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사람이 이렇게 미쳐가는 구나.”
“닥쳐.”


잠깐 바람 쐬러 나왔다가 봉변만 당했다. 이런 소리 들으려고 나온 게 아닌데.
나는 내가 그렇게 환장하는 육회를 앞에 두고도 젓가락도 들지 못했다. 육회와 같이 나온 산낙지가 꿈틀거리는 걸 멍하니 바라볼 뿐.


“이렇게 염병할 시간에 그냥 찾아가겠다.”
“그거 때문에 이런 거 아니라니까.”


빌어먹을 촉새새끼. 하림이는 벌써 내 얘기를 승희에게 조잘조잘 떠들어 놓은 상태였다. 내가 반병신이 되어있다는 소리를 듣고 나름대로 걱정이랍시고 부른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육회에게 미안할 짓은 하지 말아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젓가락을 들었다.
기껏 이렇게 앞에두고 안먹는 건 육회에 대한 모독이야. 그럼그럼.
내가 억지로 한술 두술 뜨니까, 이승희는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이와중에 육회는 왜이렇게 맛있는거야.


“그래서 며칠 째 안가고 있는데?”
“...일주일.”
“슬슬 가도 될 것 같은데.”
“지금이 딱 좋았는데 내가 괜히 방해하는 걸수도 있잖아.”


내가 더 이상 책방에 가지 않아서 자기 시간을 실컷 즐기는데 눈치 없이 또 등장해버리는 거면 어떡해.
나는 그게 두려웠다. 눈엣가시같은 존재가 되는 게.
항상 사람의 마음이 서로가 똑같지는 않으니까.
나는 언제나 내가 마음을 덜 준 사람 쪽이기를 바랐다.


“그 사람이 심심해보였다며.”
“.......”
“그리고 너 기다렸다며.”
“그냥 손님이라서 한 말일 수도 있잖아.”
“야 누가 그렇다고 돈도 안받으려고 하겠냐.”


듣고보니 또 그 말도 말대로 맞는 것 같기도하고.
아니 근데 돈 안받은 건 그냥... 친해진 겸 그런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진짜로 맨날 안 냈던 것도 아니고.

그저 단골 유치 때문에 그런 거 아닐까. 그리고 돈 벌려고 책방 하는 것 같지도 않아보여서...

내가 웅얼웅얼대면서 아무말도 못하고 있으니까 승희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팡팡 두들겼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답답한 건 나인걸.


“근데 진짜 어떤 사람이길래.”
“뭐가?”
“아니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네가 이렇게 빠지냐.”


하긴 지금까지 연애의 ‘ㅇ’자도 안꺼냈던 난데. 연애 뿐만 아니라 그냥 모든 인간관계에 관심이 없어보였던 애가 사람 한 명 때문에 전전긍긍 하고 있으니.
게다가 직접적인 것도 아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렇게 불안해 하고 있으니까 신기할만도 하다.


“그냥... 사람 좋은 데 이유 있냐.”
“와 X바, 지금 도재현 입에서 나온 소리 맞냐.”


육회까지 떨어뜨릴 정도로 놀랄 일이야?


“육회 주워. 아까워.”
“이상한 새끼...”


그렇게 말하면서도 테이블 위로 떨어지자 마자 육회를 낼름 집어서 먹는다.
그래, 이렇게 혼자 고민만 하다간 끝이 없지. 내일은 한 번 가봐야겠다.


“너 공부 안 해?”


내가 살면서 저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맨날 공부밖에 안한다는 둥, 그렇게 맨날 공부만 하면 재밌냐는 둥의 소리를 들었는데
오늘은 하루종일 거울밖에 안보니까 보다못한 하림이가 말을 꺼냈다.

내가 경악하면서 무슨 소리냐니까 걔는 어깨를 으쓱 하면서 말한다.


“아니- 그냥 시험 며칠 안 남았는데 오늘따라 유독 꾸미기만 하시길래요.”
“살다가 좀 꾸밀 수도 있지.”
“공부하는데 거슬린다고 편한 거만 입잖아, 너.”


맞는 말이라서 대꾸를 못했다.
내가 하루종일 거울만 보면서 이걸 입을까, 저걸 입을까,
머리를 세울까, 그냥 내리고 갈까.
한참이나 고민하는 걸 보면서 하림은 그저 혀만 끌끌 찰 뿐이었다.


“나 나갔다 온다.”
“엉-”


관심도 없는 건지, 이미 어딜가는 지 다 알고 있는건지
녀석은 평소에 어딜 나간다고만 하면 이거저거 캐물었었는데 오늘은 조용했다.

책방으로 가는 발걸음이 꽤 조심스럽다.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평소보다 훨씬 빨리 걸었다. 숨이 좀 가쁘다 싶을 정도로 걷다보니 해가 다 지기도 전에 도착했다.

지금 안에서 뭘 하고 계실까.
늘 오던 곳이라 익숙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심장이 너무 쿵쾅거렸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지?

쉼호흡을 하고 난 뒤에야 간신히 한발짝씩 뗄 수 있었다.



“어서오세요... 어?!”


내가 어색하게 책방 안으로 발을 들이자 책을 정리하고 있던 그가 뒤를 돌아 나를 봤다.
오늘 신간이 나오는 날인가보다. 그는 낑낑대며 맨 위쪽 칸을 채우고 있었다.


“오랜만이시네요?”


밝게 웃으며 나를 맞이한다. 나는 그의 웃음에 사르르 녹아내리듯이 몸을 감싸고 있던 긴장이 한순간에 풀려버린다.
책 정리하고 있던 그에게 다가가서 책을 받아들었다.
팔을 뻗자 수월하게 책꽂이에 책을 꽂을 수 있었다. 큰 키에 딱히 자부심을 느끼며 살진 않았지만 이런 도움이라도 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여기에 놓으면 돼요?”
“응. 고마워요.”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게 책을 건넸다. 나보다 키가 조금 작아서 그런가 나를 올려다 봤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눈 마주친 것 만으로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왜 지금까지 안 왔어요?”
“.......”


솔직하게 말해야하나. 그냥 시험기간이었다고 말할까.
나는 괜히 내 마음을 한 번쯤 말해보고 싶은 마음에 휩싸였지만 일단은 참았다.
누구를 좋아해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흘러 넘치는 마음을 내 스스로 자제하기가 힘들다.


“할 게 너무 많아서... 책읽을 시간이 없었어요.”
“와서 그냥 과제 해도 되는데-”
“너무 실례인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니까 주인은 책을 건네던 손을 멈췄다.
거의 다되어가던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뚝 멈추니까 뭔가 싶어서 쳐다봤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
입을 꾹 다물고 미간이 좁혀진다.
근데 왜 저러는 것 마저 너무 귀엽지? 승희 말대로 내가 미쳤나.


“내가 불편해요?”
“네?!”
“나는 나름대로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지.
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말을 하니까 안절부절 못했다.

무릎을 조금 굽혀서 그와 시선을 맞추자 고개를 돌린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싶어서 계속 물어봤지만 묵묵부답이다.
마지막 책까지 내 손에 쥐어주더니 카운터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뭔가 그를 부르고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그의 이름도 모른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놀러와 놓고 이름 석자 모른다는 게 어이없어서 부르지도 못하고,
차마 다른 말을 꺼내기도 어려워서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읽고싶었던 책을 발견했는데, 그 책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한 손에 그 책만 꼭 쥐고서는 말을 걸 타이밍을 재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
“손 이훈.”
“네?”
“제 이름. 손 이훈이에요. 모르는 것 같길래.”


사람 마음을 다 꿰뚫고 있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쓰여있나?
난 깜짝 놀라서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와중에 이름이 멋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도 바보같은 표정을 지으니까 그가 결국 풉, 하고 웃는다.


“미안해요. 좀 애 같았죠..”
“전혀요.”


나는 책을 들고 가서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앉았다.
카운터에 있던 그는 결국 하하 웃음을 터트리면서 내 건녀편에 앉았다. 오늘은 노트북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여기 하루종일 있으면, 엄청 심심하거든요.
아주 가끔 손님들이 오긴 하는데, 다시 오는 경우도 별로 없고...
혼자있는 걸 싫어해서...”


자기가 지금 이렇게 주절주절 말하는 것도 되게 없어보이지 않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라 깜짝 놀라며 듣는 거 좋아한다고, 다 말해달라고 했다.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나는 우리가 친해진 줄 알아서 좋았어요. 맨날 놀러오라고 하는 것도 빈말이 아니었고.”
“아....”
“그런데 뭔가 아직 나를 어렵게 대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너무 부담을 줬나 싶기도 해서.”
“전혀 아니에요!!”


내가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면서까지 부정을 하자 그가 더 놀랬다.


“어어....”
“푸하!!”

민망함에 몸서리치면서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내가 뻘쭘해하는 걸 보면서 그는 뭐가 그리도 웃긴지 한참이나 끅끅거리며 웃었다.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가슴 속에 있던 응어리가 다 풀어지는 기분이다.
괜히 히죽거리면서 웃었다. 바보같아 보일까봐 걱정이긴 했는데 입꼬리가 자기 마음대로 씰룩거린다.


"저는 제가 가게 하시는 거 방해하는 것 같아서...”
“전혀 그런 거 아니에요. 하루종일 있어도 돼.”
“그때도 일 하실 때 많이 피곤해 보이시길래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생각났다.
피로함이 가득 묻어나오는 한숨과 함께.


“아... 그땐 내가 너무 예민했어요. 잘 안풀려서.”
“괜찮아요.”
“하긴 그때 그렇게 보내고 나서 마음이 편치가 않더라.”


그는 사람이랑 말하는 게 너무 즐거웠다면서 심심한 게 너무 싫다고 했다.
가끔은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동떨어진 기분이었다고 한다.
외로움을 죽기보다 싫어한다고도 했고.


이름을 알고 난 이후로 뭔가 그에 대해서 부쩍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느낌이다.
자기가 너무 구구절절 말하는 것 같지 않냐고 하길래 가만히 고개를 저어줬다.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게 이렇게 재밌는 일이었나.
나는 귀를 더욱 기울였다. 에어컨이 웅웅대며 돌아가는 소리나, 여름 끝 무렵 매미들이 내는 소리 같은 것들이 갑자기 고요해진다.

내 귀엔ㄴ 오로지 그의 목소리 뿐.


“너무 제 얘기만 했네요.”
“재밌는데요 뭘.”
“오늘은 이렇게 얘기나 하고 싶은데... 괜찮아요?”
“좋아요.”


내 말에 고맙다며 활짝 웃는다. 책방 안의 공기가 달콤해진다.
그는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작은 냉장고 안에서 음료수를 꺼내왔다.


“캔커피 괜찮아요?”
“네, 좋아요.”


전부 다, 그리고 그 중에서 당신이 가장.

9
이번 화 신고 2019-02-17 04:20 | 조회 : 1,437 목록
작가의 말
천재일우

무려 8화만에 주인공들 통성명 한거 실화입니까... 그리고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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