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슬슬 시험기간의 압박이 찾아왔다.
하루하루를 누구 말대로 ‘로봇’처럼 살아왔는데, 이제는 하루하루가 진짜 살아있는 느낌이다.

어느 새 자연스럽게 그의 책방에서 함께 독서를 하거나 공부를 하는 게 하루 일과가 됐다.
팀플이 다 끝나서 정말 다행이었다. 나는 지긋지긋한 학교를 벗어나서 그와 함께 있는 시간들이 모두 힐링이었고, 모두 꿈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재현 씨는 이렇게 매일 와도 괜찮아요?”
“여기가 도서관보다 집중 잘 되는 것 같은데요. 혹시 저 때문에 불편하세요?”
“전혀요! 그냥 괜히 시험 기간에 방해될까봐-”


그렇게 말하는 그는 노트북을 한창 두드리다가 일을 모두 끝냈는지,
두 팔을 쫙 피며 기지개를 켰다.
으아- 소리를 내더니 이내 풀썩 엎드린다.

나는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썩 어른스러워보였다.
어느 포인트에서 그걸 느꼈느냐 하면, 사실 잘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할 일을 다 마치고 나서,
개운함과 피곤함을 동시에 느끼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어른같았다.
일을 하는 사람만 풍길 수 있는 분위기가 보였다.


“많이 피곤하신가봐요.”


조용조용 말을 걸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응, 괜찮아요.”


피곤하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피곤하긴 하지만 괜찮다는 건가?

책에서 눈을 떼고 그를 쳐다봤다.
나와 대각선으로 엇갈려 앉은 그는 내쪽으로 눈을 감고 엎드려 있었다.
봄내음이 나는 듯 했다.

매미소리도 점점 꺼져가고있는 이 늦여름에, 그 향긋함이 느껴졌다.
저 연갈색 머리 때문인지, 뽀얀 피부때문인지
아니면 가끔가끔 움찔거리는 가지런한 속눈썹 때문인지.


손이라도 갖다 대고 싶었다.
왠지 요정 같아서.

책방 안에는 약하게 에어컨을 틀어놓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아주 약간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거렸다.

그걸 보는 내 마음도 살랑살랑 거렸고.


“오늘 편맥할래요?!”
“헉”


관찰하다시피 그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눈을 확 떠버리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갑자기 눈이 확 커지니까 놀랐고, 그 눈동자랑 마주쳐서 더 놀랐고.
게다가 같이 맥주를 마시자는 말에 더더 놀랐다.


“아 시험기간이라 좀 힘든가...?”
“아뇨 완전 괜찮아요!”


당장 내일이라고 해도 마셨을거다.
게다가 아직 완전 임박한 건 아니기도 하고...
나는 괜찮다고 속으로 합리화를 이미 시켜버렸다.


“요 앞에 테이블 펼쳐놓은 편의점 있잖아요. 거기서 가볍게 한잔 하고 가요.”


어느 새 문 닫을 시간도 됐겠다, 그는 일을 다 끝내서 기분이 좋다며 가자고 했다.
나는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말주변도 없는데, 괜히 어색해지진 않겠지?

지금까지는 책방이라는 장소가 있었으니까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었고
뭔가 편한 기분이 들었는데, 술 한잔 하면서 터놓고 할 수 있는 일상 얘기가 있을까...

나만 걱정이 되는 건지 그는 신난 채 문을 걸어잠갔다.


“얼른 가요!”


그래도 당신이 나와 함께인 게 즐거운 것 같아 감사하다.


편의점에서 같이 맥주를 마시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술을 꽤 못했다.
맥주치고 도수가 조금 높은 술을 고르길래 괜찮겠냐고 물어봤더니
‘오늘 하루쯤은-’ 이라고 호기롭게 말하던 사람이었는데.


“아니이-”


말 처음에 ‘아니’ 라고 말하는 게 습관인가보다.
그의 길게 늘어지는 ‘아아-니이-’ 에 나도 흠뻑 취했다.


별 얘기가 다 나왔다.
대학생활은 어땠고, 자기가 다녔던 학과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자기가 좋아하던 교수님이랑 이런 상담을 했었고...

그는 지금 프리랜서로 기자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취해서 발갛게 된 얼굴을 구경하느라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제법 전문적이었고 또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취하셨어요. 이제 그만 들어갈까요?”
“안취했는데여?”
“제가 들어가봐야 해서요,”
“아아- 맞다.”


내 핑계를 댔더니 꼬박 잘 일어난다. 정말 뼛속까지 착한 사람.


“집이 어디에요? 데려다 줄게요.”
“책방 쪽...”


취해도 제법 잘 걸어간다. 비틀거리긴 해도 꿋꿋이 잘 걷는다. 아직 그정도 정신은 있나보다.


그런데 분명 집을 가는 줄 알았더니, 다시 책방으로 돌아온다.


“집은요?”
“으응... 갈거야.”


게다가 갑자기 반말.


그의 행동이 의아해서 일단 두고봤다.


책방에서 자는 게 주사인가?
아니면 뭘 두고간 게 있나?

문 밖에서 어정쩡하게 서있다가 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창고로 생각하고 있던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그안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닥에 앉으면 안되는데...!

재빨리 안으로 따라들어갔다.


그 곳에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밖에서 본 거라서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척봐도 파는 용은 아니고 그냥 몇 년 째 지켜오는 것들.


“재민아...”


모르는 이름.

나는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너무 슬프게 부르길래.
감히 내가 다가가고 그를 방해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보고싶어...”


감히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그의 사랑이었다.


당신을 그렇게 울리는 사람인데 내가 차마 미워할 수가 없었다.
감히 질투도 할 수 없었다.

누굴 부르는 건지 모르겠음에도
나는 손 이훈 그사람의 애처로운 보고싶다는 말에
망부석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의 훌쩍임이 다 멎고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남을 때 까지.



8
이번 화 신고 2019-03-04 02:21 | 조회 : 1,554 목록
작가의 말
천재일우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ㅠㅠ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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