라운 계열의 커튼까지 어쩜 그를 쏙 빼다 박았다.
나는 남자 혼자 살면서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정돈 된 집을 본 적이 없었다.
보면 볼수록 인간미가 없을 만큼 완벽하다.
나는 왠지 그 집에서 어른스러움을 느꼈다. 존재자체는 저렇게 사랑스러운데
집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어쩐지 클래식하고 또 성숙했다.

혼자살기에 딱 알맞거나 약간 좁은 정도.
나는 그가 바닥에서 자려는 것을 기어코 말리고 내가 바닥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술을 많이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그 집에 누워있으니까 정신이 말똥해졌다.
나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게 미안해서 죽을 것 같은데, 그는 별 생각이 없어보인다.


“갑자기 이렇게 찾아와서 너무 죄송해요.”
“전혀. 기숙사 통금있다면서요.”


그 사람은 몸을 내 쪽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매트리스 위에 있는 손이훈을 보느라 나는 고개를 조금 들어야 했다.
시선을 위로 마주했을 때, 나는 그 갈색 눈동자와 부딪혔다.

그 갈색은 달빛으로부터 우리를 가려주고 있는 커튼색도 아니었고,
하루종일 그가 보고 있었을 책장의 색도 아니었다.
별빛 책방이라고 제목을 달아놓은 간판 색도 아니었고, 밝게 염색 된 그의 머리색도 아니었다.
그런 단순한 색상들로는 그의 눈을 비교할 수가 없었다.


깊이 빨려들어갈 것 같고, 그가 그 눈동자색으로 나를 쳐다보면 왠지 부끄러워져서
어딘가에 숨고 싶지만 시선을 뗄 수가 없게 만드는, 그런 깊은 고동색이었다.
빽빽한 글자들이 수두룩한 전공 책을 읽다가 피로해지면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사랑에 빠지고 싶다. 그렇게 그 깊은 색 안에서 휴식하고 싶어진다.
나를 안식하게 만드는 그의 깊은... 갈색.


“재현씨...?!”


충동적.
나는 그의 앞에만 있으면 언제나 충동적이 된다.

나는 고개를 조금 든 그 상태에서 그의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몸을 조금 일으키며 그의 고개를 편하게 만들었다.
당황한 그는 나를 밀어내려 한 것 같았지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나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뺨이라도 한 대 맞아도 할말이 없다.
한 대가 뭐야. 이 집에서 쫓겨나도 할 말이 없지.
나는 취한 척 하는 건 성격에 없었다. 실수가 아니었다. 나는 그러고 싶어서 키스했다.



“지금...”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이러려고 온 거예요?”


아주 맞는 말도,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 될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죄송해요. 하지만 술 취해서 한 행동은 아니에요.”
“차라리 실수라고 해줘요.”


상처받은 눈빛.
나를 증오해도 마땅한데 오히려 그는 상처를 입었다.
나는 잠시나마 닿았던 그의 숨결에도 행복에 질식사할 것만 같은데, 그는 이런 나 때문에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렸다.


“지금... 재현씨도 저를 가볍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절대 아니에요.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저는 이런 거 막 당해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신거에요?!”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었다. 지난번 얘기를 해줬기 때문에 내가 ‘건드려도 되는 사람’ 이라고 생각하는 줄 아는 것 같았다.
그런 게 아닌데...
이래서 성급한 행동은 화만 부른다고 하는 거구나.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까지 꿇고 앉아서 그에게 전혀 아니라고 신신당부 했다.


“...일단 나갈게요.”


이런 상태로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벌점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기숙사에 들어가던가, 다시 승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내가 몸을 일으킬 때, 왠지 모르게 손이훈은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도 이 사람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여기 더 있으면
이성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거기까진 가고싶지 않았다.


“못미더우시겠지만... 저 정말... 진심이에요. 한번도 가볍게 생각한 적 없어요. 단 한번도.”


당장 내일부터 우리 인연이 끊겨버릴 수도 있겠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사람은 약간 촉촉해진 눈으로 나를 보며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기분이 풀리시면... 연락 주세요.”


기꺼이 연락이 오길 바라며 나는 방을 나섰고, 그와중에도 그 어두운 방안에 혼자 남겨져 있을 사람에게 미안했다.
내 섣부른 행동에 미안했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음을 접지 못해서 미안했다.



*


“야 우리가 그날 무슨 실수했냐?”


그날 이후 나는 거의 폐인처럼 살았다. 기숙사에 잘 들어가지 않고 PC방에서 밤을 새는 날도 많았으며 술을 진탕 마시고 오는 날도 많았다.
이미 신청한 계절학기는 취소할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도망갈 수도 없었다는 소리다.

내가 하도 정신나간 사람처럼 살고 연락도 하지 않으니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감했는지 승희와 하림이는 나를 붙들어놓고 대화를 시도했다.
머리가 아팠다.
그사람에게서는 일주일 째 연락이 오지 않고 있다.


“별 일 아니야.”
“근데 사람이 이렇게 피폐해져?”


거칠한 수염을 만져보는 게 처음이었다. 늘 관리가 철저한 나였는데, 이젠 핸드폰만 온종일 바라보고 있으면서 정작 나 자신은 하나도 챙기질 못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데, 틀린 말이었다. 일주일 째 못보고 있는데 나는
오히려 점점 더 그 사람이 또렷해졌다.


“너네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그럼 너가 무슨 일이 있단 소리네.”
“...아니야.”


더 이상 말하기 싫어한다는 걸 눈치 챘는지 친구들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알겠으니까 일단 가는데, 그래도 정신은 차리고 살아라.”
“...알았어.”


하림이는 여자친구를 만나러 갔고, 오늘은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혼자 쓸쓸하게 방안에 남겨졌다. 혼자 있는 게 오히려 편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시끄럽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니까 사무치기 시작했다.


Rrrr....


진동이 짧게 울렸다.
나는 바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사실 기대도 안하고 있었지만 강박증처럼 확인하는게 습관이 되었다.


기적은 원래 기대를 하지 않았을 때 벌어지더라.



-오늘 책방에서 잠깐 얘기 좀 해요.


손이훈의 문자였다.


7
이번 화 신고 2019-03-25 21:05 | 조회 : 1,471 목록
작가의 말
천재일우

늦었으니 두개...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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