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사람이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이 언제라고 생각하는가?
함께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어딘가 멋진 곳으로 여행을 갔을 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치부를 드러낼 때.
그 치부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그것을 감싸줄 때 비로소 그들은 더욱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마치 내가 인간관계에 자신이 없다고 울먹이며 이승희와 손하림이에게 털어놨을 때처럼,
이훈은 잠시 후, 하고 숨을 내뱉더니 말을 시작했다.
나는 그가 눈물을 보이지 않은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생각보다 강인한 사람이었기에 여기까지 왔구나.


“저는 남자를 좋아해요.”


이훈은 고개를 떨군 채 그 말을 내뱉은 뒤 나를 보며 웃었다.
어딘가 씁쓸해보이는 미소였다. 당연히 당신도 놀라겠지, 이미 그는 날 잃을 감수를 하고 있었다. 자기 맘대로.

평생을 자기처럼 살아온 사람은 한 명도 못만나 봤다는,
그 우울함과 외로움의 복합적인 감정 속에 이미 한번 풍덩 빠졌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자의 미소였다.

그것을 보는 이는 너무도 안쓰럽고 힘든데,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덤덤하게 얘기를 이어갔다.


“저 같은 사람들은 가볍게 만나기 쉬워요. 그래서 정착하지 않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났었어요.”
“.......”
“쓰레기같죠?”


왜 본인에 대해서 저렇게 말하는 걸까.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당신이 어떤 과거를 갖고 있든 여전히 마음에 담을 자신이 있다는 것.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걱정스러운 눈빛에도 그는 웃음만 짓고 있었다. 이미 체념한 듯 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그때는 제가 생각해도 어렸어요. 누군가에게 정착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어요.”
“.......”
“그러다가 그 사람을 만났어요.”


아무 감정 없던 그의 눈이 처음으로 일렁거렸다.
그 사람을 생각만 해도, 입으로 내뱉기만 해도 심하게 동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훈의 모습에도 질투를 느끼는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정말 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거든요. 대학도 남들보다 2년 늦게 들어갔는데, 그 사람 덕분에 정신차리고 공부할 수 있었어요.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고.”


그 ‘재민’ 이라는 사람 때문에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했다.
정신을 차리고 사람답게 살자고 생각해서 유흥도 다 끊었다고 했다.
술도 못마시는 사람이 그땐 어떻게든 즐기기 위해서 취하든 말든 마셨다고 한다.


“맨정신으로 잠든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교복입었을 때부터 이미 글러먹었다고 생각했거든, 내 인생은.”


고등학교 때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하고 난 뒤, 집에서는 완전히 없는 존재처럼 여겨졌다고 했다. 가장 편한 공간이어야 할 집이, 가장 들어가기 싫은 곳이 된 이후부터는 반항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죽어라 노력해서 번듯한 대학 들어가고 나서야 조금씩 부모님 마음도 열렸지. 다 그사람 덕분이었어요.”


위로의 말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저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을 바꿔준 사람을 잃은 기분, 느껴 봤어요?”


느껴보지도 못했고, 앞으로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듣기만해도 너무 아프니까.


“나는 그제야 좀 인간다워져서, 그 사람한테 그제야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라고 했다.
말을 하면서도 너무 힘들어하는 것이 보여서 그냥 그만 말해도 된다고 했다.
그는 울지는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너무 힘들면 그만 말해주셔도 돼요.”
“그래도 고마워요. 들어줘서.”


이와중에도 그는 나를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왜 웃고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큰 그림자가 비춰진걸까.
그 이후의 이야기는 더욱 가슴아팠다.
재민이라는 사람이 항상 꿈꿔왔던 것들 중 하나가 ‘책방 주인’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들을 한 쪽에 쌓아두고
평생 그것들과 함께 늙고 싶다고 했다고 말했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어떻게든 제가 대신 이뤄주고 싶었어요.”
“......”
“여기있으면 가끔 별도 잘 보이는데, 왠지 저보고 고맙다고 하는 기분이었어요.”
“......”
“웃기죠?”
“전혀요. 맞을 거예요. 고마워하는 거.”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한번도 그사람을 만난 적은 없지만, 이런 사람을 보고 그 누가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나도 그 재민이라는 사람에게 고마웠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의 꿈이 있었기에 지금 나와 이훈이 만난 것이기도 하니까.


“너무 무거운 얘기해서 불편한 거 아니에요?”
“저는 오히려 털어놔주셔서 감사해요.”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말이었다.
남의 술주정에 혼자 진지빨고 와서 툭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충분히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만한 일인데 그는 나를 믿고 털어놓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나는 이훈에게 믿음을 줄만한 사람이었단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실례였을지도 모르는 질문이었는데.”
“제가 주정부렸는 걸요, 뭘.”


별 게 아니었지만, 그는 내가 덮어주고 간 담요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냥 믿을 만한 사람이구나, 싶은 느낌.
‘내 사람’이 한명 더 늘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의 영역 안에 한 발 내딛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이제 매일 와서 공부해도 돼요?”
“새삼스럽게 뭘 물어봐요.”


스스럼없게 날 대해주는 이 사람이 좋았다.
내가 비록 그 사람의 빈자리를 ‘대신’ 해줄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의 그의 인생에 있어 내가 좀 더 의미있는 사람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그의 말에 내가 설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조금이나마 가능성을 보았다는 것에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긴 할까? 하는 마음.

시도해보기도 전에 기가 죽었다.
지금 저 사람에게 연애감정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나쁜놈이 되는 것만 같았으니까.

그래도, 내가 공부 말고 다른 욕심이 한 가지 생겼다면 그것은
손이훈이란 사람에게 좀 더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




8
이번 화 신고 2019-03-14 05:46 | 조회 : 1,621 목록
작가의 말
천재일우

이훈이의 과거가 풀리는순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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