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가슴이 간지럽다. 뭔가 계속 가슴팍 부근에서 간질간질, 거리다가 팍 하고 심장안으로 쑥 들어오는 기분이다.

테이블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분명 나는 책을 읽는다고 하고 앉았는데, 책 표지는 펼치지도 않은 채로 한창을 그와 떠들었던 것 같다.

우리는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았다.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것, 책을 좋아한다는 것,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을 싫어하고 팔목에 점이 있다는 점.


그 사람이 새하얀 팔목을 보여주면서 자기 여기에 점 있는데, 똑같다고 말했다.
처음엔 무슨 소린지 못 알아 듣자 그가 내 팔목에 있는 점을 쿡, 누르면서


“여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나는 그 때 당황해서 뭐라고 대꾸했는지 조차 모르겠다. 아니 입에서 말이 나가기는 했을까.

그 따사로운 공간 속에서 나는 잠깐 동안 꿈을 꾸다가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어두운 밤 어둠 속을 걷고 있는데도 별빛이 오늘따라 여기까지 닿는다.


“내일도 가야지!”


내가 지금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남자라는 것에는 생각보다 놀라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보다 오랜만에 가슴이 뛴다는 사실이 더 설레고 낯설었다.
게다가 그 사람을 본다면 아마 남자라도 반하지 않고는 못버틸거야.




“너 무슨 일 있어?”
“아니? 왜?”
“그냥 좀 들떠보여서.”


안 그러던애가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으니까 신기했나보다. 내가 이렇게 신났던 때가 있었나. 늘 무미건조하게 살았던 것 같은데.


“야 내가 언제 제일 신나보였어?”
“최근에?”
“엉.”
“니가 잘 웃기나 하냐. 음… 장학금 받았을 때?”


뭐야 그 심하게 재미없는 얘기는. 말문이 막혀서 빨리 다른 거 말해보라고 손짓을 하니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온 대답이라는게,


“개같다고 욕하던 조랑 하던 과제 끝났을 때?”
“…….”


도대체 인생을 어떻게 산 거냐.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이렇게 학교에만 얽매여 사는 인간이었나.

내가 금방 침울해지자 룸메는 위로랍시고 내 속을 후벼판다.


“야 그래도 성실하게는 살았네.”
“닥쳐 이 새끼야.”


커플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지금은.



*


“오셨어요?”


정말 매일매일 출석 체크 하듯이 책방에 들렀다. 거의 일주일 동안 매일같이 가서 같이 테이블에 앉아서 과제도 하고, 책도 보고, 얘기도 하면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과제를 할 때마다 고통 받기 일쑤였는데, 왠지 그가 옆에 있으니까 괜히 멋있어 보이려고 열심히 하느라 진도가 쑥쑥 나갔다.
역시 이 사람은 나한테 도움만 준다니까.


그런데 오늘따라 내게 주는 관심이 적었다. 이상하게 인상을 쓰는 시간도 많았고 어딘가가 불편해보였다.

아무래도 작업을 하는 게 잘 안 풀리나 본데, 노트북 앞에서 한참이나 타자를 치다가 거의 30분 동안 아무것도 치지 못하기도 하고 그랬다.



“저 오늘은 이만 갈게요.”
“아… 그러실래요?”


보통은 몇 시간 동안 같이 있어도 아쉬운 티를 내던 그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1시간만 있다가 가려고 해도 붙잡지를 않는다.
오히려 피곤했는데 잘됐다, 하는 기색이었다.


“스트레스 받는 일 있으세요?”
“아니에요. 전혀 없어요.”


애써 웃는 게 다 보이는데 정말 괜찮다면서 잠깐 눈 좀 붙이면 될 거라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괜찮다고 하는 그 사람을 두고 기어이 계산을 했다.
책을 읽고 가는 날이면 책값을 잘 안받았는데, 도저히 미안해서 못견디겠더라.
대신 갈때마다 간식거리를 간혹 사가곤 했는데 그 사람은 간식이랑 자기 말벗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맙다고 했다.


이런 사람을 내가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어.




나는 이렇게 팔불출 같은 소리만 해대다가도 갑자기 저 사람의 바뀐 태도에 신경이 쓰여서 도저히 내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 안해안해!”


결국 포기하고 노트북을 탁 덮어버리고 침대위로 쓰러졌다.


“웬일이냐 니가? 할 일을 미루고.”
“나도 사람이거든.”
“알지. 근데 가끔 로봇같아서.”


로봇.
진짜 나 로봇같이 살긴 했지.
제 때 할 거 하고, 가끔 등신같이 조별과제 무임승차 같은 거 똥처리 다해주고.
그래도 시험 끝나면 친구들이랑 술마시고 피시방 가서 게임도 하고 그러면서 지냈는데.


쟤네는 맨날맨날 할 일 하면 무조건 로봇인 줄 아나.


“오늘은 일찍 들어왔네?”


눈치도 빠른 놈.
책방에 있느라 매번 밤이 되어서야 들어오던 나였는데 오늘은 저녁 먹기도 전에 들어와 있으니까 의아했나보다.


“엉.”
“기분 안 좋은 일 있었어?”
“엉.”
“그 책방 주인 때문이야?”
“엉.”


엥?


“뭐?!”


얘가 어떻게 알았지?
내가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키니까 룸메는 그저 어깨를 으쓱, 하고 만다.


“너 맨날 책방 가잖아. 거기 주인이랑 잘 돼가고 있던 거 아니었어?”


하림이가 알 정도면 주변에 이미 소문난 거 아니야?!
내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자 하림이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직 나 밖에 몰라. 너 친구 없잖아. 말할 사람도 없어.”
“친구 있거든…”
“그래그래, 이 승희 하나 있지.”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씩씩 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렇게 놀랐는데 정작 정곡을 찌른 당사자는 뭐 그리 호들갑이라는 표정이었다.



“너 요즘 너무 맨날 가긴 했어.”
“…그래?”
“엉.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카페도 아니고.”
“근데 막 심심했다고 고맙다고 그랬는데.”
“그 말의 반만 믿어야지! 진짜로 맨날 올 줄은 몰랐겠지.”


그, 그런가?
나는 지금까지 나 혼자 들떠서 했던 행동들이 그사람에게는 부담이고 불편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나니까 충격에 빠졌다.

오늘도 나 때문에, 나랑 있는게 너무 불편해서 그렇게 심기가 안 좋았던 걸까?
혼자있는 시간을 괜히 방해한 기분이라서 무서웠다. 나 혼자 들떠서 눈치없이 맨날맨날 놀러간거네.

생각해보면 그랬다.
단골이랍시고 맨날 가서 죽치고 앉아서 책값고 어쩌다가 한번씩 내고.
간식 사가는 거 빼면 뭐 하는 것도 없는 애 놀아주는 것도 어느 정도가 있지…


“야… 우냐?”
“뭘 울어.”
“너 툭 치면 영혼 날라가겠는데.”


하도 멍하게 있으니까 룸메가 내 앞에 손을 왔다갔다 한다.
나 진짜 바보같다. 나름대로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지금이라도 자제해서 가면 되지 뭘.”
“나 벌써 싫어졌으면 어떡해?”
“에이 설마 그러겠어.”


자기 일 아니라고 천하태평이다.
결국 룸메가 던진 그 한마디에 충격 받은 나는 밤새 머리를 쥐어 싸매고 고민 하다가 며칠 동안 카페에 결근을 했다.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당연히 무단 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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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8 01:26 | 조회 : 1,846 목록
작가의 말
천재일우

새해복 많이받으세요 모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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