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우리는 한참이나 얘기를 했다. 입 아프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사람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까지 했다.

한참 자주 오시던 할아버지 분이 안 오셔서 걱정이 된다, 학교 후문에 있는 카페들 중엔 어디가 제일 좋더라, 학교 다닐 때 계시던 그 교수님 아직도 계시냐 등등...


그리고 그 중에는 가벼운 일상 얘기들에 섞여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듯한 무거운 주제들이 섞여 있었다.

혼자 있는 걸 싫어하는 성격인데 책방을 포기할 수가 없다, 이 책방에 있으면 세상과 단절된 듯하면서도 가끔은 그게 너무 안정이 된다...

나도 조용하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면서도 가끔씩은 북적거림을 느끼고 싶은 때가 있어서 공감할 수 있었다.
매일 공부만 하는 로봇이나 공부벌레 소리만 듣는 삶이 만족스럽다가도,
술마시며 이얘기 저얘기 다 할 수 있는 그런 시끄러운 포장마차가 미치도록 가고싶은 순간들이 있다.

사람의 온기.


특히 외로운 걸 참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그것은 더더욱 짙게 그리워진다.
사람 온기를 느끼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지만 생각보다 자주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에너지만 뺏기는 모임 장소나 회식 등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그가 이 책방을 어떻게 열었고, 무슨 이유 때문에 유지하고 있는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별로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도 아니길래 물어보지도 않았다.

중간에 그가 조그맣게 말했다.


“물어보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왜요?’, ‘그래서요?’ 같은 질문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그간의 외로움을 한꺼번에 털어내는 듯해 보여서 쉽사리 말에 끼어들 수도 없었다.

하지만 계속 머릿속에서 빙빙 도는 질문 한 가지는 있었지.


저렇게 외로움을 타는 사람이 어쩌다 이런 곳에 책방을 냈을까?


어렸을 때 누구나 ‘만화 가게 주인’, ‘오락실 주인’ 등 저마다 좋아하는 것을 실컷 할 수 있는 가게 주인들을 꿈꾸고는 한다.
처음에는 그런 꿈을 꽤 일찍 이룬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얘기를 듣고 있자니 마치 떨치고 싶지만 떨쳐지지 않는 무언가 같았다.

확실한 것은 이 책방은 손이훈의 꿈이 아니었다는 것.


‘그럼 도대체 왜?’


굳이 그에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결국 꼭 내일도 오겠다는 약속을 해주고 나서야 통금에 맞춰 올 수 있었다.


“이렇게 늦게까지 열어도 돼요?”
“뭐 어때. 내가 주인인데.”


그가 예고없이 말을 툭툭 놓는 것조차 좋았다.
가게 마감을 하면서 나가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흔들 해줬는데, 그 때 지었던 미소가
어쩐지 개운한 사람처럼 보여서,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아주 입이 귀에 걸렸네.”


고작 하루만에 사람이 바뀌었다면서 룸메는 나를 또 갈궜다.
계속 갈궈봐라, 내가 말하나.


“그냥 얘기만 하다 왔다니까.”
“뭔가 진전이 된 건 없어?”
“그럴 사이 아니야.”
“아니긴!”


내가 속앓이 했던 걸 뻔히 다 아는 녀석이라서 그런지 내가 이시간까지 얘기만 하다가 왔다고 하니까 궁금해 죽었다.
그래봤자 입을 꾹 다물고 있었으니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지만.


난 미처 하지 못했던 공부들을 새벽까지 몰아서 하면서도 전혀 피곤함을 느끼질 못했다.
내일 1교시가 있는데도 새벽 2시까지 공부하는 걸 보면서 룸메는 쟤도 정상이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아니... 그래도 이것밖에 안해오시면 어떡해요.”
“제가 어제 몸이 너무 안좋았거든요. 죄송해요.”


예상치 못한 봉변이 생겼다.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레포트가 엉망이 될 조짐이었다. 조별과제지만 2인 1조라길래 무임승차는 없겠다 싶었는데, 웬 걸. 안 할 사람들은 다 안 한다.


“하아...”
“제가 오늘 저녁에 꼭 메일 다시 보내드릴게요.”
“내일 12시까지 제출인데 정리하려면 또 오래걸릴텐데...”


말은 저렇게 했지만 사실 정리보다는 이 사람이 제 때 안 보낼 것 같다는 느낌이 컸다.



“그냥 여기서 저랑 끝내고 가시죠.”
“네?”


당황하긴 뭘 당황하고 있어. 그러게 좀 해오지 그랬냐.

원래 같았으면 이미 다 끝냈을 과젠데, 이사람 때문에 늦고, 책방 놀러가느라 미뤘더니
결국 전날까지도 끙끙거리게 됐다.

오늘 꼭 가겠다고 했는데... 저녁 안에 끝나겠지.


그 사람은 약속을 급하게 취소하는 것 같았다.
속으로 엄청 씹었을 것 같은데, 상관은 없다. 나도 똑같이 너 씹을 거거든.

자료조사를 하도 안 해와서 그 자리에서 바로 서치하고 도서관까지 가서 참고서적까지 뒤졌다.
교양인데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다가도 괘씸해서 집에 못 보내겠더라.
내가 B 정도로 만족하려 그랬는데, 너 때문에 A+ 받아야겠다.


진짜 불나게 열심히 했는데, 그 사람은 노트북을 좀 뚱땅거리나 싶으면 딴 거 하고, 좀 집중하나 싶으면 핸드폰 보고.
진짜 복장 터지는 줄 알았다.


누구 때문에 고생했는데 그 사람은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은 요만큼도 없이 끝내자마자 홀랑 가버렸다.
벌써 저녁 8시였다.
책방은 9시에 닫는데... 나는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다가
그래도 약속을 했었으니까 발걸음을 재촉해서 책방으로 옮겼다.

급하게 가느라 가방을 기숙사에 두고 오지도 못했다.
노트북이랑 교재랑 한가득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갔는데도 무겁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문득 이렇게 갑자기 사정이 생겼을 때 말할 수 있을 만한 연결고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연락처라도 알고 있으면 편할 텐데.

그런데 너무 사생활적인 거 아닐까. 물어보면 좀 그러려나.

막 간섭하는 느낌들고, 너무 나간 것 같지 않을까.


내가 물어보면, 알려줄까?



...알려줄까?


“안녕하세요!!”


안 닫았다!
나는 안에서 그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잠깐 지켜보다가 들어갔다.
왠지 건드리면 안될 것 같은 묘한 느낌이었다.
책을 보고 있는 그의 모습은 언제나 그렇다.

나 같은 애가 건드리면 안될 것 같은 소중한 조각품 같은 느낌.


“왜 이렇게 늦었어요-”


그 반짝이는 눈이 나를 향한다. 밖이 어두워서 그런가, 유난히 더 빛나 보인다.

나는 안으로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고 본론부터 뱉었다.


“저... 번호 좀 주세요.”


알려...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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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17 05:13 | 조회 : 1,696 목록
작가의 말
천재일우

대표사진 볼때마다 어이없어서 웃음나와욬ㅋㅋㅋ 민들렠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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