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오늘은 늦었네?”


결국 룸메는 기숙사 통금시간을 간당간당하게 들어왔다. 이렇게 늦게 다니는 애가 아니라서 이유는 여자친구 밖에 없다고 생각하긴 했다.


“여자친구랑 있다가 데려다주고 오느라.”
“야, 하림아. 너는 여자친구 만나기 전에…”


룸메는 갑자기 너가 웬일이냐는 표정이었다. 연애에 관련해선 전혀 말 해본적이 없던 나라서.


“뭔데뭔데?”
“아, 아니다.”
“아 뭔데 말해봐. 맘에 드는 여자 생겼어?”


그게 여자는 아니라서… 나는 그것부터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고보니 남자네. 남자를 상대로 이런거 상담하면 좀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나는 한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다가, 룸메가 그렇게 물어보니까 갑자기 이질감이 들었다.
문득 내가 남자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잘보이려고 하는 이유가 정말 친구처럼 지내고 싶은 마음때문일까, 하고 의심해보게 되었다.


의심은 시작했지만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너도 막 사귀기 전에 오해받고 그런 거 있었냐?”
“오해?”
“막 밀당한 건데 오해해서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거나.”
“아아- 있긴 있지. 나는 아니고, 여자친구.”
“어떤식으로?”
“그냥 되게 차갑게 굴길래, 나 싫어하는 줄 알았지.”


거의 비슷비슷 하구나.
나는 내가 지금 사귀기 전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하던 행동을 하는 사람과 내 상황이 똑같다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넌 무슨 기분이었냐 그때?”
“그냥 얘가 날 싫어하나... 그래서 거리를 좀 뒀지.”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한건지, 내가 저 여자친구 마음이라고 생각하니까 괜히 공감되고 그랬다.

“근데 어떻게 사귀게 됐어?”
“내가 좀 거리를 두고 그러니까 여자친구가 그때 불안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여자친구가 먼저 막 다가왔어.”
“여친이 용기 냈네.”
“그런 셈이지?”


그래도 잘 풀렸으니까 저렇게 여유롭게 말하는 거지, 막상 내입장이 되어보니까 잘 되고 자시고 그냥 불안해 죽겠다.

사실 그 사람은 나를 거리 두는 것 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내가 괜히 또 오바해서 앞서나가면 어떡하지.
이 미적지근한 관계 그대로가 더 나은 걸수도 있는 걸까.


이젠 조금씩 헷갈렸다. 마음을 다 잡았다가도 그 사람이 딱 여기까지만의 관계를 원할 걸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자주 오니까 잘해주는 걸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그저... 착한 사람일 수도 있고.


“곧 죽어도 아니라고 하는 거 보니까 좀 부정하는 시기 인 것 같은데, 그냥 좋으면 괜히 딱딱하게 굴지말고 밀어붙여.”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래그래, 아닌데, 암튼 그러라고 나중에라도 생기면. 너 성격에 살갑게 굴진 못할 것 같은데.”


그래도 꼴에 같이 산다고 날 잘 안다. 아마 하림이의 저렇게 수다스럽고 넉살 좋은 성격이 아니었다면 아마 몇 년동안 서먹서먹하게 지냈을 지도 모른다.

막상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 해주는 걸 보니까 내가 지금까지 했던 고민들이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냥 부딪히는 거다. 답은 그때 보이겠지.



*



“어? 일찍 오셨네요?”


빌려간 지 채 3일도 되지 않아서 나는 시집 한권을 다 읽었다. 빨리 읽었다고 해서 대충 읽은 건 아니고, 그냥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읽었더니 어느새 다 읽어버렸다.
시집이라 얇기도 했고, 빨리 책을 반납하러 가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고.


그 날은 좀 여유로웠는지 테이블에서 커피와 같이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그 광경, 들리는 잔잔한 멜로디의 노래.
그리고 천천히 이쪽을 돌아보는 그 모습까지.
나는 그 모든 것이 다 슬로우모션으로 보였다. 왠지 그랬다. 그날은 유독 특별했던 것 같다.

원래 용기를 한껏 내보려고 마음 먹은 날은 그렇게 변수가 생긴다.
그렇게 여유롭게 앉아있으면 내가 어떡하라고.


“이번에는 좀 빨리 읽어서요.”
“진짜 빨리 보셨네요?”


뭐가 그렇게 웃긴지 주인은 연신 웃어댔다.


“기분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아 티나요? 사실 오늘… 월급 들어왔거든요!”


월급이라고 하는 거 보니까 따로 하는 일이 더 있나보다. 나는 그 사람이 그렇게 행복해 하는 얼굴은 또 처음 보는 것 같다.

아마 저 사람은 모르겠지. 지금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계속 좋아하는 것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아, 너무 들떴나요?”
“아니요, 너무 좋아 보여서…”


주인은 쑥쓰러워 하며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읽던 책을 마저 읽으려는 태세로 내게 천천히 둘러보라고 말했다.


“혹시…”
“네?”


그가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책에서 눈을 떼고 온전히 날 바라보는 그 시선이 너무 예쁘다.
눈망울이 사슴 같다는 말은 저런 사람들을 보고 하는 말이구나.


“여기서 좀만 읽다가 가도 돼요?”


테이블의 맞은 편 자리를 노리고 한 말이 아니냐고?
맞다. 정답이다.


“돈 안내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여기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돈도 안내도 되는데요?”
“네?!”


너무 태연하게 대답하니까 오히려 더 놀랐다. 그 사람은 싱긋 웃으면서 빨리 앉으라고 오히려 나를 재촉했다.


나는 아무 소설책이나 하나 뽑아서 얼른 앉았다. 내가 딱 원하는 분위기의 카페에 온 것만 같았다.


“커피가 없어서 어떡하지. 근처에 카페에서 사온 건데, 잠깐 다녀올까요?”
“아니요! 진짜 괜찮아요. 저 어차피 커피 못마셔요 정말 괜찮아요.”


올 때마다 느꼈던 거지만 그는 여기를 운영하면서 퍽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
하긴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왜 이 책방을 계속 운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뭔가 사정이 있겠지 하고 쉽게 생각했다.


"혼자 이렇게 있으면 심심하진 않으세요?”
“음… 당연 외롭죠.”


외롭다고 순순히 대답하는 그 얼굴에서 순간 진심을 보았다. 혹시 억지로 괜찮은 척을 하고 있던 사람은 아닐까 순간 의심이 들었지만 당장은 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저는 다시 안오실 줄 알았어요.”
“저요? 왜…요?”
“다음 날 온다고 하셔놓고 일주일이나 안왔을 때요.”


아, 처음에 그랬었지.
나는 그걸 생각보다 잘 기억하고 있었다는 게 더 신기했다.


“나 그 다음날 엄청 기다렸는데.”
“…….”

그 사람이 그 말을 하는 시간, 3초.
사람이 사람에게 반하는 시간, 3초.


나는 그 3초동안 부정할 수 없을 만큼의 감정을 느껴버렸다.


내가 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이유를 깨닫게 되는 시간, 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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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5 04:31 | 조회 : 2,080 목록
작가의 말
천재일우

많이 봐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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