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홧김에 빌려온 것이지만 윤동주 시집은 훌륭했다. 울컥해서 눈물이 줄줄 나올 뻔한 적도 있었다. 센치해지는 밤 읽으면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열흘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슬슬 시험기간이라는 압박이 오기 직전이었지만 나는 이제야 좀 홀가분해진 터라 책방에 출근할 수 있었다.
오늘은 가면 좀 얘기를 많이 나눠야지. 오늘은 도망치지 말아야지.


그렇게 몇 번이나 다짐했는지 모르겠다. 쉼호흡까지 했다.
사실 나 혼자서 생각하면서도 조금 이상하게 느끼긴 했다.

너무 자의식 과잉 같기도 하고, 사실상 그 사람이 날 별로 생각 안 할수도 있는건데 나 혼자 미안해서 쩔쩔매고 있는 걸 수도 있고.....


걸어서 2~30분이나 걸리는 거린데 신기하게 가는 길이 전혀 힘들지가 않았다. 평소엔 운동하는 것도 귀찮아하면서 이런 건 하나도 안 귀찮게 느껴진다.
오히려 가는 길이 미로같아서 올 때마다 새로운 걸.


“어서오세요~”


마치 손님이 나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
그 편안함에 괜히 가슴이 찡했다. 누군가에게 익숙해진다는 건 꽤나 멋진 일이니까.
나는 내 좁은 인간관계에 꽤 만족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에게 빠져버리다 보니 사람에게 실망을 하는 일도 많아서 아예 가까이 하지를 않았다.


“책 반납하러 왔는데요…”
“넵”


책방 주인은 그 날은 카운터가 아니라 한 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마한 원형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노트북으로 뭔가를 하고 있었는데, 꽤 진지한 표정이라서 오늘은 먼저 장난도 걸 수가 없었다. 나는 오늘도 이런 새로운 모습에 반한다.


“또 다른 거 빌리진 않으세요?”
“아, 좀 볼게요.”
“천천히 둘러 보세요.”


여전히 내게 친절한 사람인데, 어쩐지 내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아마 나를 누가 말을 안 걸어주길 원하는 손님이라고 생각을 했나보다.
난 그저, 그저… 그렇게 급격히 가까워지는 관계가 낯설었을 뿐인데.


워낙 사람과의 관계에는 유별나게 조심스러운 편이라서, 그렇게 내게 훅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어쩔줄을 모른다. 정작 내가 가볍게 장난을 치는 건 잘하면서 깊게 들어가는 관계에서는 철저하게 배제시켜 버린다.


책이라도 추천해달라고 말을 걸까, 하다가도 노트북 앞에서 집중하고 있는 사람에게 말을 막 걸 수가 없었다.
나 첫날에는 어떻게 그렇게 장난을 치고 같이 웃고 그랬을까.
그때는 이렇게까지 그가 내게 마음을 열 줄 몰랐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맘속으로만 초조해 하다가 괜히 책을 뒤적뒤적 거렸다.


“오늘도 시집 보시려고요?”
“ㄴ,네? 네. 그게 너무 좋았어서...”


그가 노트북에서 잠시 시선을 떼고 내게 몸을 돌려서 말을 건다. 책방에는 웬일로 잔잔한 노래가 틀어져 있었다. 나는 그 노래에 집중 하다가 갑자기 섞여오는 말소리에 흠칫 놀랐다.

아, 또 오해하면 어떡하지.


나는 괜히 말을 거는 걸 싫어하는 사람처럼 보였을까봐 걱정이었지만 정작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다른 시집들도 좋은 거 많으니까 천천히 둘러보라는 말 뿐이었다.
나는 괜히 그 노트북이 미워지기까지 했다. 저것 때문에 나한테 신경을 안 쓰나봐, 하는 서러움.


결국 아무 시집이나 집어들고 카운터로 갔다. 오늘은 꽝이다. 한 열마디나 제대로 나눴을까.


“한 권만 빌리세요?”
“네.”


계산을 해주는 그를 꼼꼼히 살폈다. 사실 그러려고 한 건 아니고, 오늘따라 조금 피곤해보이길래, 나도 모르게 관찰하고 있었다.


“어, 뭐가 묻었나요?”


계산을 마친 그가 고개를 들다가 나랑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그가 당황하며 얼굴을 더듬었다. 나는 더 당황해서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냥, 오늘 좀 피곤해 보이셔서요…”
“아 티나나요?”


머쓱한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웃는다. 그는 대충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양이 너무 많아서 벅차다고 했다.

일? 무슨 일?
서점 운영 말고 따로 하는 일이 있는 건가?

나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뭔가 신상을 캐묻는 것 같은 느낌이라 그냥 그러냐고 하면서 힘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또 그 전형적인 인사로 나를 배웅했다.


나는 못내 그 푸석해보이는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아 근처에 편의점 있던 것 같은데.”


음료수 하나 고르는 데만 거의 5분은 걸린 것 같다. 커피를 사다주려다가 커피를 못 마실 수도 있으니까. 탄산 음료는 집중이 안 될수도 있으니까 등등...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가장 신중하게 고른다는 것이 결국 가장 무난한 비타민 음료였다.
혹시 이런 밍밍한 맛 싫어하면 어떡하지 싶어서 달달한 것도 좀 샀다.


“어서오세… 어?”


돌아갔던 내가 다시 들어가니까 그의 표정에 물음표가 떴다.
나는 괜히 멋쩍어서 그냥 별 말 없이 검은 봉투를 건넸다. 뭐라고 해야될지 모르겠더라. 머리가 그냥 새하얘졌다.


“저… 이거…”
“어! 뭐 이런거까지 사오셨어요!!”


봉투를 보더니 그가 깜짝 놀라면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너무 감사하다면서 그가 연신 인사를 했다. 뭔가 해드릴 게 없어서 어떡하냐고 그랬다.


“원하는 책이라도 하나 고르실래요? 너무 감사한데.”
“그렇게 큰 것도 아닌데요, 뭘... 괜찮아요 진짜. 제 거 사는 김에 산 거에요.”
“정말 감사해요. 안그래도 너무 피곤했는데.”


주인은 달달한 걸 좋아한다면서 한껏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정도면 내가 어느정도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 주겠지?

나는 갑자기 낯가리는 이미지를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의아함이 들긴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단순히 그런 사람으로 안보이려고? 내가 원래 그렇게 오해를 풀고 싶어서 노력하는 사람이었나?

누군가 나를 이유 없이 싫어한다고 하면 싫어할만한 이유를 만들어주는 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사람에게 상처받기에 지쳐 내가 먼저 쳐내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유독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너무 맑은 사람이라 그런가.


15
이번 화 신고 2019-02-05 02:49 | 조회 : 1,809 목록
작가의 말
천재일우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 다음부터는 적극적으로 대시를 해보려는 공의 모습을 ....ㅎㅎ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